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24. 뜻밖의 상황
“그러니까, 지금 데미안 리 씨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김세현은 몹시 중요한 사람이라 큰 출혈을 감행해서라도 스카우트하고 싶단 말씀이시네요. 저는 그저 겉절이 같은 느낌이고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 김세현 헌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그와 동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분입니다.”
다른 때였다면 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거다. 그만큼 김세현에게 유일한 사람이란 표현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어렵지 않게 말속에 담긴 뜻을 눈치채곤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다시 말하자면 김세현 헌터가 제게 관심을 거두는 순간이 온다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말씀 같네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뒷말을 이어갔다.
“더군다나 앞뒤 말이 너무 다르네요. 저를 스카웃하러 오신 거라면 적어도 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텐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김세현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셨잖아요.”
“…….”
내가 너무 허를 찌른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런 말을 꺼낼지 몰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말없이 날 바라보는 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곁의 남자에게도 단호히 말했다.
“이런 일로 찾아오진 말아 주시겠어요? 일하는 데 몹시 곤란합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 하는 일이 무척 만족스러워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스카우트에 응할 생각도 없어요.”
지금 하는 일은 무척 보람찼고, 또한 함께하는 이들 역시 너무 좋았다. 월급이야 이제야 갓 일을 시작한 터라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수당 같은 걸 포함하다 보면 혼자 사는 데 지장도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말을 해서일까, 여기저기서 날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특히 맞은 편 자리의 박 주무관이 보내는 시선은 몹시 뜨거웠다.
“한국헌터협회 회장직을 내어 드린다고 해도 말입니까?”
설마 한국헌터협회 회장직까지 거론할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세계헌터협회 회장직 가지고 오면 그때 한번 생각해 볼게요.”
저 사람이 한국헌터협회 회장직을 거론해 봤자 세계헌터협회가 우리나라 협회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만큼 거부하는 의미를 담아, 그리고 기왕이면 더 크게 부르자는 생각에 세계헌터협회 회장직을 입에 올렸는데,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문제였다. 데미안 리가 물어본 그 방식 그대로 답변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내 말에 멈칫하던 데미안 리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뜻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여기서 더 설명해야 했다면 팀원들에게 미안했을 거다. 안 그래도 선물 대란으로 불편했을 텐데, 이런 일까지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될 말이었다. 함께하는데 나만 좋고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면 그건 정말 아니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어째서 김세현 헌터가 연 주무관님을 가까이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듯하군요. 다음에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그땐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른 시간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죠.”
“그러세요.”
그간 막무가내식으로 밀고 들어와 날 찾는 사람들만 봐서일까, 정식으로 약속을 잡아 시간을 맞춰서 만나자고 하는 이의 말이 무척 반갑다. 고갤 끄덕이자 데미안 리 역시 고갤 끄덕이더니 품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건네 오는 명함을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 주무관님의 명함도 받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릴 거 같군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시거든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그 명함은 제 직통 전화가 적힌 거라 아무 때나 연락 주시면 됩니다. 몇 년이 흘러도 연락 주세요. 번호 바꾸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과연 연락을 취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 또한 앞서 깎인 점수를 제법 만회하는 선택인 듯싶었다. 나는 한결 풀린 표정을 느끼며 그것을 와이셔츠 앞주머니 속에 담았다.
“네. 챙겨 두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 보죠.”
그런 내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데미안 리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인사를 건네곤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가 먼저 자리를 뜨자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사무실을 나갔다. 어느새 이영혁 부장만이 남게 되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와, 우리 연 주무관 배포가 큰 줄은 알았지만 억만금도 저버릴 만큼 여길 좋아하고 있었을 줄이야.”
“다들 들으셨죠? 세계헌터협회 회장직을 주면 한번 생각해 보겠다잖아요. 진짜 듣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더라니까요?”
“그보단 저는 연 주무관이 화내는 거 처음 봤습니다! 무표정하게 사람을 바라보는데, 진짜 살 떨리더라고요.”
“하, 하….”
응할 생각이 없어 상대가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걸 불러 봤을 뿐인데 이렇게 칭찬을 해 주니 민망할 따름이다. 내가 뭔갈 할 때마다 칭찬해 주는 이들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좀 심했다. 그들만 이곳에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자리엔 이영혁 부장과 새로 온 팀원들도 있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데, 이영혁 부장과 같이 있던 팀장이 다가와서는 머리를 헤집었다. 가끔 머리를 만지곤 했지만, 오늘따라 손에 힘이 많이 실렸는지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절로 허리가 굽혀지는 게 느껴졌다.
“하핫! 하여간 연 주무관 덕분에 내가 숨통이 트이지, 트여!”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머리 위로 가해지는 힘이 점차 세진다. 버틸 새도 없이 강제로 웅크리게 되는 허리와 몸을 느낄 때였다.
“어, 어!”
“팀장님, 그렇게 세게 하시면 우리 막내 접혀요!”
“디스크 터지면 어쩌시려고요!”
“…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날 누르던 손이 멈칫한다. 거의 90도가량 꺾였던 허리를 펴는 걸 도운 팀장이 이리저리 내 몸을 살폈다.
“괜찮아?”
“…좀 지켜봐야 할 거 같아요.”
지금 당장은 충격이 커 몸 상태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고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작게 숨을 뱉으며 속수무책으로 접혔던 허리를 만졌다.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해.”
마음 같아서는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힘으로 짓눌린 터라 선뜻 답하긴 힘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지금은 괜찮은데, 혹시 어디 아프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날 이리저리 살피기 바쁘다. 이리저리 허공을 떠도는 손도 그렇고,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도 그렇고. 팀장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에 슬쩍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숨통이 트인다니 다행이네요.”
요즘 이런저런 일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었다. 호탕한 웃음을 생각해 보면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잊고 즐거워했던 듯해 따로 한 게 없음에도 괜히 뿌듯했다.
“하여간 연 주무관 덕분에 산다, 살아.”
내 대답을 들은 팀장이 멈칫하다가 크게 한숨을 뱉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보며 웃는데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저도 대리만족했습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영혁 부장도 웃으며 속내를 밝힌다. 하긴, 그 또한 무척 개운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적어도 앞으론 협조금 관련해 세계헌터협회 측에서 말을 아낄 거 같군요. 연 주무관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과연 그럴까 싶긴 해요.”
이영혁 부장의 말을 들으니 그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말을 골라서 할 걸 그랬나 싶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단 사실에 절로 어깨가 내려가는데, 팀장이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꺼냈다.
“직접적인 말보단 행동이 더 크게 와닿기도 해. 조금 전 상황은 나였어도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을 거야.”
“맞습니다. 세계헌터협회도 그렇고, 같이 왔던 남자도 앞으론 하늘 씨를 만만하게 보지 못할 겁니다. 헌터부 또한 멋대로 방문하거나 하진 못하겠죠.”
팀장과 부팀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의도한 바는 아니더라도 상황이 잘 매듭지어질 수도 있을 듯했다. 속으로 안도하는데 김 주무관이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협회로 돌아가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좀 궁금하긴 하네요. 그저 떠보기식의 말이었지만 협회장을 거론한 건 예의가 아니었던 터라 정말 볼만하겠는걸요?”
“뭐, 그건 저들이 알아서 해야지. 멋대로 와서는 상사가 떡하니 있는 자리에서 부하를 스카우트하러 왔다고 한 순간부터 이미 예의는 밥 말아 먹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긴, 그렇죠.”
한 주무관의 대답에 박 주무관이 고갤 주억였다. 그러다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크게 떴다.
“뭣하면 잉여한테 생방송으로 상황 보여 달라고 할까요? 아니지, 굳이 보지 않아도 방금 있던 일을 넌지시 흘리면 상황이 정리될 거 같긴 하네요.”
“그런 말 말아. 괜히 시끄러워지니까. 거기다, 그건 연 주무관이 결정할 일이기도 하고.”
“당연하죠! 연 주무관, 아까 한 말은 그냥 농담이었으니까 흘려들어.”
“네, 알고 있어요.”
말하는 동안 몹시도 과장된 행동을 섞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갓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자주 속아 넘어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다는 말에 박 주무관이 피식 웃는다. 덩달아 웃다가 이영혁 부장이 움직이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