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22. 약점
전날 팀장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나와 부팀장, 그리고 강승빈만이 오전 근무를 하게 된 상황이었다.
“하늘 씨, 협조금 체크 끝났습니까?”
“네.”
새벽에 팀장이 메시지로 현장에서 협조한 협회 소속 헌터의 등급과 수를 전달한 터라 무리 없이 체크를 마친 상황이었다.
“한 번 더 체크 후 제게 주십시오. 확인 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팀장님.”
한 번 더 체크를 해 준다면야 나야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놓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몇 번을 거듭해 확인 후 파일을 전달하자 부팀장이 내용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보내겠습니다.”
“네.”
“그리고 어제 현장에 나갔던 이들이 처리하던 업무가 있는데, 아무래도 오후에 출근해 처리하다 보면 야근하게 될 듯하여 단순 작업 쪽을 분담하려고 합니다.”
“맡겨만 주세요.”
“그리고 강승빈 씨에게도 파일 보낼 테니 작업해 올리세요. 체크만 하면 되는 일이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강승빈에게도 일감이 주어지는 걸 보면 마냥 않아 허송세월하는 이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현재 김 주무관이 교육을 진행 중이었지만 단순 작업을 하는 정도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강승빈도 파일을 받았는지 모니터를 보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따라 나도 부팀장이 작업물을 살펴보았다.
“…….”
단순 작업 분량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작업량이 상당했다. 어제도 외근했는데, 오늘 출근하고 이렇게 많은 양을 처리하게 된다면 티 내지 않아도 무척 버거울 것이었다. 되도록 팀원들의 짐을 덜어주고 싶단 생각에 더욱 열심히 작업을 이어 갈 즈음이었다. 문득 들려온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김세현이 들어오고 있었다.
“좋은 오전이에요, 형.”
“네.”
“근데, 좀 허전하네요?”
사무실을 둘러본 김세현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던전이 생성되었을 때를 제외하곤 이렇게까지 자리가 비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어제 현장에 나갔던 분들은 오후 출근이에요.”
“그래요?”
“커피 타다 드릴까요?”
“됐어요. 나중에 마시고 싶을 때 알아서 먹으면 돼요. 아, 형이 커피 마시고 싶은 거예요? 그런 거라면 형 거 타는 김에 내 것도 타서 오면 되고요.”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되었지만, 커피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당겼다.
“음, 한 잔 부탁드려요.”
“좋아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세현이 일어나 정수기 쪽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보다가 부팀장에게 물어보았다.
“아, 부팀장님. 차 한 잔 드시겠어요?”
나야 김세현이 타 준다지만 팀원들 몫까지 그에게 부탁할 순 없었다.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부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강승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승빈 씨도 드시겠어요?”
“율무차로 부탁합니다.”
마치 물어봐 주길 바란 듯 즉시 강승빈이 답해 왔다. 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김세현 곁으로 가니 어느새 그는 커피 물을 받고 있었다.
“나는 가서 커피 마시고 있을게요.”
“좋아요.”
아무래도 자리로 가는 길이 협소해 먼저 가려는 모양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김세현이 씩 웃으며 마저 커피를 타더니 쟁반을 들고 먼저 자리를 떴다. 빠르게 두 사람 몫의 율무차를 만든 뒤 강승빈에게 전달하고 이어 자리로 와 부팀장에게 남은 잔을 전달했다.
“항상 고마워요, 하늘 씨.”
“뭘요.”
이 정도는 부팀장에게 받는 친절과 비교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대답을 들은 부팀장이 웃자 따라 웃으며 이번엔 김세현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형 거요.”
“잘 마실게요.”
기다리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김세현이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몇 차례 향을 맡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죠?”
“네.”
믹스커피 맛이야 거기서 거기라고는 하지만 김세현이 타 줘서 그런지 몰라도 참 맛이 좋았다.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마저 작업하던 파일에 시선을 주었다.
“형.”
“네, 세현 씨.”
“일이 많으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긴요. 뭔가 한 사람분을 해내는 거 같아서 뿌듯하죠.”
일이 많을수록 쉴 시간이 없어졌지만, 뭔갈 하고 있단 사실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멍하니 날 응시한다. 마치 이게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 눈에 밟혔지만 정말 힘든 건 없었다.
“하늘 씨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김세현 쪽으로 몸을 틀고 있어서일까, 뒤에서 부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가득 웃음기가 묻어나는 것이 아무래도 방금 전 말을 듣고 웃음이 터진 듯했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틀자 역시나 그가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일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어느새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부팀장과 시선을 교환할 때였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이제 나는 뒷전인 거예요?”
“전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을 뒷전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팀장과 한 번 더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김세현을 보자 그의 표정은 목소리만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면 갈수록 방치당하는 기분인데요.”
“방치는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불만을 드러내야만 관심 주고 말이에요.”
평소와 같은 투덜거림이었지만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걸 보는 건 새로웠다. 나보다 훨씬 커다란 사람이 불만을 토로한답시고 저러고 있으니 무척 귀엽기도 했고.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은 바라보자 심통으로 가득 찼던 표정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김세현이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 형 앞에서는 화도 못 내겠어요.”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협조금 받아야겠네요.”
“어쩔 수 없다뇨. 당연히 받아야 할 금액인데요.”
한때 S급 헌터의 협조금이 상상을 초월해 놀랐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던전이 남기는 상흔을 생각해보면 그가 그 정도 금액을 받는 건 오히려 적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요?”
“네.”
“뭐,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정말이에요. 세현 씨가 없었다면 피해가 더 컸을 거예요. 일찍 와줘서 이 정도 선에서 그칠 수 있었고요.”
김세현이 예상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해 줘서 피해가 줄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 번 더 강조하자 가만히 날 바라보던 김세현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어 앉았다.
“하긴, 내가 좀 대단하긴 하죠.”
“맞아요.”
“한 번 던전 클리어하면 협조금도 제법 많이 받고, 그쵸?”
“물론이죠.”
저런 거들먹도 어울리는 건 실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맞장구를 치니 김세현의 기분이 점차 상승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속으로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잠시 천장을 보며 고개를 젓던 그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
다른 때 같았다면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물어봤을 거다. 하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쉬이 꺼낼 말이 아닌 듯했다. 입술만 달싹이길 여러 차례.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돈도 잘 벌겠다, 얼굴도 이만하면 되겠다. 형이 보기에도 나 정도면 뭐든 믿고 맡길 수 있겠죠?”
너무도 뜬금없는 조합이라 당황했지만, 저 말을 하는 김세현의 으스댐이 너무도 귀여웠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인데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예상보다 빠른 답변이었던 걸까, 김세현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현 씬 맡은 바 일을 확실하게 끝맺잖아요. 당연히 믿고 맡길 수 있죠.”
“…….”
“저 말고도 세현 씨라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믿을 거예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왜 저리 멍하니 날 보는지 모르겠다. 다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입을 뗄 때였다.
“하늘 씨, 알아들었을 테니…. 큼, 큼! 마저 하던 일 하도록 해요.”
웃음을 참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부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지금은 이렇게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팀원들의 일감을 덜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으니까.
“네, 부팀장님.”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을 터뜨린 이유가 궁금했지만, 나중에 물어볼 시간은 많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김세현을 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웃어 보이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은 커피를 비운 뒤 마저 작업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어 나가려 했다.
“…….”
다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려는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강승빈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자 역시나 그가 날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가 웃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이전에 보았던 미소만큼은 아니었지만 영 마음이 쓰였다. 저 또한 나중에 물어보자 다짐하며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