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31)화 (231/246)

228화

25. 생각지도 못한

안팎으로 정말 파란만장한 영화였다.

“하아.”

영화가 끝나고 이미 다른 영화를 보려 OTT 사이트를 둘러보는 중이었지만, 조금 전 본 영화가 남긴 여운은 너무 진했다.

액션 영화가 액션만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또한 영화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집중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뿐이랴, 영화를 보는 자세 또한 집중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깨달았다.

조금 전 영화를 볼 때를 상기하니 절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여기서 또 티를 냈다간 김세현이 모르는 척 다시 또 그 부분을 파고들 소지가 다분했다. 또 몰랐다. 그걸 핑계로 다시 또 등 뒤에서 날 안은 채 영화를 보려 할지도.

“…….”

엔딩 크레딧은 물론이고 쿠키 영상까지 야무지게 챙겨 봤음에도 불구하고 김세현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릴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몸으로 끌어당긴 탓에 빠져 나오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계속 이러면 약속을 취소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김세현은 날 놓아주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거다.

지금이야 그와 거리를 두고 있기에 제법 진정되었지만, 다시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 심장은 그대로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도 연신 김세현을 훔쳐보는 걸 반복하는 나도 참 대단하다. 나는 혼자 헛웃음을 지으며 김세현이 살피는 TV로 시선을 주었다가 바로 정색했다.

“그거 말고요.”

“아깐 형 보고 싶은 거 봤잖아요. 이번엔 저 보고 싶은 거 봐야죠.”

분명 처음에 멜로나 로맨스 쪽은 안 보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은근슬쩍 그쪽 장르를 뒤적거린다. 단호하게 말을 잘라 내자 김세현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 돼요.”

“…다른 장르 볼게요.”

“좋아요.”

혹여 다른 말을 하며 멜로나 로맨스를 보겠다고 우기면 어쩌나 했는데, 김세현은 순순히 물러서더니 이내 다른 장르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에 안도하며 곁에서 지켜보다가 다시금 입을 뗐다.

“아까 액션 영화 봤으니까 이번엔 다른 걸로 봐요.”

혹시 몰랐다. 다시 또 그런 장면이 나올지도 말이다. 혹여 얼굴이 뜨거워지거나 하진 않을까 싶어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건네자 김세현이 힐끔 날 바라보았다.

“그럼 공포나 스릴러로 볼까요?”

“좋아요. 대신에 19금으로 말고 수위 낮은 걸로 봐요.”

“또 그런 장면 나올까 봐요?”

그냥 지나가면 좋을 걸 굳이 입에 담는다. 얼굴 가득 짓궂은 미소를 짓는 김세현을 보니 순순히 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간 내가 판 함정에 내가 걸려들 게 뻔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형이 그렇다면야. 얌전한 걸로 골라 볼게요.”

계속 놀리고 싶었는지 얼굴 가득 미소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상 장난을 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영화를 고르는 이를 보다가 다시금 화면을 보는데, 때마침 김세현이 화면을 가리켰다.

“형, 이건 어때요?”

“뭐든 좋아요.”

걸러 낼 건 걸러 냈기에 이젠 뭐든 봐도 좋았다. 그래, 김세현이랑 보면서 불편한 점이라곤 살색이 난무하는 장면밖에 없었으니 15세로 걸렀으면 더는 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내가 결정하자 김세현이 알았다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가 현관 쪽을 가리켰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려고요.”

“저는 그럼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좀 챙겨 둘게요.”

“좋아요.”

먹을 거란 이야기를 들은 김세현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 모습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곧바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이미 식사를 한 터라 배가 고프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입가심할 음식이 필요했다. 특히 김세현은 워낙 대식가인지라 더더욱 필요할 테고.

예전에 사 두었던 간식들을 모조리 꺼내어 쟁반에 넣어 거실로 가니 때마침 김세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형, 마실 건 내가 챙겨 올게요.”

“그래요.”

주전부리를 챙기고 나서 바로 가지고 오려 했더니 김세현이 먼저 부엌으로 간다. 이내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와 다시금 부엌으로 향하는데, 세 걸음도 걷기 전에 김세현이 컵과 탄산음료를 챙겨 나왔다.

“물 마시려고요?”

“물도 좀 챙길까 해서요.”

“그럼 내가 가지고 올게요.”

가지고 나온 콜라와 컵을 내게 준 김세현이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내 물과 컵 하나를 더 챙겨 와 곧바로 자리에 앉아 물을 따른다. 나는 다시 이부자리에 앉으려 했다.

“이번 영화는 먹으면서 볼 거니까 저기 기대서 앉아서 봐요.”

주전부리가 든 쟁반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세현이 소파 쪽을 가리켰다. 하긴, 잠잘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좀 그렇긴 했다. 자리를 옮겨 앉자 김세현이 잠시 켜 두었던 거실 불을 끄더니 새 영화를 재생시켰다.

“이번 영화는 조금 전 영화보다 더 재미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요?”

“사실, 아까 본 영화가 던전 내부를 현실감 넘치게 했다고 해서 궁금했었거든요. 그런데 기대하지 말 걸 싶더라고요.”

내가 봤을 땐 제법 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헌터의 눈으론 영 볼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에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뒷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던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긴 하지만요. 아, 그렇다고 해서 하늘 형이랑 같이 가기로 한 던전들도 삭막하고 피 튀기는 그런 장소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네.”

김세현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그만큼 안전한 던전이 있단 말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이 이해되기도 했고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김세현이 저렇게 다급하게 말하니 괜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같이 던전에 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흐뭇해할 때였다. 날 빤히 바라보는가 싶던 김세현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이번에 고른 영화도 흥미가 떨어지면 하늘 형 보면 되니 그것도 색다른 재미겠지만요.”

“…….”

굳이 날 보겠다는 말을 꺼내는 이율 모르겠다. 곁눈질로 김세현을 보자 날 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모르는 체하며 TV를 보자 김세현도 자세를 바꾸는가 싶더니 이내 주전부리를 하나둘 까서 먹기 시작했다.

“형, 여기 이것도 먹어요.”

“잘 먹을게요.”

혼자 먹는 게 그랬는지 중간중간 내게도 과자를 건넨다. 그걸 먹으며 막 시작한 영화에 집중하는데, 생각보다 김세현이 고른 영화는 처음부터 흡입력이 엄청났다. 순식간에 영상물에 흘려 집중해 볼 때였다. 미약한 무게감이 어깨에서 느껴져 자연스레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

곁에 김세현이 있다는 것조차 깜박할 만큼 영화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바로 옆자리긴 해도 조금 거리를 둔 채 앉았건만, 어느새 김세현과의 거리는 몹시도 가까워져 있었다. 한 소리 들을까 싶었는지 정말 조심스럽게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린 행동에 헛웃음이 나려 했지만, 여기서 웃는다면 분명 김세현은 불만 어린 척하며 좀 더 거리를 좁히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 자세를 유지했다간 내 집중력이 집을 나갈 듯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김세현이 내 이런 갈등을 알아차렸는지 살포시 얹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내 어깰 감싸 안았다.

“형, 영화 봐요. 지금 중요한 장면 나오는 거 같은데.”

한 손으론 내 어깰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론 화면을 가리킨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또 어떻게 본다면 이보다 더 어색하게 느껴질 순 없었다. 잠시 갈등하던 찰나, TV에서 추격전이 펼쳐졌는지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김세현의 손을 지적하는 걸 포기하곤 화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

“저런 놈들은 바로 잡히면 좋은데, 꼭 안 잡힌단 말이죠.”

“그래야 영화가 진행되니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답하려 했지만, 내가 들어도 목소리 가득 긴장한 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김세현이 놀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잡히면 영화가 아니지.”

“…….”

김세현이 저리 넘겨 주니 나야 좋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깨를 감싼 손과 더불어 김세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관심이 갔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옆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면 곤란한데.”

“으음.”

역시, 김세현은 김세현이었다. 시선을 주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곤란하다며 눈을 마주해 오는데, 그의 표정을 보니 내가 더 난감해졌다.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무덤덤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건만, 나를 보는 김세현의 눈빛은 그때완 천지 차이였다. 그래,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시선에 얼른 TV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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