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23. 왜 제게 이러세요
하지만 사람의 바람은 대부분 어긋나기 마련이다.
다음 날, 부팀장과 함께 출근한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어제보다 더 심각해진 복도 상황에 말문을 잃었다.
“…….”
오늘 와 있는 물건들을 보니 어젠 양반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벽 쪽으로 가득 쌓인 물건들, 그리고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양쪽까지 점령한 것들을 보니 정말 막막했다.
어제야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정리할 수 있었지만 오늘까지 손을 빌릴 순 없었다. 그래, 어제와 같은 일은 어제 하루로 끝내야 마땅했다. 내 일과도, 다른 이들의 일과에도 이 이상 지장을 초래할 수 없기에 이것들은 짬이 나는 대로 하나씩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건이 많았지만 그래도 정리하다 보면 언젠간 다 정리할 수 있을….
“하아.”
이 상황에서 한숨이 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받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걸 왜 보내는지 모르겠다. 설령 내가 뇌물 받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직장으로 뇌물성 현물을 보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어젠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이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깨달으니 상황이 좀 이상하긴 했다. 김세현과 연을 트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치는 거라면 적어도 내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텐데, 저들은 내 눈칠 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내 의산 저들의 관심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하.”
만에 하나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팀장이 저 물건들을 향해 쓰레기라고 했는지 십 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물건들 전부가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는데 부팀장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일단 들어가죠.”
“네, 부팀장님.”
부팀장의 말마따나 여기 가만히 서 있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 짐을 푸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은 아니었는지 자꾸만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제도 말했듯 한동안 선물 공세가 이어질 겁니다.”
계속해서 숨을 뱉는데 부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심란한 마음을 붙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한숨만 내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웅크린 몸을 쭉 펴며 답했다.
“네, 마음 다잡을게요.”
“지금 당장은 부담스럽겠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면 저쪽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겁니다.”
확실히 시간이 흐르면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든지 하겠지만 내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헌터부 전체에 영향이 많이 갈 거 같아서요. 빨리 상황을 정리할 방법은 없을까요?”
부팀장의 말마따나 거듭해 거절하다 보면 나를 통해 김세현에게 접근하려던 계획을 접을 사람들이 늘어나긴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들이 포기할 때까지 이런 일을 계속 겪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나만 피해를 보는 거라면 감내할 수 있는 사안이나 사무실 전체에 누를 끼치는 일은 지속되면 좋지 않았다. 나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부팀장에게 속내를 얘기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다들 스트레스받을 거 같아서요.”
팀원들이 날 좋게 봐주고 있다곤 하나 폐를 끼치는 것도 정도껏이어야 했다. 이미 김세현이 사무실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이 이상은 민폐였다. 더군다나 새로 온 팀원들의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진 터라 눈치도 제법 보였고.
“그런 거라면 엘리베이터랑 건물 입구,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바로 열리면 보이는 곳에 물건 받지 않는다고 써 두면 되지 않을까?”
“…한 주무관님?”
난데없이 한 주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출입문 쪽으로 고갤 돌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데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한 주무관의 모습이 보였다. 출입문 앞에 선 그가 복도를 쓱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어제보다 훨씬 많이 왔네.”
등 뒤를 가리키는 한 주무관의 행동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돼.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다들 예상했으니까.”
내가 눈치를 본다는 걸 정확히 짚어낸 것도 대단했지만 이어진 말이 더 놀라웠다.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부팀장이 말을 보탰다.
“감안하고 있었으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불편하거나 번거롭다기보단….”
잠시 말을 멈춘 부팀장이 복도 쪽으로 시선을 옮기곤 말을 이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다들 오는 물건을 보며 스케일이 너무 작아 실망하고 있을 겁니다.”
“들었지? 그나저나 저 물건 보내는 사람들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겠네요. 줄 대보려는 잉여조차 우리 막내 눈치 보느라 바쁜데, 냅다 회사로 물건 보내고 말이야.”
다른 때 같았다면 김세현이 내 눈칠 본다는 말에 즉각 반응했겠지만, 그가 한 짓이 있기 때문인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진 않을까 싶어 눈치를 보는데 한 주무관의 시선은 부팀장에게 향해 있었다.
“부팀장님도 그날 보셨어야 했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사람을 패다가 막낼 발견하고 잉여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대놓고 눈치를 보더라니까요? 잉여가 밖에서 그러는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마지막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늘 씨가 말랑말랑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하, 그러긴 하죠. 햇병아리일 때도 있었는데, 이젠 제법 컸죠. 이젠 영계라고 불러야 하나?”
“영계는 좀….”
컸다는 말은 듣기 좋았지만, 영계 소린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대번에 거절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한 주무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이어 부팀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자리했다.
“한 주무관이 말한 것처럼 물건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적어 잘 보이는 곳에 붙이는 방안을 한번 검토해 보면 좋을 듯하군요. 더하여 멋대로 두고 간 물건들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겠다는 문구도 추가하면 좀 더 먹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괜찮은데요? 너도 괜찮지?”
“여건만 된다면 사무실 앞뿐만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안이랑 엘리베이터 문 열리면 보이는 벽에도 대문짝만 하게 붙이고 싶네요.”
지금 상황에선 한 주무관이 제안한 방법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였다. 오늘까지 도착한 것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경고문을 붙인 이후로 도착하는 건 따로 연락할 것 없이 바로 쓰레기통으로 보내면 될 테니까.
“아침부터 무슨 대화를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김 주무관 왔어?”
“오셨어요.”
“좋은 아침. 근데 뭘 벽에 붙인다는 건데?”
문을 열어 둬서일까, 역시 대화가 복도에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고갤 갸우뚱하며 답을 기다리는 이에게 나는 방금 전까지 나눈 내용을 함축해 전달했다.
“오, 그거 좋은데? 이야, 역시 한 주무관님이십니다!”
“그렇게 띄워 주면 뭐라도 나올 줄 알아? …뭐, 커피라도 타 줘?”
“좋죠!”
“하여간 절대 빼진 않지! 막내랑 부팀장님도 뭐 드시겠어요?”
김 주무관과 시선을 교환하며 웃던 한 주무관이 이쪽을 보며 물었다. 나는 부팀장에 이어 답했다.
“율무차 부탁합니다.”
“전 커피요.”
“좋아. 오늘은 진한 카페인으로 한번 시작해 보자고! 어제는 일이 너무 많아서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도 아까웠는데, 오늘은 카페인 흡수해서 더 힘내 봐야겠어.”
정수기로 향한 한 주무관이 말하는데, 어제 일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듯 보였다.
밖에 저 물건들만 아니라면 바로 일감을 나눠 달라고 했을 텐데 쉬이 돕고 싶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괜스레 문밖만 바라보는데, 김 주무관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일 너무 많으면 저희 나눠 주셔도 됩니다!”
“아서라. 나 도울 시간에 막내나 도와. 저거 다 처리하려면 골치 아플 거야.”
“많이 남은 거 아니면 같이 분담해서 일하고, 저것들은 빨리 해치우면 되죠. 그치, 막내야?”
그도 좋은 생각인 듯했다. 김 주무관의 말대로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감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
“그렇다면…. 좀 나눠 줄 테니까 우리 오전 내로 끝낼 수 있도록 분발해 보자!”
한 주무관이 다가와 커피를 건넸다. 나는 자리서 일어나 율무차도 함께 받아 부팀장에게 전달하곤 곧바로 커피 향을 맡았다.
“나 바로 파일 보낸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해. 바로 알려 줄 테니까.”
“네!”
자리로 돌아간 한 주무관이 바로 컴퓨터를 켠다. 덩달아 컴퓨터 전원을 켜 기다리니 파일 하나가 날아왔다. 곧바로 파일을 열어 살피곤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또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게 시야에 잡혔다. 눈을 들어 확인하자 새로 온 팀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마치 내가 먼저 말을 건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화들짝 놀란다. 이어 너무 격한 반응을 보인 게 민망했는지 두 사람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로 향했다. 내 쪽으론 절대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지 티를 팍팍 내며 말이다.
“…….”
그제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나 싶었는데, 오늘도 같은 태도인 걸 보면 그게 아닌 듯했다.
나는 빤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