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21. 재회
새로운 팀원들이 온 날은 뜻하지 않게 부시장과 이영진 의원이 함께 한 바람에 다소 어지러웠지만 그것 말고는 대체로 무난히 지나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숨이 나는 건 이유가 있었다. 김 주무관과 한 주무관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꾸만 내 쪽을 바라보는 두 시선 때문이었다. 처음엔 모르는 체했지만, 고개만 들면 그들을 볼 수 있기에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기력이 소진되었다.
이제야 갓 월요일 근무를 마쳤는데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씻고 나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휴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기운이 차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누워서 잘까? 그래, 가끔 소파에서 자기도 하니 문제 될 건 없었….
“그래도 옷은 입어야지.”
그래, 옷은 입고 자야 했다. 허리춤에 대충 감아둔 수건을 보며 크게 한숨을 뱉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으!”
씻고 나와 나른하게 소파에 좀 앉아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몸이 늘어질 줄은 몰랐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고는 방으로 가 옷을 입곤 그대로 침대로 몸을 던졌다.
“…내일은 어쩌지.”
오늘은 어찌어찌 지나갔다고는 하나 내일이 되면 다시 시선이 따라붙을 터였다. 눈인사 정도만 한 상황도 이렇게 피곤한데, 시간이 흘러 여유로워지면 얼마나 더 피곤해질까.
“하아.”
입을 여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스트레스 속에 허우적거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땐 사고방식을 조금 달리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 후 중얼거렸다.
“그냥 내 쪽에 있는 뭔가를 보는 거겠지.”
내 책상 뒤론 서류로 가득한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을 보는 건데, 내가 너무 의식한 나머지 착각하는 것일지도….
“…….”
책장을 보는 거라 자기암시라도 해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생각하면 할수록 서강민과 강은빈이 보내던 시선이 또렷이 생각났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데, 어찌 된 게 더 스트레스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단을 찾아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재차 너무 의식해 이러는 거라 여기는 것도 무리였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저렇게 생각해봐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앞으로 봐야 하는 얼굴들인데, 단 하루 같이 있었다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문제였고.
“일단 자자.”
그래, 지금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가 굳었을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제법 개운해질 테니 뭔가 괜찮은 수가 떠오를지도 몰랐다.
대자로 눕기 전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제법 이른 시각에 누웠단 걸 알 수 있었다. 체감상 10시는 족히 지났을 것 같았는데, 9시도 되지 않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신체 시각까지 이렇게 틀어질 수 있는 걸까.
“하아.”
너무 일찍 누워서인지 잠이 오진 않았지만 머리를 식히려면 쉬어야 했다. 최대한 서강민과 강승빈과 관련된 생각을 무시하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자연스럽게 오늘 낮에 잠깐 만났던 김세현의 모습이 떠오르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
원래도 잘생겼지만, 매번 사람을 홀리는 것도 대단했다. 웬만한 연예인들도 이렇게 사람을 홀릴 순 없을 것이었다. 차라리 나만 홀린 것이었다면 내 눈에만 예쁘다고 여기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공개된 이후로 김세현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이들을 홀리기에 나 또한 홀리는 게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오늘 그를 보며 느낀 감정은 다른 날관 좀 달랐다.
“…….”
이렇게 남다른 느낌을 받게 된 건 생각지도 못한 포옹 탓이 컸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 생각하기엔 김세현이 날 안는 느낌이 좀 달랐다. 반가운 인사라고 넘기려 해도 그게 좀처럼 되지 않았다.
설마, 김세현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까?
“에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김세현이 날 대하던 모습을 보면 그저 친한 형을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친하게 여기기에 오늘과 같은 포옹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상 날 친한 형으로 생각해 그런 거라고 매듭지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 말곤 딱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직접 물어볼…. 아니야, 그건 아니지.”
직접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게 된다면 상당한 파장이 남게 될 터였다. 자칫 잘못 입을 놀렸다가 내가 그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질지 몰랐고, 그로 인해 김세현이 날 친한 형으로 대하던 태도 또한 변할 수도 있었다.
이런 착각이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한 번 부딪혀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게 이번은 아니었다.
“후우.”
입을 여니 이번에도 역시나 깊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어째 스트레스를 피하려 다른 생각을 하려다 보니 또 다른 신경 쓸 거리가 튀어나온 것 같다. 정신은 더더욱 또렷해졌고 말이다. 그래도 김세현을 떠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피로로 인해 눈꺼풀이 좀 무거웠는데, 지금은 아예 그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점도 있긴 했다. 서강민과 강은빈의 시선이 완전히 묻혀버렸으니까. 덕분에 스트레스도 반감되어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계속해서 김세현이 날 안았는지에 관한 생각을 이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잠을 못 잤습니까?”
“네, 잠이 안 와서요.”
차에 오르기 무섭게 부팀장이 잠을 못 잤냐 묻는 것이 오늘도 역시나 꼴이 말이 아닌 듯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벨트를 매는데, 지금쯤 출발했어야 하는 차가 계속해서 정차해 있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드니 부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어제 서강민과 강은빈이 보내던 시선 때문에 피곤했던 겁니까?”
“어, 부팀장님도 느끼셨어요?”
“대놓고 보는데, 모른 척하는 게 더 힘들 겁니다.”
“하하.”
중간중간 날 바라본 줄 알았는데, 대놓고 봤을 줄이야. 내가 시선이 느껴질 때만 확인해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부팀장이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감정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끼거나 하는 건 없고요?”
“네. 그런 건 없어요.”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면 언제든 말해요. 유력한 용의자인 서강민이 온 터라 다들 경계하고 있으니까.”
그저 평범하게 일과를 보내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고마움이 차올라 바로 마음을 전달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하늘 씨도 우리에게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신경 쓸 겁니다. 가족같은 팀원이잖아요.”
“네. 가족과도 같은 팀원이죠.”
부팀장의 말을 들으니 정말 이보다 더 기운이 날 수가 없었다. 씩 웃으며 말하자 부팀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차가 출발하자,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강은빈 씨가 어째서 다쳤는지 아세요?”
왼쪽 팔다리가 고정된 채 불편한 모습으로 온종일 자리에서 교육받고, 또 날 바라보던 그를 떠올리고 있자니 침묵하던 부팀장이 말을 꺼냈다.
“팀장님이 물어봤는데, 접촉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접촉 사고인데 그 정도 다쳤으면 제법 큰 사고였겠네요.”
“예. 차도 폐차했다고 하더군요. 그가 헌터가 아니었다면 목숨도 위험했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만 다쳐서 다행이네요.”
강은빈이란 사람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차를 폐차했단 말에 순간 철렁했던 심장을 다독이는데, 부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김세현은 온답니까?”
“아뇨. 한동안 오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요?”
그러냐고 말하는 부팀장의 표정이 묘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긴 좀 그랬다.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차 안에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고요함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라디오를 켰다.
“…….”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어제 서울시 헌터부 인원이 증원되었음을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여 우려의 뉴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뉴스는 무척 우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뉴스처럼 부서 증원 효과가 나야 할 텐데 말이죠.”
핸들을 돌리며 부팀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날 거예요. 팀원들이 있으니까요.”
팀원들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또 모를까, 헌터부 소속 팀원들은 모두가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 맞습니다. 다들 각자 자리에서 힘내고 있으니 문제없이 흘러갈 겁니다.”
내 대답을 들은 부팀장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웃음을 흘린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봐서일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따라 웃으며 이어지는 라디오 뉴스를 계속해서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