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22. 약점
“세현 씨.”
“네, 형.”
마치 부르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김세현이 답했다. 나는 숨을 고르곤 부팀장이 든 카메라를 가리켰다.
“내가 이걸 찾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어요?”
“그건….”
“난 세현 씨가 상황을 설명해 주며 저걸 집에 두고 싶다고 했다면 알았다고 했을 거예요. 밖에서 활동할 때도 더욱 몸을 사렸을 거고요.”
이유만 말해줬다면 다소 부담스럽다고 한들 상황이 여의찮다고 생각해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와 관련된 일인데 김세현 혼자 뭔갈 해 보려 했다는 건 그만큼 내게 신뢰가 없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
그래, 신뢰 말이다. 신뢰.
막상 김세현이 내게 신뢰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밀려드는 실망감과 허탈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마치 몸에 가득 찼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여과 없이 느끼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형이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거지, 형을 못 믿는다거나 해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세현이 당혹스러워하며 황급히 말을 뱉었다. 그러더니 성큼 거리를 좁혀 와 날 붙잡으려는 듯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내게 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공에서 그저 허우적거릴 뿐인 손을 보는데 점차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이 끓어올랐다.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나와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 결정 내리고 행동하고. 제법 가까워졌다고 여겼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싶기도 하고. 너무 서운해요.”
막상 감정을 토해내니 지금 느끼는 감정은 실망보단 서운함에 가까운 듯했다. 아니, 가까운 게 아니라 그냥 서운한 거였다. 카메라 설치 건도 서운했고, 지금 이렇게 터치하려다 마는 행동도 너무 서운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확실하게 인지하자 괜히 서러움이 북받쳤다. 시선을 내리깔며 감정을 다스리는데, 불쑥 시야에 김세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형, 내가 말했어야 했는데,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네?”
“…….”
“진짜 형이 불편할까 봐 그랬던 거예요. 사실, 아주 조금은 흑심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흑심 채우려고 몰래 듣는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진짜 이건 형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어째서 날 걸고 맹세를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무시할 건 이미 다 해놓고 말이다. 한껏 몸을 낮춘 채 날 올려다보는 김세현과 눈이 마주치자 다잡던 마음이 흐트러졌다. 결국 서러움과 섭섭한 감정을 내보이며 김세현을 보니 그가 이내 무언갈 다짐한 듯 입을 뗐다.
“부족해요? 그럼…. 그렇다면 내 전 재산 걸게요! 이러면 믿겠어요?”
“……”
다른 것도 아니고 전 재산을 걸겠다니.
돈벌레란 별명이 따라다니는 김세현이 자기 재산을 운운했다는 건 정말 내가 불편할까 봐 몰래 설치했다는 뜻과도 같았다. 순간 치솟았던 감정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절로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차올랐다.
“하아.”
“형이 서운해할 줄은 몰랐어요.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서. 그러니까 형, 다음엔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할게요.”
내가 한숨을 뱉자마자 작심한 듯 말을 쏟아내기 바쁜 김세현을 보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내가 밀어내면 어쩌나 전전긍긍해하고, 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데, 마치 실수한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을 어린아이에게 대입하는 게 맞나 싶지만 말이다. 나는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은 돌아가 주세요.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얼마나 시간 필요한데요?”
“몰라요.”
이 충격을 언제쯤 벗어나게 될진 모를 일이었다. 충격을 다 벗어나고 연락할지, 아니면 그 전에 할지도 몰랐고.
“그럼 연락 안 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하자 김세현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가는 김세현을 지켜볼 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부팀장이 개입했다.
“하늘 씨 말대로 하지. 그리고 바로 문 수리업자 불러. 이렇게 뻥 뚫린 위험한 곳에서 하늘 씨 지내게 하진 않겠지?”
“말 안 해도 부를 생각이었어! 형, 내가 바로 사람 부를게요!”
부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세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부팀장이 날 불렀다.
“하늘 씨.”
“네, 부팀장님.”
“일단 짐부터 챙기죠. 한동안 우리 집에 머무르며 출퇴근합시다.”
“…네?”
“안 돼!”
부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난 김세현이 날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날 가리듯 서는데, 마치 부팀장에게서 날 보호하려는 모습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김세현의 태도에 놀라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가 집 현관문을 뜯어 버린 바람에 벌어진 일인데, 내가 파렴치한이라도 된 듯한 상황이군.”
“아까 하늘 형한테 수작 부리려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네 집보단 여기가 더 안전해!”
“속이 시커먼 네놈이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일 줄 알았지만, 정말 저질이군.”
“형, 내가 이번 기회에 보안 확실한 걸로 바꿀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꼭 집에 머물러야 해요, 알겠죠?”
몸을 틀어 내게 말한 김세현이 다시 또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몸을 옆으로 튼 김세현 너머로 시선을 주자 부팀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내가 부팀장이었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었다.
“문 수리하는 사람 올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여긴 내가 있으면 되니 김세현 씨는 이만 가지?”
“뭘 믿고 가라 마라야. 형이 불편하면…. 집 밖에라도 있을게요.”
부팀장의 말에 반박하던 김세현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 행동은 아마 내 마음을 자극해 안에서 기다리란 말을 듣고자 취하는 액션일 듯했다. 다른 때였다면 통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텀을 뒀다가 답변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실래요?”
“…네?”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아주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듯했지만, 실망하고 서운해한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벌써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흐지부지하게 넘어갔다간 다음에 또 이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나는 충격으로 휩싸인 푸른 눈동자를 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도 생각 정리 중이라서요.”
“…….”
“그게 불편하면, 집에 가셔도 되고요. 수리하는 건 저 혼자 봐도 돼요.”
“전 여기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팀장이 소파로 가 자릴 잡고 앉았다. 그런 부팀장을 바라보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부팀장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런 부팀장과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는데 잔뜩 기가 죽은 김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다른 때처럼 원하는 답을 얻으려 계속 말을 건다거나 하지 않는 건 아마 내 강경한 태도 때문인 듯했다. 한층 더 침울해진 얼굴로 답하는 김세현을 보며 짤막하게 답했다.
“네.”
“…그럼 나갈게요.”
“네.”
“진짜, 나가요.”
“네.”
“…….”
몇 번이고 거듭해 나간다는 말만 할 뿐, 움직이지 않던 김세현이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런 김세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뜯어진 현관문 앞에 당도한 김세현이 난데없이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에 눈이 커졌다.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매달려 있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문을 뜯어내는 행동에 놀랐지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던 건 한 손으로 그것을 뜯어냈단 점이었다. 이미 뜯어진 문짝이라고 한들 티슈 한 장 뽑듯 가볍게 뜯어내다 못해 그걸 한 손으로 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세현이 쥐고 있던 문짝을 옆으로 던지려고 시늉하다 멈추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주저앉아 이쪽, 그러니까 집 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
날이 어두워진 터라 밖이 어두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단 걸 말이다.
김세현의 눈이 있음직한 곳을 빤히 바라볼 때였다. 부팀장이 날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선, 문 수리는 둘째치더라도 바닥부터 정리해야겠군요.”
“바닥, 아….”
어째서 바닥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확인하니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
하긴, 현관문까지 뜯어 안으로 들어온 걸 보면 신을 벗고 들어올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거실 바닥에 찍힌 흙 자국들을 보며 곧바로 뒷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