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25. 생각지도 못한
“이제 정리도 끝났으니 얼른 들어가요. 영화도 보고 수다도 떨다 자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
내 간질거림이 김세현에까지 전달되진 않았는지 그가 대문을 잠그고 돌아와서는 현관을 가리킨다. 나는 말없이 고갤 끄덕이고는 김세현보다 먼저 걸음을 뗐다.
“형, 뭐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아무거나 다 잘 봐요.”
“그럼 우리 로맨스라든가 멜로라든가 찐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볼까요?”
진한 사랑도 아니고 저리 강조해 말하니 괜히 의식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갤 끄덕이려는데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살색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멈춰선 채 답했다.
“그건 좀.”
“아깐 다 잘 본다면서요!”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발끈하며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슬리퍼를 벗는 데 집중하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좀 안 끌리네요.”
“뭐가 끌리는데요?”
“으음….”
여기서 제대로 답을 해야 살색의 향연과 맞닥뜨리는 일이 없을 터였다. 혼자 봐도 민망한데, 김세현이랑 같이 본다면 정말 얼굴을 들지 못할 거다. 이런저런 장르들을 떠올리다가 순간 떠오른 장르를 곧바로 입에 담았다.
“액션이요.”
그래, 액션 영화라면 순간 떠오른 그런 장면은 다루지 않을 거다. 그간 보았던 영화마다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또 휘몰아치는 전개만 있었으니까.
“좋아요. 그럼 그걸로 봐요.”
“…….”
계속해서 자기가 보자고 한 장르의 영화를 보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김세현은 생각했던 것보다 산뜻하게 내 뜻을 따랐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간 김세현이 이렇게까지 쉽게 답할 때면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아니지, 대답하는 것보단 저리 웃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고 해야 할 듯싶었다.
평소보다 배 이상 활짝 웃는 김세현의 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며 거실에 핀 자리로 돌아가 앉자 김세현이 바로 곁에 와 앉는다. 리모컨을 들고는 콧노래까지 부르는데, 역시 긴장을 늦추면 안 되겠다.
혹시나 액션 영화를 보겠다고 하며 은근슬쩍 로맨스 영화를 틀면 어쩌나 계속해서 경계하는데, 의외로 김세현은 정말 액션 장르에서 영화를 골랐다. 그것도 제법 관심이 가는 영화를 말이다.
“이거 어때요?”
“좋아요.”
헌터가 던전을 클리어하다가 기연을 만나 한층 더 등급이 높아진다니.
그러고 보면 던전에서 가끔가다 아이템이 나오곤 하니 어쩌면 그걸 모티브로 삼아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템 같은 건가 보네요.”
“그쵸? 저도 막 그 생각했거든요.”
김세현은 워낙 실력이 월등한지라 가볍게 생각하고 말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응하자 김세현의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형도요? 나랑 생각이 통했나 보네.”
“그러게요.”
“하늘 형은 던전에 들어가 본 적 있어요?”
“아뇨.”
서울시에 생성되는 던전 수를 생각해보면 한 번쯤은 던전 안에 들어가 봄 직했지만,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던전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있을 뻔했던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과거 김세현이 이 구역에 생성되었던 던전을 단숨에 없앴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말없이 김세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김세현이 거길 지나가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았을 거다. 주변에 서로를 걱정해 주는 이웃도 없었을 테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팀원들도 만나지 못했겠지.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김세현과 가까워질 수 있는 매개체도 없었을 터.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너무 빤히 김세현을 봤는지 김세현이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봤어요.”
“…뭐. 형이니까 봐준다. 내 얼굴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거 형도 잘 알죠?”
봐준다며 뒷말을 덧붙이는 것이 김세현답다. 웃으며 끄덕이자 김세현이 다시금 내게 물어왔다.
“던전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거라서요.”
대개 던전은 피해야 하기에 김세현의 질문은 특이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할까 하는데 생각해 보니 이제 곧 볼 영화가 던전과 관련이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위험하지 않은 던전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긴 하죠.”
던전도 보면 위험한 몬스터가 가득한 곳이 있는 반면에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는 던전이 아주 드물게 생성된다고 본 것 같다. 공무원 시험을 치를 때 얼핏 지문으로 본 듯한데, 깊게 생각하며 챙겨 보지 않은 터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곰곰이 던전과 관련된 기억을 되짚어보는데, 때마침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세현에게 물어보았다.
“세현 씨, 나중에 몬스터 공부하는 거 도와주실 수 있어요?”
지문과 영상을 보며 조금씩 습득해나가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몬스터를 접하는 이에게 설명을 듣는다면 보다 빨리 머리에 욱여 담을 수 있을 듯했다.
“나야 좋죠. 갑자기 공부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연락해요. 바로 올 테니까.”
“하하, 그래요.”
“말 나온 김에 하늘 형 나랑 같이 던전 좀 다녀야겠는데요? 내가 같이 가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요.”
김세현도 동행한다면 안전할 게 분명했다. 내가 바로 알았다고 답하자 그의 안색이 환해졌다.
“형이랑 가서 이런저런 것들 보여 주고 싶네요. 형도 알겠지만 무자비한 몬스터만 생성되는 던전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런 곳이 날이 갈수록 드물게 생성되는 터라 희귀해지긴 했지만 한 번쯤은 견학 겸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물론, 다른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도 가보고요.”
“네. 꼭 같이 가요.”
“좋아요.”
한 번 더 내게 확인받은 김세현이 웃으며 이부자리에 눕는다. 덩달아 자리에 누울까 하다가 영화를 보기엔 너무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불을 끄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김세현이 어서 누우라며 옆자리를 팡팡 쳤다.
“그렇게 앉아서 보지 말고 누워서 봐요.”
“앉아서 좀 보다가 누울까 하고요.”
사실, 김세현이 바로 옆에 누워 있는데 얼씨구나 좋다고 바로 눕는 게 좀 민망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조금만 있다가 슬쩍 눕자고 다짐하는데 김세현의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누워서 보면 집중도 잘 되고 좋은데.”
내가 얼른 누웠으면 하는지 조금 전보다 세게 이부자리를 두드린다. 나는 고민하다가 못이기는 척 옆자리에 누웠다.
“누우니까 편하죠?”
“네.”
“형 온종일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긴장 풀고 영화 봐요. 누워서 보면 몸의 피로도 제법 가실 테고, 나랑 같이 도란도란 대화 나누기도 좋고. 일석이조잖아요.”
…그런 이유로 어서 누우라고 한 거였구나.
불은 껐지만 TV가 켜져 있던 지라 내 몸을 훑는 김세현의 눈동자에 걱정이 어린 모습이 잘 보였다. 나는 좀 더 편하게 자세를 취하곤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팀원들도 날 생각해 주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김세현이 날 생각해 준다는 사실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기뻤다.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멍하니 날 바라보자 얼른 TV를 가리켰다.
“얼른 영화 틀어요. 세현 씨 말처럼 영화 보고 또 이야기도 나누고 해야죠.”
“알았어요.”
영화를 켜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그렇게 날 바라보던 김세현이 느리게 답했다. 내게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는 시선이 무척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금 김세현과 시선을 주고받다 보면 조금 전 현관 쪽에서 있었던 것처럼 잔뜩 설레고 또 긴장되는 그런 상황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슬쩍 시선을 피해 TV 쪽으로 몸을 틀자 등 뒤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문제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되는 걸 보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됨 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형.”
“…네, 세현 씨.”
김세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니 이보다 어색할 수가 없다. 묘하게 촉촉한 목소리가 귓가를 뒤덮는 느낌에 반 박자 늦게 답하자 김세현이 움직이는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집중하는데 이번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형, 내가 팔베개해 줄까요?”
갑자기 팔베개를 해 주겠다니. 그것도 무척이나 은근한 말투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저런 말을 하니 무척 긴장된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베개 이미 베고 있는데요.”
오늘따라 김세현이 사람을 놀라게 할 말을 너무 많이 쏟아 내는 게 아닐까 싶어질 지경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답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김세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냥 영화 봐요.”
계속해서 우기면 어쩌나 했는데 김세현은 담백하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물론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의식되는 게 맞았다.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고. 하지만 이제 막 영화가 시작한 상황에 계속해서 김세현을 의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온 신경을 등 뒤의 김세현이 아닌, TV로 향하게 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영화 초반이 지나 초중반으로 진행될 즈음이었다. 흥미롭게 흘러가는 스토리에 흠뻑 빠져 있는데, 난데없이 영화 분위기가 야릇해지더니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데,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잠시 잊고 있었다. 김세현이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단 걸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을 피해보려 멜로나 로맨스 장르를 피했건만,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이보다 더 긴장될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숨조차 죽인 채 등 뒤의 김세현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