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18)화 (218/246)

215화

24. 뜻밖의 상황

“나 진짜 지난번처럼 거실에 이불 깔고 가만히 같이 자기만 할게요. 네?”

“…….”

“하, 양보했다! 그러면 형이 있으라고 한 곳에서 안 벗어날게요. 그리고 아무것도 설치하지도 않고 형만 볼게요.”

침묵이 길어지자 조급해진 김세현이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냈다. 내게 잘 보이고 싶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기 뜻을 관철시켜 보고자 노력하는 행동이 참 웃겼다. 그뿐이랴, 꺼내는 말 전부가 주옥같은지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혀엉.”

지금 여기서 거절한다면 분명 김세현은 어째서 안 되냐며 계속 날 붙잡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선택을 유예했다.

“좀 생각해 볼게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김세현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죠? 나중에 다른 말하는 거 아니죠?”

혹여 말을 바꿀까 걱정되었는지 김세현은 곧바로 내게 확인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확인을 바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는 거지 허락한 건 아니에요.”

그래, 허락한 것도 아닌데 벌써 허락한 것처럼 반응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방방 뛸 것처럼 흥분한 김세현을 보며 말을 정정했지만, 그에겐 내 말이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생각하다 보면 나랑 같이 주말 내내 재미있게 시간 보내고 싶다는 결론 내릴 거잖아요.”

“…….”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에 나랑 같이 여기 치우는 게 답이죠. 치운 김에 야식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요.”

마치 내 머릿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 말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은근한 얼굴로 함께 잠을 자자고 말을 하는데, 김세현의 표정 탓인지 분위기가 순간 묘해지는 것만 같다. 그 잠깐 사이에 촉촉해진 눈망울로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도 그렇고. 같이 잠을 자자는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김세현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손만 잡고 잘게요, 네?”

이번엔 손만 잡고 자겠다고 하며 살짝 허리를 굽혀서는 눈높이를 맞춘 김세현이 곱게 눈가를 접는다. 나는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

바로 눈앞에 김세현의 얼굴이 보여서일까, 이보다 더 심장이 뛸 수가 없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볼 때였다. 비닐봉지를 들고 있던 손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겹치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이렇게 잡고만 있을게요.”

“으음.”

갑자기 이렇게 손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혹감과 함께 설렘이 마음 곳곳으로 번지는 걸 느낄 때였다.

꼬르륵-

“…….”

“…….”

말랑말랑해지는 분위기를 깨트린 우렁찬 뱃소리가 순간 마당을 가득 채운다. 내 배에서 난 소리가 아니기에 이 소리의 주인은 김세현일 터였다. 고개를 들어 김세현을 봤다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절로 눈이 커졌다.

배곯는 소리가 날 줄은 김세현조차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던 김세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른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필 이때.”

“풉!”

웃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김세현의 반응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왜 웃어요. …난 수치스러운데.”

“배가 고프면 고픈 거죠. 왜 수치스러워요.”

생각해 보면 김세현과 처음 만났을 때도 저 소리로 말미암아 친해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그때만 해도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듯한데, 갑자기 이러니 웃음이 나는 게 당연했다.

“형한텐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에요.”

“됐어요. 예전에도 배고픈 채 사무실에 왔었잖아요. 그때 볼 거 다 보고 들을 거 다 들었어요.”

“…아직 날 다 보려면 멀었거든요?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 확실하게 보여줄까요?”

굳이 저리 지적하지 않아도 김세현의 새로운 모습은 매 순간 보고 또 느끼고 있었다. 민망함이 제법 가신 얼굴을 보는데, 여전히 웃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

“혀엉.”

꾸르륵-

내게 그만 웃으라고 하려던 김세현이 한 번 더 울린 배곯는 소리에 입을 다문다. 그 모습에 한참을 웃다가 불현듯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굵고 기다란 감촉에 멈칫했다.

“이렇게 손잡고 있으니 좋다.”

비닐봉지가 언제 김세현의 손으로 옮겨갔는지 모르겠다. 반대편 손으로 봉투를 붙잡은 김세현이 내 손을 꼭 쥐며 말하는데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이미 터질 듯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괜스레 불퉁한 목소리를 뱉었다.

“…손잡아도 아까 뱃소리는 안 잊히거든요?”

“하하, 그래요.”

이번엔 내가 아니라 김세현이 웃기 시작한다. 얼굴 가득 미소가 자리한 김세현을 보니 내 심장 박동이 그에게 전달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시금 울려 퍼진 배곯는 소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늘 형, 나 배고픈데….”

이 소릴 들은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배고픈지 알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봉투의 무게가 제법 나갔던 걸 상기하곤 잠시 고민하다가 집을 가리켰다.

“음식 많이 사 오셨던데, 먹고 갈래요?”

“…나 들어가도 돼요?”

내 제안에 놀랐는지 김세현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고갤 끄덕였다.

“식탁에만 앉아 있겠다고 약속하면요.”

멍하니 날 바라보던 김세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동자 가득 기쁨이 들어찼다.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세현의 감정이 확실하게 보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을게요! 아니지, 음식 꺼내고 치울 때만 일어날게요! 그래도 되죠?”

앉아 있겠단 말을 하다가 이내 슬쩍 말을 바꿔선 허락을 구한다. 아마 들어간다면 식사 전 손을 씻겠다는 이유로, 집이 너무 조용하단 이유로 TV를 켜야겠다는 둥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며 움직일 것 같단 생각이 순간 든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정돈 괜찮았다. 물론, 모든 걸 내게 허락을 구해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김세현에게 서운했던 게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를 집에 들인다는 게 참 웃겼다. 하지만 김세현도 확실하게 내 눈치를 보고 조심한다는 게 눈에 보일뿐더러….

꼬르르륵-

저렇게 배가 고프다고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형, 나 배고픈데 얼른 들어가서 밥 먹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치스럽다고 해놓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낯빛 하나 바꾸지 않는다. 얼굴 가득 설렘으로 가득 찬 이를 보며 고갤 주억이곤 현관문 쪽을 턱짓했다.

“얼른 가서 밥부터 먹어요.”

“형, 이것도 먹어 봐요.”

“이것도 맛있거든요? 이것도 먹고 기운 내요.”

“…….”

봉투가 무거워 제법 많은 음식을 가지고 왔다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음식을 챙겨 왔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지, 김세현이 대문 밖에 음식 봉투 두 갤 두고 들어왔단 점부터 지적해야 할 듯했다.

“형, 진짜라니까요. 형 먹을 음식 사면서 나 먹을 것도 같이 샀을 뿐이에요. 형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밖에 둔 거고.”

집으로 들어가자며 은근슬쩍 붙잡고 있던 손을 이끌었건만, 김세현은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대문 쪽으로 이동했었다. 물론 손은 계속 잡고 있었기에 같이 가 밖을 확인했을 때 음식이 가득 든 봉투 두 갤 발견하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정말이에요!”

“알았어요.”

내게 줄 음식을 사는 김에 김세현도 자기 먹을 걸 함께 샀다는 건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봉투를 챙겨 들어와 음식을 준비하고 또 먹는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음식을 사 온 게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김세현이 계속해서 저리 말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김세현이 젓가락을 계속 멈춘 채 항변만 할 것 같다. 나는 김세현이 내 앞으로 옮겨 준 초밥과 소고기로 시선을 주며 답했다.

“잘 먹을게요.”

“많이 먹고 기운 내요. 그래야 내일 저녁부터 힘내죠. 일 마치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눠야 하는데.”

“그래요.”

계속해서 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 기운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만 같다. 김세현의 말마따나 내일 퇴근 후엔 마당에 있는 저것들을 전부 치울 예정이라 열심히 먹고 체력을 보충해 두는 게 나을 듯했다.

멈췄던 젓가락을 다시 움직이자 김세현 역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식사를 재개했다. 그렇게 김세현이 챙겨 주는 음식도 먹고, 또 내 몫의 초밥도 먹다 보니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음식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다 먹었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건지 빈 음식 용기들을 보며 김세현이 입맛을 다신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즉석밥 있는데 그거라도 좀 드릴까요?”

“라면도 있어요?”

“컵라면은 있어요.”

“그것도 줘요. 오늘 점심을 걸러서 그런지 몰라도 허기가 좀처럼 안 가시네요.”

“…점심 안 드셨어요?”

사무실에선 배가 조용하기도 했고, 아무 말도 없어 당연히 밥을 먹고 왔을 줄 알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즉석밥을 꺼내다 말고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김세현이 씩 웃으며 한쪽 팔을 식탁에 올리더니 그 손에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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