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10)화 (210/246)

207화

24. 뜻밖의 상황

“으읏!”

짧은 시간이긴 해도 집중한 채 같은 자세를 계속 유지해서인지 몸 곳곳이 쑤셨다. 양손을 깍지 낀 채 아래로 손을 뻗으며 등을 구부려 쭉 기지개를 켜자 절로 눈물이 핑 돈다. 평소 기지개를 켜도 눈물 한 방울 안 나더니 몸이 고단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낮에 던전도 생성되었던 터라 잔뜩 긴장했기에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눈가를 닦아 내며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어요?”

“네.”

“커피 한 잔 타 줄까요?”

“아뇨. 이제 곧 퇴근이니 집에 가서 밥 먹어야죠.”

퇴근 전 커피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커피를 마신 뒤 밥을 먹게 된다면 입맛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먹을 때 조금 먹고 나중에 따로 야식을 챙겨 먹어야 할 것이었다. 고개를 젓자 김세현이 곧바로 태블릿을 앞으로 내밀었다.

“퇴근 준비 전까지 같이 봐요.”

“그래요.”

할 일이 끝났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일감을 나눠 받았던 이들에게 파일 전송을 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곤 김세현이 내민 태블릿 한쪽을 붙잡았다.

“이건 예전에 외국에 나갔을 때 사진이에요. 아, 형도 기억하죠? 지난번에 호주에 던전 생성되었을 때. 그때 오가는 길에 찍었어요.”

“아, 그때요.”

호주에서 생성되었던 S급 던전을 혈혈단신으로 빠르게 클리어했던 장면은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의 기억에 생생할 터였다.

던전을 클리어하려 빠르게 이동하고, 또 클리어 후 라면 이야기를 꺼내며 인터뷰를 진행한 이후의 상황은 짐작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나 사진을 많이 찍은 걸 보면 이동하는 시간이 제법 걸렸을 듯했다.

“여긴 형이랑 같이 가서 보고 싶더라고요. 다음에 기회 닿으면 같이 가서 봐요.”

김세현이 호주 사진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사진 하날 콕 짚는다. 마음이야 바로 응하고 싶었지만, 이동 거리며 비용이며 쉬이 답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흘리며 그가 가리킨 사진 속 풍경을 유심히 살폈다.

“…….”

어째서 김세현이 같이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모래로 뒤덮인 곳에 뾰족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모습은 현실감이라곤 쉬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가고 싶단 욕구가 자꾸만 치솟던 와중, 김세현이 다음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이 사진 보니까 형 머리가 제법 자랐네요.”

“…그러게요.”

그야말로 압도적이란 표현밖에 쓸 수 없던 풍경 사진 다음으로 몇 달 전 내 사진을 보니 이보다 민망할 수가 없다. 그것도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일에 집중한 사진을 말이다.

“…슬슬 머리 자르러 가긴 해야겠네요.”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지 않는 편인지라 인지하지 못했는데, 제법 자란 걸 확인하니 조만간 미용실에 방문해야 할 것 같았다.

“연 주무관, 머리 자를 거면 내가 잘 아는 숍 알려 줄까? 거기 머리 진짜 잘하거든.”

“좋죠.”

크게 머리 스타일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기도 할뿐더러 아는 곳도 없어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고갤 끄덕이자 박 주무관이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한 번호와 함께 숍 이름을 보는데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형, 머리 자르러 갈 때 나도 같이 가요. 저도 슬슬 머리 손질할 때가 돼서.”

다른 때 같았다면 팀원들의 눈치를 살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김세현이라도 함께 다니는 편이 낫겠다던 팀원들의 말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그래요.”

“언제 자르러 갈 거예요?”

나는 날짜를 헤아려 보곤 답했다.

“다음 주에 가려고요. 우선, 예약이 되어야겠지만요.”

“좋아요. 그럼 다음 주 주말 모두 시간 빼놓을게요.”

“머리를 이틀씩이나 걸려 자르려고?”

김세현의 말을 들은 한 주무관이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 봐도 예약만 된다면 머릴 자르는 건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틀이나 시간을 빼 둔다니.

“머리 자르고 나서 우리 영화도 보러 가요. 아, 밥도 같이 먹고요.”

“하, 하….”

하지만 김세현은 김세현이었다. 언제나처럼 다른 이의 말을 무시하곤 주말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읊는 모습이 주변에 누가 있건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데,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김세현이 이것저것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요즘 영화 재미있는 거 많이 상영하던데, 그거 보면서 팝콘도 먹어요. 콜라는 큰 걸로 하나 해서 같이 먹….”

“일단 예약부터 되는지 확인하고요.”

여기서 잘라내지 않는다면 24시간 아니, 48시간 일정을 혼자 결정할 것만 같다. 내 제지에 놀란 듯 날 보던 김세현이 침묵하다가 이내 수긍했다.

“…그래요.”

대답과는 달리 납득하지 못한 듯 표정은 불퉁했지만, 답한 걸 보면 이 이상 밀어붙이진 않을 것이었다.

“자, 이제 퇴근 준비들 하자고. 오늘 현장에 나갔던 이들은 내일 10시까지 출근하도록 해. 집에 가서 푹 쉬고 나와.”

“예!”

“와, 오래간만에 늘어지라고 늦잠 좀 자겠네요!”

“저는 아침 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출근하렵니다!”

팀장의 말을 들은 팀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도 그럴 만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이도 A급의 던전에서 바삐 뛰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전 던전 클리어 때완 달리 출근 시간이 제법 빠르다. 의아함에 팀장을 바라보는데 한 주무관이 박 주무관을 향해 툭 말을 뱉었다.

“그래 봤자 한 시간 더 자는 정도니까 알람 잘 맞춰서 자.”

“그 한 시간이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크나큰 공헌을 하거든요!”

“내가 널 몰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예전에 박 주무관이 아마 10시 출근인데 오후….”

“악! 알람 잘 맞춰서 잘 테니까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아 주세요! 막내 앞에서 그러면 저 면이 안 삽니다!”

아….

뒷말을 전부 들은 건 아니지만 어째서 알람을 맞춰 두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몹시 당황하며 한 주무관의 말을 가로막은 박 주무관이 이쪽을 힐끔 살피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친 박 주무관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몹시 당황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애써 웃음을 참을 때였다. 순간 박 주무관의 어깨가 축 처졌다.

“텄어요, 텄어.”

“풉!”

“연 주무관, 그냥 표정 관리하지 말지 그래? 그게 더 말려.”

“아…. 그래요?”

딴에 열심히 얼굴에 힘을 실었는데, 표가 많이 난 모양이다.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짐 다 챙겼으면 퇴근들 하자고. 어서 집에 가서 쉬자!”

팀원들과 대화를 이어 가던 참에 짐을 다 꾸린 팀장이 자리서 일어난다. 덩달아 일어난 몇몇을 보며 빠르게 짐을 챙기는 와중에 날 바라보고 있던 김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세현 씨, 같이 내려가요.”

“그래요.”

“그리고, 오늘 다 못 본 건 내일 짬 나면 같이 또 봐요.”

오늘 던전은 정말 역대급으로 위험했다. 만에 하나 김세현이 없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가 나서서 던전을 클리어해 준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협조비 수령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정말이죠?”

“네. 그리고 커피도 많이 타 드릴게요.”

내가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내 마음을 다 표현하기 부족했다.

나중에 머리하러 같이 하기로 했으니 그땐 이것저것 내가 사며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표현해야겠다. 그래, 영화표도 내가 사고, 팝콘도 내가 사고 말이다. 식사 비용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감당한다면 어찌어찌 될 것도 같아 보였다.

“좋아요.”

날 빤히 바라보던 김세현이 씩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에 얼른 부팀장과 시선을 교환하곤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자, 다들 가자고. 나 먼저 출발한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팀장이 먼저 사무실을 나서자 팀원들이 그 뒤를 따른다. 나는 사무실을 나서기 전 문단속을 확인하곤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왔다.

“형, 오늘은 내가 바래다줄까요?”

“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릴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김세현을 바라보자 그는 내 옆의 부팀장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얼굴을 보아하니 쉬어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오늘 부팀장의 상태가 썩 좋지 않긴 했었다. 오후가 되고 팀원들이 돌아오며 컨디션이 돌아오긴 했지만 김세현의 말마따나 그 여파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었다.

김세현의 말에 선뜻 답하지 못한 채 주저하는데, 부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피곤했던 건 낮일이고, 지금은 퇴근해 기운이 넘치니 걱정하는 척 수작 부리지 마시죠.”

“하늘 형, 오늘 같은 날엔 한 번씩 집에 일찍 들어가 쉬게끔 하는 것도 좋아요.”

“하늘 씨를 저놈과 단둘이 보낼 바에야 조금 피곤한 편이 낫습니다. 단둘이 보내면 신경 쓰여서 편히 쉬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저놈 말은 흘려들어요.”

흘려들으라며 부팀장이 내 팔을 붙잡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갤 끄덕이는 걸 보니 정말 피곤한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미안함을 감추지 않으며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그냥 부팀장님 차 타고 갈게요.”

“…….”

“대신, 다음에 부탁드릴게요. 다음 주 주말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었다. 다음 주 주말을 거론하며 살살 달래자 잔뜩 굳었던 입매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 주말에 형 집으로 데리러 가도 돼요?”

“좋아요.”

데리러 오는 것쯤이야 문제 될 것 없었다. 집 앞까지 온다는 말에 그날 있던 일이 생각났지만, 본인 입으로 조심하겠다고 했으니 멋대로 집으로 쳐들어오진 못할 터였다.

“좋아요.”

집 앞까지 와도 된단 허락에 김세현의 입가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조금 전만 해도 침울했는데, 저 표정을 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됨 직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