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25. 생각지도 못한
엘리베이터 때완 달리 밖으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부팀장의 차 앞이다. 언제나처럼 조수석 쪽에 가서 기다리는데 차키 버튼을 눌러 문을 연 부팀장이 내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세현 씨.”
“뭔데.”
“이 차 타고 갈 겁니까?”
“당연한 거 아냐?”
“아….”
그저 김세현도 함께 집에 간다는 것까지만 생각했을 뿐이지,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같이 이동할 거라면 미리 부팀장의 허락을 구했어야 했기에 이제 와 부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는 나완 다르게 너무도 당당하게 답한 김세현을 흘겨보는데, 부팀장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며시 부팀장을 보니 그는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한 부팀장을 마주하자 이보다 민망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계속 멋쩍어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김세현도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해도 되냐고 물으려는데, 나보다 먼저 부팀장이 김세현에게 말을 던졌다.
“김세현 씨는 뒷좌석에 타도록 해요. 하늘 씨는 조수석에 타서 갈 거니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김세현도 함께 이동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역시 부팀장이 날 신경써준 거라는 생각에 곧바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팀장님,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며 이상한 짓을 하게 놔둘 바에야 차로 함께 이동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아 선택한 것일 뿐이니까요.”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당황할까 봐 김세현을 차에 태우는 것임이 분명했다. 부팀장과 마주보며 웃을 때였다. 난데없이 김세현이 딴지를 걸었다.
“하늘 형은 나랑 같이 뒷좌석에 탈 건데?”
내겐 물어보지도 않고 뒷좌석에 탈 거라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꺼낸 말을 정정해 주려는데, 나보다 부팀장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런 거라면 혼자 뛰어오시든가.”
“…혀엉.”
단호하기 짝이 없는 부팀장의 말에 김세현이 멈칫하다가 이내 날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왔지만, 그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슬쩍 김세현의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세현 씨는 뒤에 타세요. 저는 조수석에 탈게요.”
“들었으면 타도록 해요. 타기 싫으면 아까도 말했듯이 알아서 뛰어오든가.”
혹여 김세현이 한 번 더 말을 바꾸진 않을까 싶었는지 부팀장이 단호한 어조로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에 김세현을 보자 말없이 날 보던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조수석 좀 앞으로 당길게요.”
워낙 다리가 길어 그런지 몰라도 김세현은 뒷좌석에 제대로 앉기는 힘들어 보였다. 부팀장에게 양해를 구해 내가 앉을 공간을 제외하고 최대한 의자를 당기자 옆으로 앉았던 김세현이 조금은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만 어린 표정과는 달리 군소리 없이 말을 따르는 모습을 보니 이 이상 트러블을 만들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곁에 서서 김세현을 보던 부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잘 수납이 된 듯하니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네!”
수납이라는 표현이 사람에게 어울리나 싶지만, 김세현을 보니 어째서 그렇게 표현했는지 조금은 알 듯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세현이 저리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 담은 채 불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나는 비죽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곤 부팀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형, 집에 가서 밥부터 먹을까요?”
“짐부터 치우십시오.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될 테니까.”
“우선 짐부터 치우기 전에 음식부터 주문해요. 아니지, 가는 길에 주문해 두면 도착할 즈음 음식들 오겠다!”
매번 겪는 엇나가는 대화였지만, 꾸준히 다른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것도 참 용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선 짐부터 치워요.”
“그러니까 지금 바로 주문해요. 가자마자 바로 정리될 테니까요.”
“…….”
가자마자 바로 정리가 될 거라니. 그 많은 짐들을 봐 놓곤 너무도 쉽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설령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어떻게 치울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도통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얼른 부팀장의 부름에 답했다.
“네, 부팀장님.”
“음식을 주문할 거라면 내 것도 같이 주문해 주십시오.”
김세현의 말을 듣고 다른 지적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부팀장의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는 멈칫하다가 바로 고갤 주억였다.
“…네!”
“형! 나랑만 먹을 거 아니었어요?”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조수석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리더니 거리를 좁혀왔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 때문일까,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무척 습하다. 귓가에 닿은 바람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데 한몫했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순간 벌어진 상황 탓인지 입만 벙긋거릴 뿐이지 좀처럼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때 답하지 않는다면 분명 제 뜻대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기에 뭐라도 말을 하려는데, 때마침 구원투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머물렀다 돌아갈 예정이라 같이 먹을 생각입니다만.”
“…….”
지금쯤이라면 자기랑만 먹는 게 아니냐고, 어째서 다른 사람이 집에 오는 거냐는 등의 말이 이어질 텐데, 너무 조용하다. 그 고요함이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여 슬쩍 몸을 틀어 뒤를 살펴보았다.
“…….”
분명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을 줄 알았건만, 김세현은 예상과는 달리 약간의 불만 어린 티만 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행동에 당황하는데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세현이 자기 머리를 쓱 쓸어넘겼다.
“하, 어쩔 수 없지. 항상 형 출퇴근길을 함께 해 주는데, 그쪽 저녁은 내가 사지.”
“듣던 중 고마운 소리군요. 비싼 걸로 먹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는 김세현이나, 그걸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부팀장이나. 두 사람 다 예상을 벗어난 말을 꺼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중간에 껴서 당황하는데 김세현이 날 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화낼까 봐 걱정했어요?”
“…조금요.”
사실은 조금이 아니라 더 걱정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팀장의 차에서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한다면 사무실에서보다 훨씬 더 곤란해졌을 테니까.
“형 집에 놀러 가는 날인데, 가기도 전부터 화를 낼 순 없죠.”
“저도 하늘 씨 집에 가서 볼 게 있기에 적당선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요.”
“하, 하…. 다행이네요.”
김세현 혼자만이 아니라 부팀장까지 저리 말해 주니 이보다 더 다행일 수가 없다. 안도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 하자마자 김세현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형, 여기서 뭐 먹을까요?”
“하늘 씨, 저는 소화 잘 되는 음식이면 괜찮으니 아무거나 비싼 걸로 주문하세요.”
“소화 잘되는 음식이야 당연히 죽이지. 형, 죽집 죽은 내가 잘 아는 곳 있으니까 형 먹을 음식 골라요. 그럼 나 먹을 음식이랑 죽집 해서 연락해서 가지고 오라고 할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말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젠 죽이 참 잘 맞는다. 순간 김세현에게 비싼 걸 얻어먹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아주 잠시 머릿속에 머무르다 사라졌다. 하긴, 돌이켜보면 그간 김세현이 사 온 음식을 얻어먹은 게 여러 차례인데 이제 와 무슨 무슨 법을 걱정하는 것도 웃겼다. 게다가 부팀장도 얻어먹겠다고 말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 주문할 거 고를게요.”
“거기 있는 거 다 맛보고 싶으면 다 골라도 돼요.”
“그렇게까진 못 먹고요.”
김세현이 있으니 음식을 많이 주문한다고 해도 전부 맛볼 순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김세현이 지출할 금액이 너무 커졌다. 내일 영화를 볼 티켓과 음료, 그리고 팝콘은 내가 살 생각이었지만, 그 전날 많이 얻어먹게 된다면 마음이 쓰일 게 분명했다. 나는 적정선을 지키자 다짐하며 핸드폰 화면에 뜬 음식점들을 둘러보았다.
“…어?”
핸드폰 화면을 보니 이런저런 음식점과 더불어 그 옆에 음식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앱처럼 나열된 것들을 둘러보는데, 뭔가 앱이라기보다는 리스트를 정리해 둔 것처럼 보였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화면에 당황하는데 김세현이 바로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거 앱 아니고 내 맛집 리스트예요. 문서 파일이니까 그냥 거기서 고르면 돼요.”
“그럴게요.”
어쩐지 앱치고 너무 조악하다고 했다. 이리저리 파일을 살펴 음식을 골라 김세현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말하자 김세현이 바로 고갤 끄덕였다.
“그럼 갈비랑 냉면 주문할게요. 나도 형이랑 같은 거 먹어야지.”
“제가 먹을 죽도 챙기도록 해요.”
“잊지 않을 테니까 그만 주입하지?”
“주문한 거 확인하면 더는 주입하지 않도록 하죠.”
“…….”
사무실에선 김세현과 티키타카 하던 사람이 주로 팀장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부팀장과 김세현이 이러는 모습을 보니 적응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평소 말을 아끼는 부팀장이 이렇게 김세현과 말을 주고받는다는 건 그만큼 김세현을 가깝게 여기고 있단 말과도 같았다.
“오늘은 하늘 씨 집에 이상한 거 설치하거나 하진 않을지 감시할 겁니다.”
“이젠 안 그러거든? 형이 싫어하는 거 뻔히 봤는데, 내가 왜 눈 밖에 날 짓을 해!”
“그런 말을 한다고 하여 사라진 믿음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진 않죠.”
“당연한 거 아냐? 그러니 열심히 노력 중이라고!”
“하늘 씨가 마음이 약하니 저도 함께 지켜보도록 하죠. 과연 그 말을 잘 지키는지 말입니다.”
“보려면 보든가!”
…물론, 그게 썩 좋은 방향만은 아닌 모양이긴 했다.
하지만 저 둘의 티키타카를 계속해서 듣자니 괜히 웃음이 난다. 항상 팀장이 버럭 화를 내고, 또 김세현이 자기 할 말을 하기 바빴던 것관 정반대로 부팀장이 할 말을 하고, 김세현이 버럭하는 조합은 제법 신선했다. 재미있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는 척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계속해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