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29)화 (229/246)

226화

25. 생각지도 못한

혹여 다른 소리가 들려오진 않을까 긴장하는데 방금 전에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 말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어떻게 보면 조용해 다행스러웠지만, 너무 조용하니 또 그만큼 긴장되었다.

“…….”

하지 않아도 될 긴장을 하게 된 건 전부 저 불필요한 장면 때문이었다. 스토리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굳이 이런 장면을 넣어서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줄이야.

불편한 티를 내는 것도 좀 그렇고 그저 가만히 누워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한 번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속으로 영화 제작사를 탓하느라 아주 잠깐 김세현이 등 뒤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거실 공기까지 의식되었다.

“…….”

늦은 밤이 아닌지라 이제야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공기가 마치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인식하자 공기뿐만이 아닌 다른 주변까지도 몹시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노력했지만, 그게 쉽게 될 리 만무했다. 내 바로 뒤에 그가 누워 있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화면 속 장면 때문에 숨을 이상하게 쉰다거나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숨소리까지 의식되자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게 바로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숨을 몰아쉬는데 이번엔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애써 진정해보려 노력하는데 이러면 정말 반칙이었다. 이제 와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그렇고, 화면도 그렇고.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이 공간을 이상야릇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난 지금 한숨조차 내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화면을 보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TV 언저리에 고정했던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떨궜다.

어쩌면 TV를 보지 않으면 조금 진정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선을 조금 내린다고 하여 화면 속 장면과 더불어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되도록 보지 않는다면 지금보단 상황이 나을 것이었다. 그렇게 앞뒤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있을 때였다.

“형.”

하필 이 순간 김세현이 날 부를 게 뭘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몸까지 파득거리며 그대로 상체를 일으키자 김세현 역시 날 따라 앉았다.

“왜 그렇게 놀라요?”

이런 상황엔 작은 소리만 나도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뱉었다간 분명 놀릴 게 뻔했다. 나는 이리저리 눈을 움직이다가 떠듬떠듬 생각나는 말을 내뱉었다.

“아, 아뇨. 순간…. 순간 좀 졸았어요.”

그래, 잠을 잤다고 한다면 김세현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다. 갑자기 말을 뱉은 것치곤 제법 괜찮은 핑계를 댄 것만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싸한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김세현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졸았다고요?”

저렇게 묻는 걸 보니 김세현은 내가 자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났다간 TV 속 장면과 더불어 김세현을 의식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는 게 들킬 터였다. 이럴 땐 역시 뻔뻔한 게 최고였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내 뜻을 관철시켰다.

“네, 조금이지만요.”

“그렇다면야.”

이번에도 역시나 김세현은 순순히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니 괜히 긴장된다. 마른 침을 삼키는데, 김세현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네요. 난 본 거지만 형이 안 봤다는데, 좀 되감을게요. 놓친 부분은 잘 챙겨 봐야죠!”

“…어.”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는데.

상황을 모면해 보려 선택한 말이건만, 김세현이 저리 말하니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김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리모컨을 만지더니 다시금 자리에 누웠다.

“형, 얼른 누워요. 다시 봐야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보자고 하는 걸 보니 역시 내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는 걸 들킨 모양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사실, 안 잤어요.”

“저는 형 자는 줄 알았는데?”

“네?”

내가 자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놀라 그를 바라보자 누운 자세 그대로 리모컨을 쥔 손을 내 자리 쪽으로 뻗은 김세현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안 잔 거예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앞으로 좀 감았는데 다시 쭉 이어서 봐요. 쭈욱.”

“…….”

자지 않았음을 말했건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그 부분을 파고들 줄은 몰랐다. 누가 봐도 장난을 치기 바쁜 모습을 보다 보니 김세현이 이런 장난을 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 김세현은 내게 여러 차례 장난을 친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신기했지만, 묘하게 응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론, 이 충동을 느끼게 된 데에는 김세현의 저 짓궂은 표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마치 내가 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듯한 얼굴로 날 보며 웃는 모습이 괜히 얄밉다. 나는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한 번 더 저 얄궂은 표정을 무시하기란 무리였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난 뒤가 조금 걱정되었으나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누우며 김세현의 팔뚝에 머리를 댄 채 리모컨을 뺏고는 그대로 멈춘 화면을 재생시켰다.

하지만 그 잠깐의 충동은 시각과 청각이 자극받자 엄청난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김세현이 너무 조용하다. 그뿐이랴, 내가 베고 누운 팔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내 행동에 많이 놀란 듯싶었다. 김세현을 놀라게 만든 건 제법 만족스러웠지만 이다음이 문제였다. 김세현이 반팔을 입고 있는 터라 내 볼이 그의 살에 완전히 닿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이제 와 머리를 드는 것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앉는 것도 이상했다. 그뿐이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김세현의 팔을 계속 베고 누워 있기가 좀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누워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누워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볼에서 느껴지는 김세현의 맨살 느낌을 의식하며 슬쩍 얼굴을 들 때였다. 별안간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하늘 형은 이래서 좋다니까요?”

“…너무 그렇게 웃지 마요.”

“뻔뻔하게 사람 팔 베고 누웠으면 계속 뻔뻔해야죠. 뒤늦게 후회하면서 은근슬쩍 고개를 띄우는 건 뭔데요. 누운 김에 그냥 베고 같이 영화나 봐요. 형이 편하게 누워야 나도 편하게 눕죠.”

김세현이 베고 누우라고 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팔을 베고 누워있기엔 너무 민망했다. 심장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고.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더 든 채 김세현의 팔을 치우려 했지만, 그는 좀처럼 팔에서 힘을 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결국 팔을 치우는 걸 포기한 채 그대로 베고 누웠다.

“그럼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좋아요. 대신에, 나도 편하게 누울게요?”

김세현 성격에 저렇게 물어보는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편히 눕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저렇게 물어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김세현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끄덕이는 대신 답했다.

“그러세요.”

“형이 허락했어요?”

한 번 더 허락을 구하는 소릴 들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어떤 자셀 취하려고 허락까지 구하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자셀 바꾼다고 해도 제약이 있기에 예상 밖의 행동은 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번 더 알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내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흠칫하며 몸을 반쯤 틀어 뒤를 확인했다.

“TV 봐요. 아, 나도 이렇게 누우니 편하다.”

“…….”

편하게 눕겠다는 말이 이런 뜻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등 뒤에서 나를 감싸 안은 김세현이 날 내려다보며 씩 웃는다. 생각지도 못한 자세에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잊고 있었던 TV 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잘나긴 했지만 나 그만 보고 TV 봐야죠.”

당연히 보긴 봐야겠지만, 지금 타이밍에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건 좀 애매했다. 거기다 이대로 시선을 돌리면 김세현이 좀 더 거리를 좁혀 올 것만 같았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김세현이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계속 그렇게 보면 TV 속 사람들처럼 한번 찐하게 입이라도 맞추고 싶다는 걸로 알아들으면 되는 거죠?”

“흡!”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김세현은 아는 걸까?

그간 김세현이 했던 말들 중 이번 말이 최고인 듯했다. 사람 심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소리를 하며 은근한 시선을 보내던 김세현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더니 내 얼굴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닿은 곳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딘지 알 수 있었다. 김세현이 내 입술을 바라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는 모습에 황급히 손을 들어 입가를 막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걸 허락할 순 없었다. 날 내려다보는 김세현의 눈동자를 보니 기분이 묘해졌지만, 그런 기분을 따라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충동적인 선택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여러 차례 겪은 바였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막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갤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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