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24. 뜻밖의 상황
“괜찮아?”
오늘로 저 말을 몇 번 듣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며 고갤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요.”
다들 저리 물어본다는 건 아직도 오늘 아침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가 되도록 팀원들이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피곤하면 반차라도 쓰든가.”
“그러게. 좀 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반차 이야기를 꺼낸 한 주무관에 이어 김 주무관이 고갤 끄덕이며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괜찮냐는 물음에 이어 반차까지 거론되니 어지간히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체감된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곤 고갤 저었다.
“지금 쓰기엔 좀 아까워서요.”
오후 3시가 넘은 시점이기에 이제 와 반차를 쓰는 건 너무 아까웠다. 물론, 그보다 다른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아침에 큰일을 겪었던 만큼 지금은 심적인 안정을 조금이라도 더 취하려면 기댈 수 있는 이들 곁에 머무르는 편이 이득이었다.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 번 더 밝히자 김 주무관이 한 번 더 권유했다.
“그래도 일찍 들어가서 좀 쉬는 것도 좋을 텐데. 큰일도 겪었잖아.”
큰, 일?
멈칫하며 그를 보자 김 주무관이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힘들었지?”
“어, 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짚어낸 걸까. 아니지, 말하지 않았기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 터였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함구한 터라 힘들었냐는 말에 괜히 나 혼자 찔린 것일 테고 말이다. 대답을 미룬 채 어색하게 웃자 김 주무관이 혀를 찼다.
“이거 보세요. 어제 데비안인지 데미안인지 하는 사람이 와서 들쑤시고 간 거 여파가 맞다니까요?”
“하긴. 나라도 억만금을 걷어찼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겠다.”
“…저였으면 백지수표 내밀었으면 세계헌터협회 기둥까지 다 뽑아먹었을 텐데 말이죠.”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었던 박 주무관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뱉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 주무관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만 놀랐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자 의외로 생각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기둥을 뽑아낼 만큼 돈을 준다면 여기 버리고 거기로 가겠다, 이 말이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거기 가면 온갖 감춰진 이야기들이 가득할 거잖아요! 이야기 수집한 뒤 떼돈과 함께 복귀하는 거죠.”
“으이구, 말이라도 못하면!”
그런 이유에서라면 박 주무관이 어째서 스카웃 이야기에 응하겠다고 말한 건지 알겠다. 역시 박 주무관은 박 주무관이라는 생각을 하며 웃다가 박 주무관이 도움을 청하는 듯 눈을 끔벅이며 신호를 보내자 말을 보탰다.
“돈은 아쉽지 않은데, 그냥 좀…. 긴장했었나 봐요.”
어제 일은 따로 뇌리에 남거나 하는 부분은 없었다. 한 마디로 세계헌터협회에서 왔다던 데미안 리가 내민 제안은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단 말이었다.
제안을 할 거라면 내게 이로운 것보다 차라리 김세현에게 이득이 될 만한 걸 내밀었다면 잠시 생각이라도 해 봤을지도 모르겠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이라 더 생각할 필욘 없긴 했다. 곱씹어 본다고 해서 내게 남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연 주무관님, 반차 내기 아까운 시간이지만 오늘 같은 날 푹 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침묵한 채 이야기를 경청하던 서강민이 한 번 더 반차를 입에 담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답하던 와중 출입문이 벌컥 열며 나타난 이에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괜찮….”
“형, 내가 데려다줄까요?”
언제나 타이밍이 좋은 김세현이긴 했지만, 이 타이밍에 등장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인사도 아닌 데려다주냐는 질문을 던지며 말이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김세현이 유심히 내 얼굴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제 곧 퇴근인데요.”
“…얼굴 보니까 좀 쉬어야 할 거 같은데요? 왜 이렇게 창백하지?”
내 얼굴이 그렇게 창백했었나 싶다. 김세현의 지적에 얼굴을 만지작거리는데 부팀장이 입을 열었다.
“하늘 씨가 반차 내도 제가 데려다줄 겁니다.”
“형, 뭐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요? 율무차?”
언제나처럼 자기 할 말을 하기 바쁘다. 박 주무관의 곁에서 허리를 굽히곤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김세현을 보는데, 자연스럽게 오늘 아침 일이 떠올랐다.
“…형?”
오늘 아침에 잠깐 겪었을 뿐임에도 그 남자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하긴, 나라에서도 귀하게 모시기 위해 혈안인 S급 헌터도 막 대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하찮게 보일까 싶긴 했다. 하지만 자기가 뭐라고 김세현을 그렇게 무시하는 건지….
“형!”
“아.”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요? 율무차 말고 다른 거 타다 줘요?”
김세현을 봤다고 바로 오늘 아침 일이 떠오를 줄이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율무차로 마실게요.”
“바로 가져다줄게요.”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곧바로 정수기 쪽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미세하게 시선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
혹여 다른 이에게 들킬 새라 황급히 시선을 떨군 채 초점을 맞춰보려 했지만, 좀처럼 눈동자의 흔들림이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손도 떨리는 걸 인지하고는 두 다리를 두드리는 척하며 두 손을 책상 아래로 감췄다.
“형, 여기요.”
“거기 두면 이따가 마실게요.”
“…어디 아파요?”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 헌터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나 보다. 심각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김세현이 날 이리저리 살피는데, 자칫 잘못했다간 오늘 아침 일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답했다.
“그게, 사실 오늘 몸이 좀 좋지 않았거든요.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세현 씰 보니 긴장이 풀렸나 봐요. 몸이 좀 떨리네요.”
“…그렇게까지 몸이 안 좋았던 거야? 눈치보지 말고 반차를 쓰든가 아니면 휴가를 쓰지.”
다소 놀란 듯한 기색으로 팀장이 말한다. 나는 웃으며 고갤 저었다.
“출근 전엔 조금 고민했었는데 막상 사무실에 오니 괜찮아져서요.”
“어쩐지 아침에 계단에 걸터앉아서 쉬고 있다 싶었습니다. 괜찮다고 부득불 우기길래 출근했는데, 그때 집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거짓말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역시 지금은 이렇게 지나가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아침에 생각했던 걸 다시 한번 더 곱씹다가 내 쪽으로 팀원들의 시선이 쏠린 것을 인지했다.
“하여간 책임감 하나는 투철하죠.”
“이거 우리도 분발해야겠네요. 연 주무관도 이렇게 적극적인데 말이죠.”
“연 주무관, 내일 휴가 쓸래? 난이도 높은 던전도 소멸한 지 며칠 안 되기도 했으니 아마 한동안은 상황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연 주무관이 여태 반차고 연차고 쓴 적 없는데 이때 한 번 쓰면 되겠다.”
“형, 저렇게 휴가 써 달라고 애원하는데, 내일 휴가 써요. 내일부터 내가 풀코스로 형 피로 풀 수 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까.”
팀원들이 날 칭찬하기 위해 꺼낸 말임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저리 원하는 부분만 냉큼 주워듣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거다. 날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도 내일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걸 상상하는지 묘하게 풀린 눈매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갤 저었다.
“이번 주말에 쉬는데 내일은 출근해야죠.”
던전이 생성되지 않는다면야 내가 하루 빠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던전 생성의 법칙이 깨진 지도 제법 되었고, 같은 장소에 던전이 연달아 생성되는 일도 발생하는 마당에 자리를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호한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멈칫하더니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망울로 날 바라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출근과 관련해서 만큼은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내일 상황 보면서 컨디션 안 좋으면 반차 내든가 하는 것으로 하자고. 혹시 아침에 일어나서 몸 상태 안 좋으면 바로 나나 부팀장한테 연락하고.”
“네, 그럴게요.”
고갤 끄덕이자 팀장이 따라 끄덕이더니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와 함께 다른 팀원들의 관심도 다시 일감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형, 얼른 마셔요. 몸이라도 따뜻해야 떨림이 멎을 테니까.”
“잘 마실게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김세현은 계속해서 날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내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는지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컵을 쓱 내 쪽으로 민다. 나는 감추고 있던 손을 꺼내어 종이컵을 쥐었다.
“…후우.”
아직도 손이 좀 떨리긴 했지만 조금 전 나눴던 대화들 덕분인지 한결 마음이 진정된 모양이다. 떨리는 손 위로 반대편 손을 겹치곤 천천히 율무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