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96)화 (196/246)

193화

23. 왜 제게 이러세요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 박동이 점차 속도를 올린다. 다른 때였다면 또 모를까, 이 순간만큼은 가쁘게 뛰는 심장이 내심 반가웠다. 피가 빨리 돌아서인지 몰라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멍했던 정신이 조금씩 깨어나는 기분이었으니까.

“…후우.”

도대체 김세현은 왜 이런 걸 준비한 걸까. 많이 양보해 건물 내 풍선들과 떨어진 꽃잎들, 건물 입구까지만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면 참고 넘어갔을 거다.

“이거 오래간만에 일을 벌인 거 보니 긴장되네요.”

“나도 그래.”

곁에서 함께 이동 중이던 박 주무관과 김 주무관이 소곤거린다. 하긴, 저런 말을 할 법도 했다. 최근엔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한때 김세현이 벌인 일들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그땔 생각하니 다시금 오늘은 제발 여기서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 따가운 시선들이 더 노골적으로 변하진 않을 터였다. 슬쩍 옆을 곁눈질하자 역시나 새로 온 팀원들이 날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데, 그 모습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저들의 반응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내가 집중할 건 따로 있었다. 도무지 어디까지 깔려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레드카펫을 걸어 사무실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돌았을 때였다. 눈앞에 흩날리는 무언가에 흠칫하다가 이내 그것이 붉은 꽃잎임을 인지하곤 그대로 멈춰 섰다.

이게, 대체 뭘까.

꽃잎들이 낙하하는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꽃잎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차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조차 감도 오지 않았다.

주차장 어딘가에 끝이 있을 거라 여겼던 레드카펫은 부팀장의 차까지 이어져 있었다. 더하여 휘날리는 꽃잎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양의 꽃잎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단 점 또한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팀장의 차 보닛에 걸터앉아서는 온갖 폼을 잡는 김세현의 외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나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게 만들었던 김세현은 오늘은 어디 권위 있는 시상식에 참석하는 탑배우라도 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썼다는 게 티가 났다. 머리도 넘기고, 오래간만에 안경도 착용한 채 검은 슈트를 쫙 빼입고 있었다. 심지어 한 손엔 커다란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어 더 화려해 보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외양에 한껏 힘을 주었을뿐더러 단조로운 검은 정장을 입었음에도 과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으니까.

그래, 저 말도 안 되는 것들 말이다.

“저기, 저거 잉여가 직접 설치한 거겠죠?”

“주차장에 저런 간이 벽이 있을 리 없잖아.”

“…진짜 나날이 새롭다, 새로워.”

나 역시 주무관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뽐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겠지만, 아무나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세현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주차장에 저리 가벽을 세워서는 알전구와 꽃, 그리고…. 그리고 알파벳 풍선으로 내 이름과 자기 이름을 떡하니 붙여 놓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이름 사이에 하트 모양의 반짝이는 풍선까지 붙인 채 말이다.

“분명 우리 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끝까지 모른 척하는 거 좀 보세요.”

“말 걸어 주길 기다리나 보지. 막내야, 말 걸지 말고 그냥 차 타고 가. 아니지, 괜히 가까이 갔다가 부정 탈지도 모르니 오늘은 내 차 타고 가자!”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한 주무관의 말에 솔깃한 건 저 모든 것이 과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이 나로 인해 비롯된 거로 생각하니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또 부끄럽기도 하고…. 하여튼 여태 느껴본 감정 가운데 역대급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폭이 너무 컸다.

“…….”

대화를 나누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제법 컸지만 김세현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그저 꽃다발을 보며 옆모습만 보여 주는 그를 바라볼 때였다. 한참 만에 그가 고갤 돌리며 정확히 날 바라보았다.

“형!”

표정 변화라곤 전혀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더니 이윽고 얼굴 가득 미소가 만개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그 변화가 크게 와닿는 건 김세현의 등 뒤로 보이는 가벽과 하트 풍선 때문일 거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배경과 김세현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중이었다. 부팀장의 차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김세현이 레드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끝난 거예요?”

“좀 적당히 하지 그래. 그러지 않아도 우리 막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인데.”

“하늘 형. 이거 받아요. 형 주려고 연락받자마자 서울 시내 돌아다니면서 상태 좋은 꽃만 선별해 만들었어요.”

말을 늘어놓은 김세현이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참고로 어디서 사 오거나 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꽃 주인한테 허락받고 내가 직접 따서 포장했으니까.”

직접 꽃을 따 왔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김세현과 꽃다발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그의 얼굴에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형 줄 건데 당연히 그만큼 정성 쏟아야죠.”

“…….”

“주차장에 저런 거 설치하면 주변이 피해 보는 거 몰라?”

“기왕 준비하는 거 형처럼 귀엽고 멋진 꽃을 찾고 싶었는데, 형 이미지에 맞는 꽃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하긴, 세상천지에 형을 담을 수 있는 꽃이 어디 있다고요. 어쩔 수 없이 날 닮은 꽃으로 준비했어요.”

“…하.”

“꽃 보면서 내 생각하라고 선별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좀 더 일찍 와서 형 일하는 거 지켜봤을 텐데. 그래도 뭐, 내일부터 옆에서 구경하면 되니까요.”

“누가 허락한대!”

“오래간만에 가는 거니까 하늘 형, 나 커피 많이 타 줄 거죠? 나도 형 커피, 는 너무 마시면 속 버릴 테니까 탈 때 정성껏 타 줄게요.”

지금 이 상황도 정말 오랜만에 맞닥뜨린다.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건 간에 그저 본인 할 말만 늘어놓기 바쁜 김세현을 말이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뭔가 묘하게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다 말고를 반복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거슬려 뚫어져라 김세현을 바라보는데, 순간 김세현이 혀로 아랫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어째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웃고는 있지만 평소보다 덜 올라간 입매도 그렇고, 부산스럽게 날 살피는 눈동자도 그렇고. 확실히 이전관 달랐다.

왜 이러는 걸까 싶어 좀 더 그를 살피려던 때였다. 이어진 그의 말에 의문은 바로 해소되었다.

“형, 나 내일 갈게요?”

평소와 달랐던 게 전부 이 말을 꺼내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눈치를 살피며 허락을 구하는 김세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막내야?”

“갑자기 왜 웃어?”

다들 의아해할 만도 했다. 앞뒤 내용을 모르는 이들은 김세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캐치하지 못했을 테고, 저 말에 담긴 뜻도 모를 테니까.

“하늘 혀엉.”

말끝을 축 늘리며 답을 요구하는 김세현을 보니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뿐이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응어리 중 하나가 살포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대답 없이 계속 웃는 내가 불안했는지 김세현이 애타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풉! 그래요. 내일 와요.”

“…정말이죠? 형, 일단 이거부터 받아요. 이거 내가 정말 나랑 닮은 꽃 열심히 골라서 가지고 온 거 맞아요.”

“그래요.”

본인 입으로 자길 닮은 꽃이라고 하며 장미꽃을 내미는 사람은 김세현밖에 없을 거다. 나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채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그, 고마워요.”

자길 닮은 꽃을 구했다는 말을 연이어 들어서일까, 탐스럽기만 한 장미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정말 김세현을 닮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묘한 몽글거림을 느끼며 향을 맡으려 고갤 숙일 때였다.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잡혔다.

차차차차차찰칵!

“…….”

도대체 언제 꺼낸 걸까.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연신 사진을 찍기 바쁜 김세현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언제 곁으로 왔는지 부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하늘 씨, 이제 가죠.”

그러고 보니 잠시 이곳에 다른 이들도 함께 있었단 걸 잊었다. 김세현을 보자마자 간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대로 자리를 뜨는 편이 나았다. 사실, 지금에서야 모두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단 걸 깨닫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단 표현이 더 맞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끄덕였다.

“네, 부팀장님.”

“…벌써 가려고요? 나 이제야 봤는데? 저기서 사진도 찍어야죠!”

이렇게 갈 줄은 몰랐는지 김세현이 황급히 날 붙잡았다. 다른 것도 아닌 이름과 하트 풍선을 붙여 놓은 가벽을 가리키며 말이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장소에서, 그것도 팀원 모두가 보고 있는데 사진을 찍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였다.

“그건 좀.”

“이건, 안 돼요?”

“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무리였다. 내게 확인 사살을 받은 김세현이 어깰 축 늘어뜨렸다. 시무룩한 모습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가벽을 가리켰다.

“세현 씨, 저거 치워야 할 거 같아요. 통행로를 막으면 곤란해요.”

“…알았어요. 바로 치우라고 할게요.”

“…….”

내 말을 들은 김세현의 눈매가 여지없이 아래로 축 처진다. 그래도 더 우기지 않고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연락하는데, 좀처럼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그가 연락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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