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24. 뜻밖의 상황
설마, 그때의….
그러고 보니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한 거 같다. 김세현의 집에 갔을 때 방문 너머로 얼핏얼핏 들려왔던 그 목소리 말이다.
“…….”
한 번 더 들으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에 하나 정말 그 남자가 온 거라면 이 이상 듣는 건 곤란했다. 지난번처럼 본의 아니게 사적인 부분을 듣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이전엔 자는 척이라도 해서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는 척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역시, 그냥 끊자.
나중에 다시 통화하며 일이 있어 끊었다고 한다면 더는 뭐라 하지 못할 거다. 전화를 끊으려 움직이던 나는 이어 들려온 말에 다시금 핸드폰을 귓가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께서 최근 도련님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셨습니다. 상대의 직업을 듣고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하여, 조만간 한 번 자리를 만들 예정입니다.
-그 빌어먹을 관심 거두지? 하늘 형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간 진짜 이판사판이야.
“…….”
어르신이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
김세현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족처럼 대하기보다는 장기 말처럼 이용했던 몹쓸 사람이 어째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어쩌면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 관심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최근 내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지인을 이용해 김세현을 좌지우지해 보려는 걸까?
“…하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어르신이란 사람을 향한 반감이 계속 차오른다. 감정을 다스리려 한숨을 내쉬는데, 수화기 너머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말을 걸어왔다.
“형.”
아차.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생각하느라 늦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세현 씨.”
-형, 들었죠?
이미 들었는데 듣지 않았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네.”
-좋아요. 이전에도 말했지만, 모르는 사람 항상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요. 내가 괜히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이젠 확실히 알겠죠?
“무척요.”
이전 대화도 그렇고, 방금 나눈 대화도 들은 마당에 조심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금 김세현이 직접 만나는 사람이란 말에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가.
“…….”
그러고 보니 어째서 김세현이 내 이름을 댔는지 모르겠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아니지, 어쩌면 김세현은 정말 말뜻 그대로 최근 알고 지내는, 자주 만나는 사람을 입에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혼자 다르게 해석하는 것일지도 몰랐고.
김세현이 답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 와 심장이 뛰다니.
-형, 듣고 있어요?
“네?”
-피치 못하게 어디 가게 되면 나한테 연락하라고요. 절대 미안해하지 말고요.
“그럴게요.”
마치 내가 어떤 부분에서 미안해할지 예상한 듯 그 부분을 콕 짚어낸다. 반 박자 늦게 답한 나는 이어진 김세현의 말에 절로 눈이 커졌다.
-난 형 잘못되거나 하면 진짜 다 없애 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형도 나 폭주하는 거 보기 싫으면 진짜 조심해요.
폭주라니.
헌터가 폭주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들은 바가 있기에 지금 이 말은 몹시 위험천만하게 들렸다. 세계최고헌터인 김세현이 폭주하게 된다면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도 큰 피해를 보게 될 터였다. 또 몰랐다. 김세현을 막지 못해 지구 전체가 위험에 빠질지도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이 생각을 듣는다면 너무 앞서나간 말이 아니냐며 한마디 했겠지만, 정말 그럴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답했다.
“명심할게요.”
-좋아요. 그럼 여기 상황 정리되면 갈게요. 많이 늦진 않을 거예요.
“…기다릴게요.”
-하하, 형이 기다린다고 하니까 어서 정리해야겠다. 그럼 이따 봐요.
기다리겠단 말이 좋았는지 웃음을 터뜨린 김세현이 전화를 끊는다. 나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딴에 감정을 숨기려 한 듯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쳐지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긴, 내가 김세현이었어도 기분이 나빴을 거다. 멋대로 집을 들락날락하는 것도 그렇고, 와서는 불편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도 그렇고. 좋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자기가 어르신도 아니면서.”
그래, 본인이 어르신도 아닌데, 그 말을 전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김세현을 막 대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사람 됨됨이가 글러 먹었길래 저러는 걸까.
“…후우.”
그나저나 어르신이 내게 관심을 보인다고 했지. 상황을 보아하니 조만간 날 찾아올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된다면….
“생각은 나중에 하자, 연하늘.”
그래, 지금은 우선순위로 처리할 게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바로잡은 뒤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창 대화 중이었는지 사무실 안은 팀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아니 그게 그렇게 조그맣게 쪼갤 수 있는 몬스터였습니까? 여기저기 떨어진 덩어리들을 보니 제 주먹보다 작은데요?
-난들 알겠어? 하여간 그놈은 다른 놈들관 달리 입만 동동 산 놈은 아니라니까.
-아작을 낸 건 좋지만, 치우는 데 시간 제법 걸리겠네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피해가 이렇게 적은 게 어디야. 여기저기 떨어진 덩어리들 치우고 체액만 닦아 내면 난이도에 비해 피해가 정말 적어 다행이지.
-옥토퍼스들이 숨어 있었던 거 같다던 구멍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여기도 생각보다 상태가 준수해. 어디 물이 새어 나오거나 하는 곳은 안 보이니까.
팀장이 말하길 김세현과 치고받은 흔적만 있다고 했는데, 통화를 나누던 사이에 다른 구멍이 발견되었나 보다. 나는 정수기로 가 물을 한 잔 마시며 오가는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에도 피해가 적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피해가 없진 않겠지만 어디 따로 물이 샌다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상하 수도관만큼은 피한 듯해.
-다행이네요. 옥토퍼스가 물에 닿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막강해지잖습니까.
-흠…. 그건 그렇고 요즘 생성되는 던전마다 어째 바닷가 주변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자꾸 얼굴을 비추네요.
-서울도 어떻게 보면 바다와 가깝잖아.
대수롭지 않은 듯 박 주무관의 말을 김 주무관이 받아쳤다. 하긴,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는 바다와 가깝긴 했다. 고갤 주억이며 자리로 가는데, 불현듯 부팀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아직 속이 불편한지 부팀장의 혈색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다시 정수기로 향했다. 물을 마신다고 해서 돌아오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 터였다. 따뜻한 물을 챙겨 자리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부팀장에게 그것을 건넸다.
“잘 마실게요, 하늘 씨.”
놀란 얼굴로 날 보던 부팀장이 슬며시 입가를 끌어올린다. 아직 몸이 좋지 않은 듯 웃는 모습이 힘에 부쳐 보였다. 나는 따라 웃으며 어서 마시라 손짓했다.
-연 주무관, 잉여는 뭐래?
“아.”
김세현에게 연락이 왔단 걸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박 주무관의 질문에 답했다.
“블랙 옥토퍼스를 잡다가 체액을 뒤집어쓴 모양이에요. 씻고 온다더라고요.”
-…넘겨짚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머리카락 어쩌고 했던 거 보면 혹시 체액 뒤집어썼다고 홧김에 조각낸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
몬스터를 잡으며 체액이 튀어 씻을 수밖에 없단 상황이라고만 여겼지, 블랙 옥토퍼스를 조각낸 것과 연결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 근처가 체액으로 뒤덮인 이유가 나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니 괜히 입을 다물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연 주무관, 바로 중계기로 이곳 상황 전달해. 시청에도 연락 넣고. 아무래도 조사관들 나와서 둘러봐야 할 거 같으니까.
“바로 소방청과 경찰청으로 연락 넣겠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이 어떠한지 시청 직원들이 와 상황을 살펴봐야 할 만큼 거대한 구멍이 난 듯싶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우선 소방청과 경찰청으로 연락을 넣은 후 시청으로 연락하려고 하는데, 침묵하던 부팀장이 한마디 했다.
“시청은 제가 연락하도록 하죠.”
-부팀장이 한다면야 좋지. 몸은 좀 어때?
“하늘 씨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많이 좋아졌단 말을 하는 부팀장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 그것도 제법 핏기가 돌아온 채 말이다. 쉬는 중간에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그를 다시 사무실로 데리고 와야만 했던 터라 마음이 쓰였는데, 한결 나아진 혈색을 보니 안도감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확실히 사무실 담당이 한 사람 더 있고 없고가 차이가 크네.
“예,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
날 보며 만족한다고 말하는 부팀장을 보니 괜히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뿌듯한 감정과 함께 자신감이 차오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하여튼 이쪽도 계속 정리할 테니 사무실도 대기하고 있어. 점심도 챙겨 먹고. 현장에서도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 그래.
부팀장의 대답에 이어 얼른 말을 덧붙이자 팀장이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덩달아 웃음이 터진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곤 곧바로 소방청과 경찰청에 연락을 돌렸다.
“이제 중계기와 네트워크 종료하도록 하죠.”
“네, 부팀장님.”
시청으로 연락하는 건 굳이 중계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자리서 일어나 중계기와 네트워크를 끄고 돌아와 앉으니 부팀장이 말을 툭 던졌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뭘요. 딱히 한 일도 없는데요.”
“이미 말했지만 하늘 씨 덕분에 극한으로 몰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 장면이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과 닿아 있어 리프레시가 절실히 필요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아….”
좋지 않은 기억을 연상시키는 상황이었다니.
부팀장의 말을 들으니 절로 그가 몸이 안 좋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