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22. 약점
“평소엔 물렁물렁해도 잘라 낼 땐 확실하게 잘라 내는 모습을 보고 한시름 덜었습니다.”
“저 그렇게 물렁물렁하지 않아요.”
단단하다고도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렁물렁하지도 않았다. 볼멘소리를 뱉자 부팀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예. 어제 보고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
내 말을 인정하긴 하는 듯한데, 저리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도 그럴 만도 했다. 옆에서 봐도 부팀장은 내가 귀엽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하늘 씨가 마냥 순해서 다 양보하거나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군요. 하늘 씨를 볼 때면 나이 차가 제법 나는 막냇동생이 생각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줘야만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흐뭇한 걸 보면 말입니다.”
“으음.”
막냇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니.
날 정말 가까이 생각하고 있단 것처럼 들리면서도 또 한편으론 내가 그렇게 철이 없었나 싶었다. 복잡한 마음에 미묘한 소리를 뱉자 잠시 내 얼굴을 확인한 부팀장이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뭐가 되었건 간에 하늘 씨를 보니 어제오늘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예.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좋군요.”
정말 기분이 좋은지 부팀장의 얼굴에서 좀처럼 웃음꽃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일까,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점차 고양되던 기분이 이윽고 웃음으로 변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부팀장 역시 재차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안은 채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박 주무관과 함께 서강민이 자릴 지키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가 짐을 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두 사람 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네요!”
서강민의 얼굴을 마주하며 조금은 진정되었나 싶었는데, 박 주무관이 보기엔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슬쩍 옆자리를 보자 부팀장 역시 날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가 잘게 휘어지는 두 눈을 보며 따라 웃고 말았다.
“…진짜 뭐 있나 본데요?”
“그런 게 있습니다.”
“맞아요. 그런 게 있어요.”
“와, 지금 두 사람만 통하는 그런 대화 나눈다는 거죠? 하, 이거 질투 나서 쓰겠나! 막내야, 나 조만간 너희 동네로 이사 갈까?”
“이사 가도 박 주무관이랑은 카풀 안 할 겁니다.”
환영한다며 농담으로 받아치려는데, 나보단 부팀장의 답변이 더 빨랐다.
“부팀장님, 너무하십니다!”
“풉!”
부팀장의 농담에 과장된 몸짓으로 너무하다 말하는 박 주무관을 보니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이내 박 주무관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 무슨 일 있습니까?”
때마침 출근한 김 주무관이 들어오다 말고 그대로 멈춰서서는 물어 왔다.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매일 이렇게 기분이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이 좋기 위해서는 열심히 직장 생활에 임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 이런 좋은 분위기가 생기길 기다리기보다는 만들어 함께하는 게 더 좋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들 웃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출입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김 주무관의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가 자리한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계속해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세계헌터협회가 D-15 구역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반향을 일으킨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실시간 검색어 순위 대부분을 세계헌터협회가 차지하고 있진 않을 것이었다.
“세계헌터협회, 한국 방문할 협회 명단, D-15구역 현황….”
막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 확인해서일까, 저 검색어 순위를 보니 막 다 먹은 점심이 소화되다 마는 기분이다. 나는 뚫어지라 순위를 보다가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부팀장과 함께 조만간 현장을 둘러보러 가기로 했었지. 하지만 부팀장은 전혀 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그렇다고 해서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팀장이 함께 가기로 했단 걸 잊을 리 없기에 아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가 현장에 가자고 할 것이었다.
그래, 기다리면 부팀장이 신호를 줄 테니 지금은 이것에 꽂혀 혼자 고민할 이윤 없었다. 나는 세계헌터협회를 검색해 올라온 뉴스를 살폈다.
“흠.”
라디오에서 들은 뉴스와 다른 내용이 있나 싶어 꼼꼼히 둘러봤지만, 아직 알려진 게 없었는지 세계헌터협회가 D-15 구역을 둘러보기 위해 온다는 공통적인 내용만 다루고 있었다. 그렇다고 뉴스를 살핀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세계헌터협회가 언제 세워졌는지, 그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의 정보는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새로 접하는 내용들을 보며 아침에 부팀장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한 번 더 곱씹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이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던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뒤집어놓은 핸드폰의 뒷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한 번 더 핸드폰이 진동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책상에 뒀기 때문일까, 어느새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단 사실을 깨닫곤 민망한 얼굴로 핸드폰을 쥐었다.
[형]
“…….”
역시, 김세현일 줄 알았다.
나는 핸드폰을 꼭 쥔 채 가만히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가 사라져서일까, 김세현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단 표시가 뜨더니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직도 생각 중이에요?]
[형 보고 싶은데, 생각 끝나기 전에 찾아가면 화낼 거 같아서 메시지 보내요.]
[찾아가는 거 부담스러우면, 형 자리 쪽 창문 활짝 열어 두기라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밖에서 형 볼 수 있는데.]
김세현의 문자가 평소와 달라 보이는 건 이모티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거다. 다른 때 같았다면 이모티콘으로 그의 기분이나 행동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막상 그게 없으니 왜 이리 허전한지 모르겠다.
멀리서라도 보고 싶단 말에 답장을 보낼까 싶었지만, 여기서 답장을 보내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닌 듯했다. 그래, 답장하게 된다면 제법 풀린 마음이 완전히 빗장이 풀려 그를 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뚫어져라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김세현이 계속해서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단 표시가 떴다.
[형, 나 내일부터 일정 있어서 한동안 형 보고 싶어도 보러 가지 못한단 말이에요. 잠깐이라도 보여 줘요. 창문만 열면 내가 알아서 볼게요.]
내일부터 일정이 있다, 라.
한국을 방문한다던 세계헌터협회가 생각나는 건 타이밍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거다. 아니라면 정말 그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것일지도 몰랐고. 아니, 그게 맞을 듯도 했다.
협회가 자신들의 얼굴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호주에 생성된 S급 던전을 처리한 김세현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팀장에게 양해를 구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환기하려고?”
“…겸사겸사요.”
점심을 먹고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단 게 다행히 제법 괜찮은 핑계가 되어 줬다. 팀장의 질문에 답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자, 부팀장이 날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
뚫어져라 날 보던 부팀장이 이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걸 보니 부팀장은 내가 어째서 창문을 열었는지 대강 파악한 듯했다.
“이렇게 여지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군요. 애간장을 태우기 충분합니다.”
“애간장, 이요?”
갑자기 애간장 이야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의아함에 되묻자, 부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애간장 말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애간장은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부팀장이 웃으며 말을 꺼내자 반응을 보인 건 박 주무관과 김 주무관이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데, 얼굴 가득 호기심이 넘쳐흐르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그런 게 있습니다.”
“와, 진짜 둘이서만 비밀 이야기하면 좋습니까?”
“나쁘진 않군요.”
“…막내야, 비밀 있으면 공유하자. 내가 특별히 사이트에 글은 안 올릴게!”
“하하.”
김 주무관의 투덜거림을 능숙하게 받아친 부팀장도 그렇고, 난데없이 사이트를 운운하며 비밀을 공유하잔 박 주무관도 그렇고 왜 이리 웃음이 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웃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자리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참을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