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24. 뜻밖의 상황
“세계헌터협회 놈들 간다면서 이런저런 행사를 하더라고요. 얼굴 좀 비추다가 틈 보이길래 바로 형 보러 갔죠.”
“…….”
“사실 얼굴 비출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 날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몇 생겼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서열 정리하고 왔죠. 앞으로 허튼 생각을 한다거나 날 만만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김세현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 남자 말고도 또 있다니.
아침에 봤던 남자의 뻔뻔하기 짝이 없던 모습을 떠올리는데 김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 형은 인상 쓰는 것도 귀엽더라.”
“…얼른 준비해서 가져다줄게요.”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세현밖에 없을 거다. 삽시간에 홧홧해진 얼굴을 감추려 급히 뒤돌아선 뒤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넣고는 컵라면 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형, 나도 거기 가서 봐도 돼요?”
“안 돼요.”
“그럼 그냥 여기서 봐야지.”
“…….”
멋대로 할 거면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날 놀리려 한 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지만, 반격할 마음은 없었다. 고갤 돌리면 빨개진 얼굴을 들킬 테고, 김세현은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장난을 칠 게 뻔했으니까.
컵라면과 즉석밥 준비가 끝나자 컵라면 위로 즉석밥을 올려 한 번에 가지고 가자 김세현의 시선이 음식을 쫓는다. 군침을 삼키는 김세현의 모습에 컵라면과 즉석밥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김치를 꺼내어 덜고는 앞에 두자 김세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 먹을게요.”
“네.”
김세현이 먹는 동안 용기들을 치울까 싶어 하나둘 챙기는데 그가 컵라면 뚜껑 위로 젓가락을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용기로 손을 뻗는다. 나는 급히 그를 제지했다.
“먹고 있어요. 이건 제가 치울게요.”
“라면 익으려면 시간 좀 남아요.”
“그래도 그냥 있어요. 밥도 얻어먹었는데 일 시키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그래요.”
“그럼…. 앉아서 형 치우는 거 구경하다가 밥 먹을게요.”
“좋아요.”
혹여 같이 치우겠다며 계속 움직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며 계속해서 용기들을 치우는데 노골적으로 날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
너무 저리 봐도 민망했지만, 이제 와 그만 보라고 한다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치우겠다고 할 게 뻔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며 계속해서 용기들을 치웠다.
차차차차차찰칵!
“…사진 찍으라곤 안 했잖아요.”
“저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라면 익으려면 시간 좀 더 있어야 하는데, 할 일도 없고 하니 그 사이에 형 보면서 사진이나 실컷 찍어 두려고요.”
차차차차찰칵!
사진을 찍겠다고 말한 김세현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다. 핸드폰 용량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쏟아지는 연사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간만이다. 계속되는 셔터음을 들으며 어느 정도 용기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김세현이 젓가락을 들었다.
“형이 챙겨 줘서인지 더 맛있는 거 같네요.”
“하하.”
입에 발린 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면서도 쉴 새 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다시 식사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는 김세현을 바라보는데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현 씨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나요?”
“의외로 있죠. 이전에 통화할 때 들었던 목소리 있죠? 그놈이 유독 그런 편이고요. 고양이가 호랑이를 따라 한다고 해서 호랑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
나 역시 그 사람을 떠올리며 물은 것이긴 했지만, 김세현이 바로 그 남자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당황해 작게 소릴 뱉자 김세현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야 뭣 모르고 그놈이 말하는 대로 움직인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으니 그렇게 걱정하거나 놀라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다른 사람들 말은 안 듣고 형 말만 들으니까.”
“…….”
여기서 갑자기 내 말만 듣는다고 할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그야말로 엄청난 말에 놀라 그를 보자 김세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면발을 집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형한테 관심 보이는 걸 거예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형 아니면 안 된다는데.”
“…….”
낯부끄러운 말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거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 질주하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데, 김세현이 날 보더니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형 얼굴 진짜 빨간 거 알아요?”
“…민망해서 그래요.”
“민망할 게 뭐 있어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그래도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나도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거다. 그래, 김세현이 저런 말을 했기에 내가 이렇게 심장이 뛰고 열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민망함을 떨쳐내려 노력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형, 잘 먹었어요.”
막 라면과 밥을 먹기 시작한 거 같은데 벌써 다 먹을 줄이야. 그릇을 확인하니 벌써 라면 국물까지 다 마신 상태였다. 덜어 놓았던 김치까지 다 먹은 걸 확인하곤 그에게 물었다.
“먹을 거 더 드릴까요?”
“됐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입가심도 했으니 일어나야죠.”
김세현이 이렇게 바로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놀라 그를 보자 김세현의 얼굴에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커피라도 한 잔 얻어먹으면서 좀 더 있고 싶은데, 형 오늘 푹 쉬어야 하니까요. 그래야 내일 저녁에 쓰레기도 버리고 같이 누워서 수다도 떨고 하죠.”
무슨 일로 일찍 가겠다고 하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내일을 기약하는 말에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따라 끄덕이더니 곧바로 현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형, 그럼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내일은 아침 일찍 사무실에 갈게요. 그때 오늘 못 마신 커피 타 줘요.”
“좋아요.”
그 정도쯤은 지금 당장도 해 줄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끄덕이자 김세현이 웃으며 대문으로 향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 뒤를 따라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나가던 김세현이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하자 고갤 저었다.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그러면 형 안 보이는 곳까진 걸어가야겠네요.”
“아….”
듣고 보니 김세현은 문이 닫히면 바르게 이동하려던 듯했다. 잠시 그가 일반인이 아니란 사실을 망각했단 생각에 앓는 소릴 뱉자 김세현이 재차 웃음을 쏟아 냈다.
“형 먼저 들어가요.”
“그럴게요.”
괜히 나 때문에 늦게 돌아가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대문 밖으로 완전히 나가더니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한다. 대문을 잠그는 거야 집에 들어가서도 할 수 있기에 먼저 들어가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한 번 더 김세현과 인사를 나누곤 집 안으로 들어선 뒤 현관문이 닫히자 들려온 잠금 소리에 곧바로 인터폰으로 바깥을 살폈다.
“갔네.”
내가 들어가면 바로 가겠다고 하더니 말처럼 벌써 김세현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대문까지 잠근 뒤 다시 식탁으로 가 뒷정리를 마치곤 이번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샤워 후 머리까지 말린 뒤 그대로 침대로 몸을 던지자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몸 곳곳에서 비명을 내뱉는데, 오늘 아침 일로 얼마나 몸이 힘들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내 상황이 떠올랐다.
“어?”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퇴근해서까지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지금 상태를 보니 내 기우였던 듯싶었다.
“…….”
몸은 여기저기 쑤셨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워진 것이 아무래도 조금 전 김세현의 방문 덕분인 듯했다. 아니, 듯한 게 아니라 덕분이 맞았다.
매번 이렇게 그에게 도움만 받아서 될는지 모르겠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가 되어서도 항상 김세현에게 도움만 받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잔 설렘이 느껴졌다.
“하아.”
한 번 인지한 설렘은 몸 곳곳으로 번져 갔다. 손가락 끝에서도 느껴지는 듯했고, 몸속 깊은 곳에서도 느껴졌다. 심지어 얼굴 곳곳에서도 느껴졌다. 입술이 묘하게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에 괜스레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자, 연하늘.”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내일 김세현이 집에 오기로 했으니 오늘 열심히 자 둬야 내일 밤에 물건들을 치우고 또 함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설렘을 애써 뒤로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