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25. 생각지도 못한
주말을 하루 앞둔 날이었지만, 오늘은 처리할 일들이 무척 많았다. 아침부터 쉼 없이 작업을 이어 가던 중 오후 내내 날 붙잡고 놓지 않았던 작업을 겨우 마치곤 잠시 숨을 골랐다.
“후우.”
주말에 출근하지 않을 예정인지라 무조건 오늘 안에 이 일들을 처리하고 퇴근해야만 했다. 아침부터 내리 달린 덕분에 제법 많은 양을 처리하긴 했지만, 아직도 일이 많았다. 얼마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니 노력한 보람이 있긴 했는지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고지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집중해 일을 시작하려는데, 돌연 옆에서 김세현이 말을 걸었다.
“형, 한 잔 더 부탁해요. 두 잔이면 더 좋고요.”
“좋아요.”
일을 바로 시작하는 것도 좋았지만, 잠시 커피를 마시며 리프레시를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조금 전까지 서류 작성과 더불어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인지 몸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굳은 근육을 풀자 뚜둑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배 이상은 나는 기분이다. 소리 덕분인지, 아니라면 뒤늦게 근육을 풀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기지개를 켜니 이보다 상쾌할 수가 없다. 나는 정수기로 향하며 팀원들에게 물어보았다.
“커피 드실 분?”
“나도.”
“나도 한 잔 부탁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피를 부탁하는 팀원들이다. 서강민과 강승빈 역시 커피를 부탁한다고 말하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직 답을 하지 않은 새 팀원들 쪽을 향했다.
“그, 저도 부탁합니다.”
“저도요.”
눈이 마주친 팀원들이 머뭇대더니 이내 커피를 부탁한다고 말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응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던 이들이 피하지 않고 답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제야 다시 내게 마음을 열어주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이 술렁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고갤 끄덕였다.
“네. 그럼 한 잔씩 준비할게요.”
이런 날이 계속된다면야 한 잔이 아닌 두세 잔도 타다 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하는 데 집중한 터라 좀 피곤했는데, 새 팀원들까지 다시 나와 대화를 나누려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니 피곤함이 절로 가시는 것만 같다. 절로 나오려는 콧노래를 참으며 커피를 준비하는데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온 느낌에 옆을 돌아보았다.
“…인원이 많으니 돕겠습니다.”
“저야 감사하죠.”
누군가 했는데 새로 온 팀원 중 한 사람이다. 항상 날 피하다가 다시 다가와 말을 건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이렇게 와서 먼저 말을 걸어주는 건 좋은 일이었다. 민망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이렇게 뭔갈 함께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저리 부끄러워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인원은 제법 늘었지만, 새로 온 팀원과 함께 커피를 준비해 돌리니 새 팀원들이 오기 전보다 더 빠르게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커피를 준비한 이와 눈인사를 주고받고는 김세현과 내 몫의 커피를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잘 마실게요.”
“네.”
자기 몫으로 준비한 커피 두 잔을 받은 김세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피 향을 맡더니 마시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몹시도 마음에 든다는 듯한 얼굴로 재차 향을 맡는데, 지켜보자니 커피가 몹시도 당긴다. 나는 김세현을 따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에 집중했기 때문일까, 잠시 찾아온 이 여유가 너무도 좋다. 기분 탓인지 커피도 이전보다 더 맛있기도 했고. 세 번에 나눠 종이컵을 비우고는 다시금 일을 시작하려는데 김세현이 날 불렀다.
“네, 세현 씨.”
혹시 커피가 부족해 부탁하는 거라면 커피를 타다 주는 핑계로 내가 커피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 언제 끝나요?”
아….
당연히 커피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생각해보면 김세현이 저런 질문을 할 만도 했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와서는 여태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나와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주말 전에 처리할 게 제법 되네요. 퇴근 전까지 전부 처리해 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걸 전부 처리하지 않고 퇴근한다면 미련이 남아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할 거다. 그렇다고 일을 전부 처리하겠다고 야근을 하게 된다면 나와 출퇴근을 함께하는 부팀장의 발길까지 붙잡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고로 퇴근 전까지 이 모든 걸 해치워야만 모두가 편할 터였다.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김세현이 먼저 입을 뗐다.
“그럼 계속 일 방해하지 않고 옆에 있을게요.”
혹여 그래도 서운해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김세현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니지, 김세현의 표정을 보아하니 퇴근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듯싶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얼굴 가득 감추려 해도 감추기 힘든 설렘이 가득했으니까.
덩달아 따스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내는데,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덩달아 차오른 수줍음 역시 이보다 더 간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럼 계속 집중해서 일할게요.”
“좋아요. 형 부담스럽지 않게 조용히 있을게요.”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씩 웃는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작게 답한 뒤 이어 처리할 문서 파일을 열었다.
“…….”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창 집중했던 터라 바로 몰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던 듯했다. 잠시 긴장을 풀었다고 바로 이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질 줄이야.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면 그만큼 야근할 확률이 높아졌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만큼 여기서 더 지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고는 일감을 몇 번이고 계속해 읽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얼마 안 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몰입력을 앞세워 한참을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또 처리하며 중간중간 시간을 확인하길 몇 차례, 마지막 파일 정리가 끝나자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혹여 시간이 오버되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잔뜩 긴장했던 몸을 의자에 묻으며 긴장을 풀고 있자니 박 주무관이 말을 걸어왔다.
“설마, 진짜 다했어?”
“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요.”
“…그 많은 걸 다 처리했다고? 주말에 꼭 처리해야 할 일은 나한테 넘기라고 했잖아.”
“박 주무관님도 하실 일 있을 텐데 제 일까지 맡게 되면 일이 많아지잖아요.”
안 그래도 지난주부터 팀원들 모두가 서류 작업에 올인하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협조금과 관련된 사안을 발표했다고는 하나 아직 업무가 산적해 있었으니까. 다들 바쁜데 주말에 쉬러 간다고 다른 이에게 일감을 떠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일이 많아도, 주말엔 시간 널널하거든?”
“그래도요.”
괜찮다고 해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내 대답을 들은 박 주무관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나는 덩달아 웃다가 퇴근 전까지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단 생각에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다.
일을 다 마치긴 했지만, 오늘 작업할 분량을 확실하게 처리한 게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작업 폴더를 열어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을 마친 후 파일을 팀장에게 전송했다.
“팀장님, 오늘 작업분 보냈어요.”
“좋아. 이제 퇴근할 시간이고 하니 주말에 확인하고 수정할 부분 있으면 월요일에 하자고.”
“네.”
저 말을 들으니 이제야 정말 일을 끝마쳤다는 것이 실감난다. 폴더를 닫고 작게 숨을 내뱉으며 몸의 긴장을 푸는 사이 팀장이 손뼉을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 하는 일이 다소 번거롭긴 하지만 나중을 생각해서 힘내자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대비해 놓자!”
“예!”
“퇴근 준비 마치면 다들 퇴근해. 나는 하던 일 마치고 퇴근할 테니까.”
“팀장님, 야근하시려고요?”
나도 그 말이 하고 싶었다. 한 주무관의 말에 끄덕이며 팀장을 바라보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답했다.
“야근까진 아니고. 한두 시간 정도 보다 갈까 해서.”
“그럼 저랑 저녁 먹고 가실래요? 저도 아직 일이 다 안 끝나서요.”
“나야 좋지.”
한 주무관 역시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혹시나 해 팀원들을 살펴보았지만, 이 이상 야근을 할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하늘 씨, 퇴근 준비하죠.”
“네, 부팀장님.”
“형, 얼른 준비해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죠.”
부팀장에 이어 김세현까지 말을 보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오늘 처리한 일들을 확인한 뒤 컴퓨터를 종료했다.
“저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아. 다들 고생했어. 내일 보자고.”
짐을 챙기는데 새로 온 팀원들이 먼저 자리서 일어난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는데 김세현이 한 번 더 보챘다.
“형, 얼른요.”
“알았어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이었지만, 오늘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인 터라 괜히 팀원들의 눈치가 보인다. 나는 짐을 챙기는 척하며 슬쩍 주변을 살폈다.
“…….”
평소 김세현이 말을 꺼낼 때마다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일이 잦았기에 이번에도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관 달리 다들 자기 할 일을 하기 바쁘다. 작게 한숨을 뱉으며 마저 짐을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팀장도 엇비슷하게 정리를 마쳤다.
“팀장님,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가서 푹 쉬어. 이발도 잘하고.”
그래, 이번 주 주말에는 숍 예약도 해 둔 상태니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다. 김세현과 함께 예약을 해 두었다는 걸 상기하곤 팀장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은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곤 부팀장, 그리고 김세현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오니 이제야 일과가 완전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난다. 나는 부팀장에게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부팀장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하늘 씨야말로 오늘 처리한 일이 상당하던데, 고생 많았어요.”
“좀 더 노력하면 더 많은 걸 처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고, 또 손도 느렸지만 하다 보니 점차 일이 익숙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보다 더 노력한다면 팀원들의 일을 좀 더 많이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기왕 하는 거 더 힘내 보자 속으로 다짐하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후우.”
이제 이동하면 곧 집이었다. 김세현과 함께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이보다 설렐 수가 없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1층에 도착하길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엘리베이터 속도가 느린지 모르겠다. 체감 상 한참만에야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