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22. 약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김세현이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에게 연락해야만 이 상황이 종료됨을 의미했다. 이걸 알고 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김세현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정작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말이다.
“후우.”
어쩌면 생각하지 않으려는 게 이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닌지라 계속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더 늦지 않게 상황을 되짚어봐야 했다. 나는 곧바로 그날 일을 되돌아보았다.
“…….”
부팀장의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고, 얼마 가지 않아 부팀장이 날 부르며 빔프로젝터가 뭐냐 물었었다. 이후 난데없는 부팀장의 행동에 소파에 드러눕게 되었지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뜯겨 나가며 김세현이 모습을 보였지.
느닷없이 나타난 김세현도 강렬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빔프로젝터 안에서 카메라가 나왔던 순간이었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그때 느꼈던 서운함이 재차 밀려왔다. 하지만 마냥 서운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날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김세현의 표정과 반응이 떠올랐으니까.
“…….”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 생각하니 김세현이 그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뿐이랴, 차마 내게 닿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얼굴엔 당혹감과 더불어 후회가 어려 있었다.
“그렇게 후회할 거면 미리 말을 해 주지.”
언질을 줬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내가 이렇게 서운한 건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신고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임에도 마냥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도 신기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기분을 느끼나 싶어 팀원이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가정해봤지만, 서운하긴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
팀원들과 비교해서일까, 뜻하지 않게 김세현의 존재감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래, 은인이란 사실 말고도 김세현을 향한 호감이 제법 쌓였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커져 있을 거라곤 미처 몰랐다.
그날 일을 되짚으며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는데 막상 나온 결과가 이런 것일 줄이야.
“하아.”
어째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 이대로 가다간 청소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곧바로 거실로 나가 청소를 마저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청소하다 보니 어느새 거실 청소가 끝이 났다. 다른 날관 달리 유독 광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 거다. 여기저기 꼼꼼하게 닦고 또 닦았던 사실을 모른 체하며 뒷정리를 마친 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다시 리모컨을 쥐었다.
“…….”
조금 전까지도 서운함이 가득했고, 지금도 제법 여파가 남아 있었지만 TV를 보니 김세현이 나오는 곳이 있나 찾아보고 싶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마음에 헛웃음이 났지만, 내 손은 채널을 돌리기 바빴다. 마치 제2의 자아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들던 손이 멈춘 건 김세현의 모습이 화면에 비추고 나서였다.
“잘생기긴 했다.”
저 얼굴을 보니 어째서 손이 멋대로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만 덜 잘생겼다면 이렇게까지 그를 찾진 않았을 거다. 그래, 자꾸만 김세현의 모습을 쫓게 되는 건 빼어난 용모 탓이 컸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패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화면에 떠 있는 김세현의 사진, 그리고 영상만이 보일 뿐이었다. 눈으로 화면에 비추는 김세현의 모습을 쫓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그와 관련된 뉴스가 끝이 났다.
“아….”
그간 자주 봤기에 화면에서 사라졌다고 이렇게까지 아쉬워할 필욘 없었다. 더군다나 어젯밤에도 밤을 지새워 가며 방금 TV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 걸 보고 또 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관 달리 좀처럼 아쉬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채널을 돌려 봤지만, 이율배반적인 날 손가락질하려는지 김세현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결국 TV 전원을 끄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청소를 시작한 터라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법 허기가 느껴져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일단 간단히 허기를 채운 뒤 나중에 제대로 챙겨 먹자 정하곤 찬장에서 컵라면을 하나 꺼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컵라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흘러가는 게 괜히 아쉬웠다. 나는 방으로 가 핸드폰을 챙겨 와 괜스레 메시지 함을 뒤적였다.
“어디 연락할 곳도 없네.”
기석이 녀석이라도 핸드폰을 반입했다면 이럴 때 시시덕거리기라도 할 수 있었을 거다. 너무도 빈약한 연락처를 보며 한숨을 뱉는데, 자연스럽게 김세현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나 볼까?
그래, 이미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는 거라 내가 다시 확인하는지 김세현이 알 방법은 없으니 몰래 보는 걸 들킬 염려도 없었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뜯은 뒤 바로 메시지 함을 열어 훑어보았다.
김세현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 주고받은 양은 상당했다.
처음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것부터 차근차근 훑으며 컵라면을 먹다 보니 아직 내용을 다 보지도 못했는데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 먹고 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배를 채우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나중을 생각해 이 이상 뭔갈 먹는 건 좋지 않았다. 허한 느낌을 잊기 위해서라도 좀 더 집중해 메시지를 봐야겠단 결론을 내리곤 커피를 챙겨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
메시지를 보니 내가 보낸 메시지보단 김세현이 보낸 메시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가 하날 보낼 때 김세현이 보낸 메시지는 족히 스무 통은 됨 직했다. 새삼 김세현이 보낸 양이 상당하단 걸 느끼며 읽고 또 읽다 보니 드디어 가장 최근에 도착했던 김세현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형, 나 내일부터 일정 있어서 한동안 형 보고 싶어도 보러 가지 못한단 말이에요. 잠깐이라도 얼굴 보여 줘요. 창문만 열면 내가 알아서 볼게요.]
이걸 보면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진 먼저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세현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퍽 이상했지만, 다른 사람을 김세현의 자리에 대입해 본다면 이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연이 끊기다 못해 신고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을 벌였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아.”
한 번 더 타인과 김세현의 차이를 깨달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그도 그럴 만했다. 김세현에게 생각이 필요하다고 한 건 나 몰래 도청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지, 이렇게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커피부터 마시자.”
메시지를 보느라 언제부턴가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반 절가량 남은 커피로 손을 뻗었다.
드르륵- 드르륵-
잔을 쥐기 직전, 핸드폰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처음엔 메시지가 도착한 줄 알았는데, 계속 이어지는 걸 보니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혹시, 김세현인 걸까?
먼저 그가 연락을 취할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부풀어 오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괜스레 헛기침하며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떠 있자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쉬는데 전화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때마침 심심하던 참이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다른 게 아니고, 내일 사무실에 나올 수 있어?
“내일요?”
놀라 되묻자 팀장이 답했다.
-한 주무관이랑 서강민 씨한테 일이 생겨서 내일 출근이 어렵다고 하더라고. 김 주무관이랑 박 주무관은 혹시나 일 생기면 날 도와야 해서 말이야.
저 말을 들으니 어째서 출근 여부를 물어본 건지 알 듯했다. 일이 생기면 팀장과 두 주무관이 현장에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사무실이 공백 상태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번 주 함께 쉬게 된 부팀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네, 출근할게요.”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운전하실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막내가 뭘 모르네. 요즘 자율주행이 얼마나 잘되는데!
“아.”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러고 보니 강승빈도 혼자 출퇴근하던데, 역시 그게 큰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거절하지 않을게요.”
-그래, 내일 보자고!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멀거니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갑자기 출근하게 되긴 했지만, 오히려 출근하는 편이 나에겐 이로울 듯했다. 더군다나 팀장이 데리러 와 준다고 하니 오가는 길도 편할 터였다.
“…….”
팀장이 데리러 온다니 아직도 내 출퇴근길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어쩌면 난데없는 주말 출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보단 전자가 맞아 보였다.
조심하라던 팀원들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떠오르자 연이어 김세현이 빔프로젝터에 설치했던 그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집 주변에 설치되었던 카메라들 역시 생각났고.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팀원들도 그렇고 김세현도 그렇고 지나치게 경계하는 이유가 있단 건 분명했다.
“…….”
한둘도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게 뭘까.
아직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서 공통으로 말하는 걸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단 점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조심하자 다짐하며 남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