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17)화 (217/246)

214화

24. 뜻밖의 상황

부팀장과 퇴근길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집이 코앞이다. 언제나처럼 차가 집이 있는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

며칠 지난 일도 아닌 오늘 아침에 큰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그때의 긴장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혹여 부팀장이 내가 긴장하는 걸 눈치채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기지개를 켜는 척 숨을 고르는데 운전석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면 푹 쉬어요.”

“…네, 부팀장님.”

열심히 연기를 했건만, 바로 알아차릴 줄은 미처 몰랐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데, 부팀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팀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오늘보다 상태 더 안 좋은 것 같다 싶으면 바로 연락해요.”

“그럴게요.”

“오늘처럼 참지 말고요.”

“…네.”

사무실에서도 들었던 말을 다시 들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했지만, 퇴근하기 전 사무실 한쪽에 걸린 거울을 봤을 때를 상기하니 저리 말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오늘 내 낯빛은 내가 봐도 어디 아픈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까.

집과 가까워진 차가 점차 속도가 줄더니 이윽고 멈춰 섰다. 나는 가방을 챙겨 내리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부팀장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내 인사에 답하던 부팀장이 힐끔 대문 쪽을 살피곤 뒷말을 이었다. 택배가 왔는지 확인하는 모습에 덩달아 그쪽을 보는데 오늘은 다행히 자리를 비운 사이 도착한 물건은 없는 듯했다. 차를 빙 돌아 대문 가로 이동하자 운전석 창문을 내린 부팀장이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한다. 나는 한 번 더 인사를 건넸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푹 쉬어요.”

“부팀장님도 돌아가시면 푹 쉬세요.”

“예.”

다른 날 같았다면 부팀장이 먼저 가길 기다려 보려고 한다거나 했겠지만, 오늘은 아침 일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사를 받은 부팀장이 고갤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는 누가 뒤쫓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띠리릭-

“하아.”

문이 닫히기 무섭게 빠르게 잠기는 현관문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럽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단속을 철저하게 한 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을 켜며 문단속까지 확실히 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챙겼다고.”

툭하면 문을 열고 다닌 터라 혹여 오늘도 그러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보다 다행일 수가 없다. 문이 잠겨 있어도 멋대로 김세현의 집을 드나들던 남자였음이 떠올랐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간 집에서 편히 쉬지도 못할 것만 같다. 이내 그 생각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자 잊고 있었던 허기가 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허기보다 내 몸을 휩쓴 감각이 너무도 강렬했다.

“…먹지 말까?”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고, 또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이 후들거렸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눕고 싶은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침대로 가 눕고 싶었지만, 눕는 걸 택한다면 나중이 힘들 터였다. 나는 침대로 가는 대신 소파에 가방을 던지곤 부엌으로 가 저녁거리들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찬장에 넣어 둔 즉석밥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

다른 때도 아닌 오늘 같은 날 초인종이 울리니 이보다 긴장될 수가 없다. 순간 경직된 몸을 느끼는데, 한 번 더 초인종이 울렸다.

“…후우.”

택배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동네 사람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다름 아닌 오늘 아침에 만났던 그 남자와 한 덩치 하던 이들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내가 오라고 했다고 정말 그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찾아온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즉석밥을 손에 쥔 채 꽁꽁 얼어선 수많은 생각을 하는데,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린다. 나는 몸으로 전달되는 진동과 진동음 소리에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걸 인지했다. 뻣뻣하기 짝이 없는 몸을 움직여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화면에 뜬 이름에 급속도로 긴장이 풀렸다.

“하아.”

핸드폰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김세현이었다. 나는 몇 번 의미 없는 소리를 뱉으며 목소리를 확인하곤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형!

“네, 세현 씨.”

-문 열어 봐요.

“네?”

-초인종 내가 눌렀어요.

“…세현 씨였어요?”

초인종 소리에 긴장했는데, 김세현이 찾아왔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문을 열어 달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김세현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집 안으로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형 많이 피곤한 거 같아서 먹을 거 좀 사 왔어요. 이거 먹고 쉬라고요.

“먹을 거요?”

-이거만 주고 얼른 갈게요.

“…….”

설마 내가 피곤한 것 같다고 음식을 가지고 왔을 줄이야.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고는 정말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는 당황하다가 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이에 바로 밖으로 나갔다. 잠가 둔 대문을 여니 정말 김세현이 비닐봉지를 든 채 서 있었다. 봉지가 터지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빵빵하게 뭔가로 가득 찬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형, 문단속 너무 철저하게 하는…. 저것들은 뭐예요?”

“아, 저거요.”

고개를 들어 김세현이 바라보는 방향을 확인하니 어째서 방금 전처럼 그가 물어본 건지 알 듯했다. 마당 한쪽에 쌓일 대로 쌓인 물건들을 보다가 다시 김세현을 보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전했다.

“…그러니까 형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런 걸 보냈다는 거네요?”

“저보단 세현 씨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지만요.”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저런 허접한 걸 보낸다고요?”

내 눈엔 전혀 허접하지 않은 물건들인데 허접하다니….

의외의 말에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는데 김세현이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형, 이거 받아요.”

“…잘 먹을게요.”

막상 음식이 담긴 봉지를 받으니 보는 것보다 무게가 상당했다. 순간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걱정을 하며 이렇게 한껏 음식을 사다 준 게 고마웠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야?”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였다. 물끄러미 봉투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김세현은 어느새 마당 안으로 들어와서는 쌓아 둔 물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말문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는데, 김세현은 내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이리저리 물건들을 살피기 바빴다.

“쯧!”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김세현의 눈에 차는 물건이 어지간히 없는 모양이었다. 저리 김세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물건들을 살피는 걸 보니 나를 통해 김세현에게 줄을 대보려던 이들이 얼마나 날 만만하게 여겼는지 좀 알 듯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 김세현이 생각하는 물건의 급 차이도 상당하다는 걸 알겠고.

“형, 이거 다 버릴 거죠?”

“네. 주말에 쉬니까 그때 분리수거해서 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그럼 주말에 나랑 같이 정리해서 버려요.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카메라로 온 물건들 버리는 거 확실하게 촬영하면서요.”

김세현이 담 너머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던 참이긴 했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김세현의 곁으로 가 섰다.

“형.”

“네.”

“이런 잡다한 물건들 온 거 말고 다른 일은 없어요? 말 안 한 거 있으면 말해요. 내 선에서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으음….”

갑자기 저리 말을 하니 당혹스럽다. 대답을 회피하는데 김세현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뚫어져라 날 바라보았다.

“혹시 누가 찾아와서는 알랑방귀를 뀐다거나 한 적 있어요?”

“그건…. 없어요.”

찾아온 적은 있지만 그 남자가 내게 잘 보이려 한 적은 없었다. 침묵하다가 고개를 젓자 김세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그러면 다른 곳 연락하지 말고 바로 나한테 연락해요.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손봐 줄 테니까요.”

“하, 하….”

김세현이 그러겠다고 한다면 정말 확실하게 처리하겠지만, 굳이 남자와 김세현을 맞닥뜨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분명 서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갈 테고, 그렇게 된다면 알게 모르게 김세현이 상처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

“네, 세현 씨.”

“그러지 말고 내가 금요일 저녁에 여기 와서 같이 있을까요? 퇴근하고 와서 치우면 토요일 일요일은 계속 놀 수 있잖아요.”

“…….”

잠시 오늘 아침 날 찾아왔던 남자를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다. 김세현이 은근슬쩍 음식을 내게 건네며 마당 안까지 들어왔단 걸 말이다. 순간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김세현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물론, 형이 싫다고 한다면 마당에서 텐트라도 쳐서 있고요. 그것도 싫다고 하면 밖에서 뜬눈으로 토요일 아침까지 기다리고요. …지난번 일도 있으니 앞으론 뭐든 형한테 허락받을 거라는 거 잊지 않았어요.”

내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보이면서도 한사코 금요일에 와 있겠다는 뜻을 무르지 않는다. 본인이 말해 놓곤 거절당할까 싶었는지 어느새 촉촉해진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김세현을 보는데 어째선지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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