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24. 뜻밖의 상황
어젯밤 생각지도 못한 김세현의 방문 덕택인지 오늘은 눈을 뜬 순간부터 컨디션이 무척 좋았다. 기분 좋게 출근 준비를 마치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
평소 같았다면 밖으로 나가 택배가 온 게 있는지 확인하고 마당으로 짐을 옮긴 뒤 부팀장을 기다렸을 거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 일을 한 번 겪고 나니 혹여 오늘도 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제야 남자가 말한 어르신이 마음이 바뀌었다며 그대로 날 두고 갔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반항도 제대로 못 한 채 그대로 끌려갔을 것이었다. 게다가 또 몰랐다. 오늘도 마음이 바뀌어 날 다시 데리러 왔다는 핑계로 납치하러 왔을지 말이다.
“후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썩 괜찮았는데, 어제 일을 떠올리니 왜 이리 밖으로 나가길 주저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긴장한 채 계속해서 현관에서 서성이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먼저 나가서 부팀장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제처럼 맥없이 차에 태워질 터였다. 볼일이 끝나면 사무실로 데려다주겠다던 말도 오늘까지 유효할지 몰랐고.
곧바로 거실 창으로 이동해 커튼 밖을 확인하니 차라든가 사람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거실 창 쪽에서 서성이며 부팀장이 오길 기다렸다. 곧 익숙한 차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서 내린 익숙한 얼굴에 곧바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나가도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부팀장의 성향상 혹시라도 밤에 택배가 와 있거나 한다면 그걸 챙기려 할 게 분명했다.
빠르게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여니 내 예상대로 부팀장이 대문 앞에 와 있는 물건을 치우려 하고 있었다. 손에 물건을 든 채 허리를 펴는 이를 향해 평소보다 배 이상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아 보이는군요.”
눈이 마주친 부팀장이 날 살피더니 안도한 얼굴로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나는 그를 따라 끄덕였다.
“어제 푹 쉬었더니 몸 상태가 좋아졌어요.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요.”
“다행입니다.”
“그거 주세요. 안에 두고 올게요.”
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재빨리 남은 물건들을 챙기고는 그에게 말하자 부팀장이 고갤 끄덕이며 내가 든 짐 위로 들고 있던 짐을 올려주었다.
“그럼 먼저 타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부팀장이 온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이보다 마음이 진정될 수가 없다. 나는 곧바로 짐을 마당 한쪽에 내려놓곤 부팀장의 차에 탔다.
“아침은 먹었습니까?”
“부팀장님은요?”
“가는 길에 패스트푸드점에 잠시 들를까 합니다.”
우유 한 잔을 마시고 나온 터라 부팀장의 말은 몹시 반가웠다. 나는 배를 만지작거리며 허기진 표정을 지었다.
“저도 같이 주문해야겠네요.”
“예. 그럼 항상 다니던 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행동을 본 부팀장이 픽 웃더니 이윽고 차를 출발시킨다. 벨트를 제대로 착용했는지 확인하곤 그대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오늘 김세현은 어쩌기로 했습니까?”
어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바로 그걸 말할 줄은 몰랐다. 나는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물론, 김세현이 집에서 자기로 한 것만 빼고 말이다.
“…오늘 집에 오기로 했어요. 같이 저 짐들 정리하기로 했고요.”
“하늘 씨 선택이야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세현이 집에 오기로 한 만큼 저 짐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부려 먹도록 해요.”
“네.”
불과 얼마 전에 일이 있었는데, 벌써 김세현을 집으로 초대하는 거냐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부팀장은 무척이나 담백한 어조로 짐을 치우는 데 부려 먹으라고 할 뿐이었다. 슬쩍 그를 살피자 부팀장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뭔가 싶어 계속 바라보자 정면을 주시하던 부팀장이 힐끔 이쪽을 바라보았다.
“김세현으로 인해 저리 물건이 쌓였는데, 당연히 김세현이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그럼 저도 퇴근하면 하늘 씨 집에 잠시 머무르는 걸로 하죠. 김세현이 부려지는 장면을 구경하다 가야겠습니다.”
“어….”
부팀장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김세현이라면 아마 하루 잔답시고 한껏 짐을 챙겨 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김세현이 자고 간다는 것을 부팀장이 알게 될 테고, 상황이 묘해질 수도 있었다.
“막냇동생처럼 생각하긴 하지만, 사적인 영역까지 많이 참견하진 않을 겁니다. 김세현이 하늘 씨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마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그 부분을 콕 짚어 부연 설명을 한다. 속내를 완전히 들킨 기분이라 민망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뭐가 되었건 간에 열심히 한 번 부려 먹도록 해요. 김세현이라면 하늘 씨가 뭘 시키더라도 좋다고 할 거 같으니까.”
“하하, 노력해 볼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 이제 슬슬 라디오 들읍시다. 어제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죠.”
“네!”
부팀장의 말에 곧바로 라디오를 켜니 항상 듣던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평소처럼 던전과 관련된 뉴스와 더불어 정치와 경제와 관련된 뉴스를 듣다 보니 이내 패스트푸드점이 목전에 보였다. 주문할 메뉴를 미리 정하고 드라이브 스루로 주문하고 잠시 뒤, 주문한 음식을 수령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햄버거와 감자튀김 냄새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연신 킁킁거리는데 부팀장이 반가운 말을 꺼냈다.
“한쪽에 주차해서 먹고 가죠.”
“네!”
냄새를 맡는 순간 허기가 느껴진 터라 나야 좋았다. 주문받은 음식을 챙겨 패스트푸드점의 주차장 한쪽에 차를 주차한 부팀장이 손을 내민다. 나는 곧바로 그가 먹을 햄버거와 음료를 건넸다. 그가 이내 식사를 시작하자 나 역시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허기를 느낀 직후 먹어서일까, 이보다 햄버거가 맛이 좋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햄버거 하나를 클리어하고 두 번째 햄버거를 먹으며 야무지게 감자튀김까지 챙겨 먹으니 슬슬 배가 차는 게 느껴졌다.
두 번째 버거까지 단숨에 마무리하고 나니 아직도 식사 중인 부팀장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혹여 나 혼자 먼저 다 먹고 기다리면 부팀장이 민망할 수도 있었다. 혹여 그가 눈치채진 않을까 조심하며 남은 감자튀김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부팀장 쪽에서 포장지를 구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식사를 마친 듯 그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은 감자튀김을 한 입에 털어놓고는 함께 주변을 정리한 뒤 쓰레기까지 버리고 다시 차에 올라 다시금 출발한 차에 몸을 푹 기대었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더 좋네요.”
“아침을 든든히 먹으면 기분이 좋죠.”
“네.”
아침부터 버거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같이 식사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나는 계속해서 두런두런 부팀장과 대화를 나눴다.
“그건 그렇고 요즘 새로 온 팀원들이 다시 하늘 씨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군요.”
“네. 이젠 외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양이에요.”
부팀장이 이리 거론하는 걸 보니 아마 사무실 사람들 모두가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듯했다. 처음엔 좀 가까워지나 싶다가 멀어졌고, 다시 또 거리를 좁혀간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으나 같은 팀인 만큼 가까워질 필욘 있었다.
특히 팀원들은 현장에 나가는 이들이었다. 목숨과도 직결되는 일이 많기에 그런 상황에서 개인감정이라도 조금 섞이게 된다면 일이 커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하늘 씨의 배짱을 높이 산 모양입니다. 솔직히 팀장님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쉬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팀장님이었다면 더 세게 말씀하셨을 거 같아요.”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이라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말은 나처럼 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만 김세현과 매번 티키타카 하며 다투고, 또 시청에 배 째란 식으로 대응하는 걸 보면 내가 부른 세계헌터협회장보다 더 큰 걸 부르고도 남을 듯했다.
“하하. 한 번 팀장님께 물어나 볼까요?”
팀장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말하다 보니 나도 궁금해졌다. 웃으며 묻는 부팀장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오늘 상황을 보며 팀장님께 한 번 물어보기로 하죠.”
“네.”
팀장의 반응부터 시작해 팀원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사무실이 목전이었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차에 작게 심호흡한 뒤 차 시동이 꺼지자 바로 벨트를 풀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부팀장님.”
“아닙니다. 저 역시 하늘 씨 덕분에 즐겁게 출퇴근하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지만요.”
“어서 갑시다.”
차 문을 잠근 부팀장이 고갯짓한다. 나는 그의 곁으로 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