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15)화 (215/246)

212화

24. 뜻밖의 상황

“그럴 순 없습니다.”

“아, 혹시 말이 나올까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면 되니까.”

뭘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난 부탁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기가 찬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이번엔 좀 더 풀어 답해 주었다.

“아뇨, 제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

생각 외의 답변이었던 걸까. 혼자 내 상황을 넘겨짚던 남자가 입을 다문다. 날카로운 눈이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시선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치는 것이 영 기분이 나빴다. 마치 기세로 날 누르려는 듯한 모습에 나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답했다.

“저는 출근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일부터 한 텀 쉬고, 목소리 가득 힘을 실으며 뒷말을 이었다.

“제게 할 말이 있다면 어르신이란 분이 직접 여기로 오시길 바랍니다.”

“건방진….”

내 말을 듣던 남자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을 뱉는데, 목소리 가득 화가 넘실거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금 위압적으로 느껴지던 남자였기 때문일까, 화가 난 모습을 보니 괜히 긴장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그래, 저 사람은 김세현도 막 대하던 사람이었다. 나를 막 대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을 막 대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직장인에게 출근은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출근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자뇨.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한다면 백이면 백 저와 같은 반응일 겁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왔다는 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친손자이자 세계 최고의 헌터인 김세현을 무시하는 것만 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다는 것쯤은 대강 눈치채고 있긴 했다.

“하여간 그놈은 꼭 자길 닮은 놈에게 관심을 보여서는.”

“듣는 놈 기분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나 봐요.”

다른 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눈앞의 이는 김세현을 막 대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겐 아주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주면 되었다. 그래, 말만 올려 주면 될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세에 눌려 말린 어깨를 쭉 펴곤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는 그런 날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쯧!”

혀를 찬 남자가 고갤 옆으로 틀더니 까닥인다. 내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잔 신호였다. 재차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내 남자의 뒤쪽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정 셋이 다가와 서는 광경에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래도 말로 해선 안 될 듯하니 이쪽에서 정중하게 모셔 가는 수밖에. 태워.”

“예.”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정들이 날 빙 둘러싸더니 그대로 내 양팔을 결박했다. 그들이 양쪽에서 힘을 주자 그대로 발이 공중에 뜬다. 나는 황급히 중년 남성에게 외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낮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이른 시각에, 그것도 주택가에서 납치하려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날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무원을 납치하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 또 손을 뿌리치려 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장정들이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힘없이 실려 갈 순 없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사무실로 데려다주지. 아,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지만 말이야.”

이젠 아예 말을 놓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 남자를 노려보다가 혹시나 하는 바람을 담아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건 엄연히 납, 으읍!”

“얼른 태워.”

“예.”

남자의 명령 아닌 명령을 들은 이들이 그대로 날 차로 끌고 간다. 팔도 휘둘러 보고, 또 다리도 흔들고 몸도 비틀어 봤지만, 애초에 힘 차이가 나서 그런지 여전히 남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질없는 반항을 하다 보니 어느새 차 앞에 당도했다. 덜컹. 차 뒷문이 열리고 먼저 탄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자 양쪽에 서 있던 이들이 날 그 남자에게 건네듯 몸을 안으로 들이민다. 그에 한 번 더 발버둥을 쳐 봤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제로 차에 태워지고, 다른 이들이 차에 오르기 전 한 번 더 몸부림을 쳐봐도 통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차 안에서 다시금 양쪽에 장정을 끼고 앉아 있는 신세가 되고 만 상황에 한 번 더 목청을 높였다.

“이렇게 사람을 납치해도 되는 겁니까? 신고할 겁니다!”

그래, 김세현의 친할아버지라고 해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양손이 풀리는 즉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봤지만, 차에 오른 이들은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몇 번 더 몸부림을 쳐 봤지만, 도저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몸에서 힘을 쭉 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출근하려고 나왔건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부팀장이 말했던 것처럼 부팀장이 오고 나면 잠깐 짬을 내어 짐을 옮기고 출근할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

“하아.”

그러고 보니 이제 조금 있으면 부팀장이 집 앞으로 올 시간이었다. 이들이 떠나기 전에 부팀장이 와 주길 간절히 바라며, 또 한편으론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이들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은근슬쩍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지만 그 행동 역시 바로 장정에게 제지당했다. 나는 맥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틈이 생기는 순간 사용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래, 찬스가 왔을 때 젖 먹던 힘까지 쓴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

그나저나 남자는 왜 이리 오지 않는 걸까. 날 차로 데려가라고 말한 남자가 정작 차에 타지 않는 게 의아해 밖을 보자 통화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이제 곧 출근할 사람을 이렇게 납치해 차에 타게 할 땐 언제고, 그 당사자는 저리 편하게 통화를 하고 있다니. 누구와 통화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저 남자가 무척 곤란해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데, 통화가 끝났는지 남자가 핸드폰을 품에 넣고 걸어온다. 창문 너머로 남자를 노려보는데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제 곧 차에 타나 싶어 있는 힘껏 한 번 더 발버둥을 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풀어 줘.”

“예?”

“풀어 주라고.”

“…예.”

갑자기 바뀐 지시에 얼떨떨해하던 남자들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고 있던 걸 풀어준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며 차 문을 붙잡고 선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이 당혹스러웠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어르신이 마음을 바꾸셨어.”

“그건 제가 알 바가 아니죠. 지금 이 일은 납치미수로 꼭 신고할 겁니다.”

그래,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보는 기계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김세현에게 꼭 오늘 일을 말하며 영상을 확보하자 다짐하며 신고를 입에 담았지만, 남자의 반응은 의외여서 눈을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러시든가. 할 수 있다면 말이지.”

“…….”

비뚜름한 미소를 짓던 남자가 어딘갈 바라본다. 남자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좇으며 주위를 살피다가 그가 어떤 경고를 내게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당신!”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동네 사람들을 인질로 잡겠다는 식의 말은 정말 저질이었다. 이보다 최악일 순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멸을 감추지 않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어르신께서 마음을 바꾸셨지만, 다음엔 아마 어르신의 앞까지 가야 할 거야.”

하지만 남자는 내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이에 나는 싸늘하게 답변했다.

“가지 않을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세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나중에 민망해질 텐데?”

마치 내가 제 발로 어르신의 앞까지 찾아갈 것처럼 말한다. 나는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럴 일 없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이런 반응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콧방귀를 낀 이가 이내 차에 오르고 잠시 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간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다가 차 엔진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깊은 한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하아.”

휘청이는 다리를 끌고 대문으로 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연거푸 한숨을 내뱉었다.

중년 남성에게 기가 눌리지 않아 다행이었고, 또 할 말을 다 뱉어서 다행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놓이는 건 바로 납치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알려야겠지.”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팀원들에게 알려 두는 편이 좋을 것….

하지만 막상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김세현이 걱정된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부팀장이 올 때까지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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