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26)화 (226/246)

223화

25. 생각지도 못한

한숨을 뱉고 또 뱉으며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애썼지만, 그 노력은 썩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도움이 되었다면 지금쯤 얼굴에 쏠린 열기가 사라졌겠지.

슬슬 김세현이 욕실에서 나올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는 꼴을 보니 이보다 부끄러울 수가 없다.

“바보 같네.”

혼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매번 이렇게 티가 나는 것도 참 용하다. 사실, 용하다기보다는 미련한 것 같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평소엔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젠 정말 표정 관리하는 방법을 따로 연습하기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혹시 몰랐다.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언젠간 툭하면 붉어지는 얼굴도 컨트롤이 가능할지도.

그러다 보면 김세현에게 쉽게 감정을 들킬 일도 없을 테고 다른 이들 앞에서도 쉽게 속내를 들키지 않을 터였다.

“후우.”

생각을 정리하니 정말 표정 관리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 봐야겠다.

그래, 연하늘. 생각만 하지 말고 열심히 한 번 해보자.

거울 속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반복해 다짐하던 중이었다. 나는 순간 욕실 쪽에서 나던 물소리가 뚝 끊긴 것을 인지했다.

“…….”

평소라면 물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관심을 주진 않았을 거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나 혼자 사는 집인데, 물소리가 날 일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평소엔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물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기석이 녀석이 오면 자주 사용하는 욕실이건만, 단지 사용하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줄이야.

물소리를 즉각 감지해 내는 것도 그렇고, 마음을 다스려 보고자 했던 생각이 물소리처럼 끊긴 것도 웃겼다.

“진정하자, 연하늘.”

이제 곧 김세현이 욕실에서 나올 거라 여기니 입이 바싹 마른다. 연신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독이는데, 소파 쪽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김세현이 벗어 둔 윗옷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현 씨, 전화 왔어요.”

기석이 녀석의 전화였다면 바로 옷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거다. 하지만 김세현의 옷에 손을 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노크하며 말을 건네 봤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현 씨?”

물소리가 났다면 목소리가 묻혔나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물론, 물소리가 난다고 해도 S급 헌터인 김세현이 내 목소릴 듣지 못하진 않았을 터였다.

나는 한 번 더 노크하며 그를 불렀다.

“세…!”

“네, 형.”

깜짝이야.

노크하던 와중에 문이 벌컥 열릴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씽긋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김세현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이내 다른 게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

이미 김세현이 샤워를 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세현의 머리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걸 보니 이제야 확 실감이 난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한 번 더 들려온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왔어요.”

“…이 시간에요?”

전화가 왔단 말에 김세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밖의 것을 치우기 위해 사람들이 오기로 했단 걸 상기함과 동시에 김세현도 같은 걸 떠올린 듯 곧바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물건들 치울 사람들이 오기로 했는데, 씻는다고 깜박했네요. 나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그래요.”

김세현이 전화를 받는 동안 거실 정리를 마저 하고 이부자리부터 깔아야겠다. 소파로 가 앉은 그를 뒤로한 채 이전에도 그랬듯이 소파 테이블을 한쪽으로 옮기고는 방으로 가 이부자리를 꺼내왔다. 바닥에 까는데 김세현이 현관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 나 잠깐 바깥 좀 보고 올게요.”

바깥을 보고 오는 건 좋았지만, 지금 꼴로 밖으로 나가면 분명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것이었다. 기석이 녀석의 옷보다 큰옷을 준비하긴 했지만, 김세현에겐 그것조차 작았다. 다리 길이에 맞지 않는 짧은 바짓단, 그리고 딱 달라붙은 상의와 바지를 입은 채 나간다면 S급 헌터의 체면이 말이 아닐 터.

나는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세현 씨!”

“네?”

어느 새 현관에 도착한 김세현이 신을 신다 말고 날 바라본다. 나는 다급히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형?”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듯 김세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 따라올 것처럼 상체를 숙인다. 하지만 김세현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만히 날 바라볼 뿐인 이에 입은 옷을 가리켰다.

“지금 옷차림으로 나가면 세현 씨한테 안 좋을 거 같아서요.”

“괜찮아요. 옷이야 그저 몸을 보온하려고 입는 건데요.”

보온하기 위한 옷이라니. 헌터다운 답변이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신경 쓰이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혹여 김세현이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조급해진다. 이번엔 팔이 아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옷 갈아입고 나가요.”

“…갈아입고 나가요? 방금 씻고 나온 건데?”

“네.”

김세현이 입고 왔던 옷이라면 그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 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고갤 끄덕이는 모습에 드디어 뜻이 전달된 걸까, 날 빤히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 형이 그렇다면야 갈아입어야죠.”

“고마워요.”

이 선택이 얼마나 반갑고 또 고마운지 김세현은 모를 거다. 함께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긴 뒤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별안간 김세현이 내 앞에서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졌다.

“…….”

여기서 옷을 갈아입는 게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김세현은 별개의 문제였다. 티를 벗는 행동에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뒤돌아섰지만, 돌아서기 전에 이미 볼 건 다 본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옷 소리는 무척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

조금 전에는 물소리가 자극적이더니, 이번에는 옷 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예민하게 다가올 줄이야.

이 순간 다른 이가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에 하나 속내를 타인이 알아차린다면 너무 의식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을 테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세현의 몸을 본 직후 급격하게 변한 신체 반응 또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으면 했다.

“…….”

김세현을 의식한 순간 온몸이 심장이 되어 버리기라도 했는지 쿵쿵거리는 것이 발바닥과 손바닥, 그리고 눈꺼풀에서까지 느껴진다. 먹먹해진 귀도 그렇고, 자꾸만 시야가 좁아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반복하는 것도 어이가 없을 만큼 확연하게 다가왔다.

등 뒤의 상황에 집중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렸했음에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계속해서 집중되는 상황이 너무도 부담스럽다. 사실, 부담스럽다는 말은 핑계였고 부끄럽단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으읏.”

만에 하나 내가 김세현의 입장이었다면 거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상황이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김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훌렁훌렁 옷을 벗고 있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성향의 차이일 수도 있었지만, 나 혼자 너무 설레고 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자 기분이 좀 이상했다.

…설마하니 나 혼자만 김세현을 의식하고 있던 걸까?

“하늘 형, 다 갈아입었어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보다 더 의기소침해질 수가 없다. 절로 축 처지는 어깨를 느끼는데, 때마침 김세현이 날 부른다. 여기서 감정이 흐트러진다면 백이면 백 김세현이 눈치챌 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답하며 뒤돌아섰다.

“네, 세현….”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좀 찝찝해서요. 대충 걸치기만 했는데, 이 정도로도 충분하죠?”

“…….”

이 정도로 충분하냐니.

순간 눈에 들어온 식스팩과 더불어 다부지게 짜인 근육이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단추라곤 전혀 끼지 않은, 말 그대로 옷을 걸치기만 한 상황을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차림새에 입만 벙긋거리는데,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김세현이 웃으며 다시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음?”

갈아입기 전에는 누가 봐도 김세현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뜻으로 위험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눈이 빼앗길 만큼 훤칠한 외모도 외모인 데다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속살을 내보이며 나간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김세현에게 시선을 빼앗길 게 분명했다.

…어쩌면 저런 김세현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음흉한 생각을 하는 이도 생길지 모를 일이다. 내 부름에 멈춰 선 김세현 앞에 선 채 잔뜩 긴장한 채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형?”

“그래도, 옷은….”

옷은 잘 여미고 나가라고 말하며 와이셔츠 단추로 손을 뻗는데, 하필 그 순간 김세현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복근 선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던 물방울이 계속해서 낙하한다. 깊게 파인 근육 라인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방울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김세현의 몸을 집요하게 훑던 물방울은 바지 허리춤에 닿자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함께 물방울에 혼이 빼앗긴 듯했던 내 정신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게, 물을 잘 안 닦고 나오셨나 봐요. 그리고…. 아, 머리! 머리도 잘 닦아야죠.”

조금 전 상황과 더불어 김세현이 씻고 나왔다는 걸 한 번 더 상기하며 생각나는 것마다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던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바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욱.”

“…….”

“형이 그렇게 빤히 보니까 좀, 부끄럽네요.”

부, 끄러워?

생각지도 못한 김세현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뜨거운 바람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차마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굳어 있을 때였다. 김세현이 한 번 더 후욱, 더운 숨을 뱉었다.

“형이 닦아 주면 더 좋을 거 같은데….”

내가, 뭘 닦아?

이어진 말도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었지만, 점차 커지는 김세현의 푸른 눈동자 역시 내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한 상황이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 오는 김세현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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