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99)화 (199/246)

196화

23. 왜 제게 이러세요

“아까는 얘기하지 못했지만, 김세현이 말했던 것처럼 부탁할 게 있다면 언제든 김세현에게 부탁하도록 해요.”

“그럼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김세현도 그렇고 나 역시 부담스러운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괜히 이상한 말이라도 난다면 나도 곤란해질뿐더러 김세현의 명성에도 금이 갈 수 있었다.

“김세현이 몇 번이고 강조한 걸 보면 대응책이 있단 겁니다. 게다가, 지금 하늘 씨가 피해를 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김세현과 연관된 거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피해를 입고 있는 게 맞긴 했다. 침묵하자 그가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하늘 씨가 김세현에게 부탁해 봤자 큰 걸 말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야 그렇죠.”

“김세현이라면 하늘 씨가 뭐든 부탁만 한다면 좋아 날뛸 겁니다. 설령, 하늘 씨가 헌터협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치워달란 부탁을 해도 곧바로 행동하겠죠.”

“에이, 설마요.”

“하하.”

역시 농담이었는지 부팀장이 좀 더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농담 덕분인지 부탁이란 단어가 가진 무게감이 한결 덜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슬쩍 입가를 끌어 올렸다.

“꼭 부탁할 거만 할까 봐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부탁할 게 있으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언제든 말해요. 우리도 하늘 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됩니다.”

“네.”

역시, 내 부담을 덜어 주려고 꺼낸 말이 맞나 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부팀장의 눈가가 곱게 휘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있던 사소한 일들을 거론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가 집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까워지는 집을 보던 나는 멀찍이서 봐도 눈에 띄는 물건들을 보며 절로 한숨이 났다.

“하아.”

이미 아침 출근길에 상황이 이러하단 걸 봤지만, 막상 돌아와 확인하니 저걸 다 언제 정리할지 막막해진다. 이윽고 집 앞에 당도했다. 나는 축 늘어지는 어깨에 힘을 실으며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부팀장도 내려 곁으로 와 섰다.

“생각보다 물건이 많이 늘어나진 않았군요. 동네분들이 신경 써 주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언질 줘놓겠노라 아저씨가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었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조만간 동네 어르신과 아저씨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다짐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부팀장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은 도착한 물건들은 마당으로 옮기죠. 계속 밖에 물건이 쌓여 있으면 배달 오는 사람들이 그쪽에 그냥 두고 갈 수도 있습니다.”

“…도와주시려고요?”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는 게 빨리 정리됩니다.”

확실히 부팀장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도움만 받아서 될 일인가 싶었다. 나는 곧바로 손사래를 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물건 정리는 저 혼자 할게요. 그냥 마당으로 옮기는 정도만 하면 되니까 시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이럴 땐 부탁하는 겁니다.”

“다음에 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생각지도 못한 복병 탓에 제때 퇴근을 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더 그를 붙잡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날 빤히 바라보던 부팀장이 이윽고 픽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럼 큰 것만 몇 개 같이 옮기고 가겠습니다. 혼자 옮기긴 힘들어 보이는군요.”

큰 박스만 옮기겠단 말에 담벼락과 대문 쪽을 확인하니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혼자 옮기는 것도 무리였고. 나는 고민하다가 고갤 주억였다.

“큰 박스만 그럼 같이 옮겨 주세요.”

“예.”

“다른 건 하지 마시고요.”

내 대답을 들은 그가 웃더니 곧바로 물건들이 쌓인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확실한 답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큰 박스를 핑계로 다른 박스 정리도 도우려고 하는 듯했다. 큰 박스를 나른 뒤 그대로 부팀장을 돌려보내자 다짐하며 나는 곧바로 대문을 열었다. 꽃다발을 현관문 앞에 놓고는 곧바로 부팀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큰 박스들을 마당으로 옮기곤 인사를 건네려는데, 부팀장은 자연스럽게 날 피해 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나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바로 가려는 모양이다. 안도하며 그 뒤를 따르는데, 부팀장은 차로 가는 게 아니라 대문 앞의 물건들을 집어 들었다. 나는 대문을 넘어서기 전 멈춰서며 그에게 말했다.

“부팀장님, 큰 박스는 다 날랐어요.”

“이것만 옮기고 가겠습니다.”

“…그게 정말 마지막인 거 맞죠?”

혹여 다른 소릴 하면 바로 등 떠밀어 보내야겠다. 내 기세가 심상치 않았는지 부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예. 이거만 나르면 갑니다. 그러니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됩니다.”

물건을 들어 보이는 이에 곧바로 옆으로 비켜서니 다시금 부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온 그가 마당 한쪽으로 물건을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어 부팀장이 밖으로 향하자 조금 전보다 더욱 바짝 다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다시금 물건으로 손을 뻗는 이를 가로막으며 인사를 건네자 부팀장이 고갤 저으며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하하. 알겠으니 인제 그만 막아요.”

“어서 가세요. 저도 이거만 얼른 정리하고 들어갈게요.”

“하늘 씨가 먼저 집에 들어가야 제 마음이 편한데 말이죠.”

김세현과 일이 있고 난 이후 항상 내가 먼저 들어가야만 출발하던 부팀장이었다. 오늘도 그러길 바라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고갤 저었다.

“오늘은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저것도 있잖아요.”

그래, 굳이 가리키고 싶진 않았지만 내겐 저게 있었다. 앞집 담벼락에 떡하니 자리 잡은 CCTV를 가리키자 부팀장이 그쪽을 확인하곤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저걸 이렇게 이용하는 겁니까?”

“네.”

김세현이 과연 지금 당장 저 화면을 확인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걸 설치했다는 건 가끔 들여다보고는 있단 말이었다. 또 몰랐다. 오늘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저걸로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지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봅시다.”

혹여 CCTV까지 거론했음에도 마저 정리하고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부팀장은 순순히 한발 물러섰다. 몹시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차로 향하는 부팀장을 따라 이동한 나는 그가 차에 올라 벨트를 매자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차에 오른 부팀장이 미련이 남았는지 대문 앞에 쌓인 물건 쪽으로 시선을 준다. 그에 황급히 그의 시야를 차단하자 부팀장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곤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아.”

부팀장의 차가 완전히 자리를 뜰 때까지 서서 배웅하곤 뒤돌아서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게 부팀장 앞에서는 금방 치울 수 있다고 했지만, 치울 물건 양이 상당했다. 그나마 이 정도 쌓인 것도 동네 분들이 도와줘 가능했던 일이었다.

“얼른 정리하자.”

이렇게 고민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면 몇 분이라도 일찍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커다란 것들은 옮겼으니 이젠 남은 것만 대충 마당 한쪽에 쌓아 두면 되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출근하려 밖에 나와 보니 밖은 어제와 비교해 몰래 두고 간 물건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덕분에 부팀장이 오기 전 그 물건들을 마당으로 옮길 수 있었고, 뒤이어 도착한 그와 함께 사무실에 올 수 있었다. 사무실로 가는 복도 한편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출입문 앞에 도착한 나는 미리 출근한 이가 있는지 사무실 불이 켜져 있단 사실에 곧바로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물건들은?”

역시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뒤따라 들어온 부팀장과 팀장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곤 답했다.

“문구 적어 붙이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아침에 나와 보니 물건이 조금만 와 있더라고요.”

사무실과 집을 통틀어 비교해 봐도 오늘 아침만큼 물건이 조금만 도착했던 적은 없었다. 이러다 예상보다 일찍 내게 뇌물을 먹이려는 시도가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 설레는데 짐을 풀던 부팀장이 날 바라보았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다 치운 겁니까?”

“네.”

“…정말 물건이 별로 없었나 보군요. 아니면 아침 일찍 움직였다던가.”

“몇 분 옮기지도 않았어요.”

“다행입니다.”

다행이라 말하는 부팀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덩달아 웃자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별다른 일은 없었고?”

“아….”

별다른 일이라는 말에 퇴근길에 있었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데 부팀장이 먼저 답했다.

“사무실엔 별일 없었습니다.”

“사무실엔? 그럼 뭔가 다른 일 있었어?”

역시 팀장은 팀장이다. 대번에 부팀장이 꺼낸 말이 이상함을 느끼곤 그 부분을 파고든다. 나는 팀장을 보다가 부팀장을 바라보았다.

“김세현이 어제 또 일을 좀 벌였습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레드카펫을 깔고 포토존을 설치했더군요.”

“…하?”

“그리고, 그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자길 장미꽃에 비유하더군요.”

“돌았나?”

부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팀장이 말을 뱉었다. 다른 때라면 침묵하고 말았겠지만, 조금 과한 표현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돈 건 아니에요. 꽃 자세히 보니까, 조금 닮긴 했더라고요.”

“얼마나 세뇔 받은 거야?”

내 말을 들은 팀장이 부팀장을 보며 묻는데, 평소완 달리 얼굴엔 당혹감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활 들으니 마치 김세현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물론, 특이한 편이긴 했으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마디 더 거들까 싶었지만 여기서 내가 또 말을 얹는다면 돌았다는 표현보다 더욱 격한 말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침묵하는데, 팀장이 나와 눈을 마주해 왔다.

“막내야.”

“네, 팀장님.”

“…….”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 하지만 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조심스럽게 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할 일 봐.”

“네.”

무슨 말을 하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계속 기다려 봤지만 팀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묘하게 착잡해 보이는 팀장을 보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부팀장을 바라봤다.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팀장님 마음 전 좀 이해가 되는군요.”

“그렇지? 하, 이게 바로 자기 새낄 결혼시키는 그런 기분인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갑자기 왜 결혼 이야기를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날 보며 말이다. 난데없는 단어에 아리송했지만 우선은 이제 곧 시작될 일과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나는 연신 팀장과 부팀장을 살피며 마저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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