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20. 폭풍전야
어제 하루로 인사이동 건이 해결될 줄 알았던 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오늘은 아예 시청으로 출근한 팀장이었다. 그간 조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한 이후 움직였기에 바로 시청으로 갔다는 건 그만큼 일이 풀리지 않고 있음을 의미했다.
“막내야, 이거.”
말없이 팀장의 빈자리를 바라보는데, 박 주무관이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응. 그리고….”
다른 날과는 달리 망설이는 것이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거.”
박 주무관이 내민 건 다른 손에 들린 커피잔이었다. 놀라 그를 바라보니 시선이 마주친 박주무관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잉여 것도 전해 줘. 뜻하지 않게 빵 얻어먹었으니 한 잔 정도는 타 줄 수 있지.”
그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그냥 건네긴 민망했는지 내민 잔을 어서 받으라 손을 흔든다. 손의 움직임과는 달리 딴청을 피우기 바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네, 전달할게요.”
직접 건네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간 서로 뭔갈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지금 이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커피를 건네받자 힐끔 김세현에게 시선을 주는가 싶던 박 주무관이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전달하려던 걸 잘 전달했기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환해진 얼굴이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잘 알려주는 듯했다. 잠시 그런 박 주무관을 보다가 김세현이 앉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 커피 드세요.”
“…….”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얼굴로 내민 잔을 보던 김세현이 그것을 받는다. 다른 때 같았다면 잘 마실게요와 같은 말을 했을 텐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그 역시 커피를 받을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말랑해진 사무실 분위기가 좋은데, 뭔가 좀 낯설었다. 알 수 없는 간질거림에 손가락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 한 주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흠! 그건 그렇고, 팀장님은 오늘 사무실로 올 수 있긴 한 겁니까?”
한 주무관이 꺼낸 말은 말랑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잠시 뒤로 밀려났던 팀장의 부재가 다시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부팀장에게 시선이 갔다.
“저도 기다리란 말밖에 듣지 못한 상황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나도 부팀장에겐 따로 언질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말이 오가고 있기에 팀장이 그저 기다리란 말만 할 뿐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하지 않는 걸까.
“부서 인원 충원하는 게 이렇게 시간이 걸릴 필요가 있을까요? 위에서 발표한 만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워 버릴 것 같은데 말이죠.”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한 상태니까 어쩔 수 없지. 우리 팀장님이 그런 쪽으론 허투루 결정하진 않으니까.”
“한 주무관의 말이 맞습니다. 계약직 헌터를 정규직으로 돌린다는 것이 보이긴 쉬워 보이겠지만, 신경 쓸 게 많습니다. 특히 시청의 입김이 제법 들어갈 테니 중간에서 잘 조율해야만 할 테고요. 아마 중간 조율 과정에서 시간이 길어지는 듯하군요.”
“그러고 보니 새로 충원되는 헌터들이 갑자기 이탈하게 될 시의 상황도 염두에 둬야겠네요.”
“…….”
이탈 이야기가 나오는 건 예의 그 사람 때문일 거다. 협회와 정부를 오갔다던 서강민의 얼굴이 떠오르자 절로 구겨지려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물론 그간 서강민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행동을 하긴 했다.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떠올리며 나까지 그런다는 건 어쩐지 너무 야박한 것 같았다.
과거 김세현이 집과 동네를 지켜 준 것만으로도 여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지내는데, 목숨을 구해 준 서강민에게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지금조차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것이 너무 놀라 그런 거라고 치부하려 해도 도가 지나쳤고 말이다.
아직 이와 관련해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전에 나눴던 이야기처럼 누군가가 그쪽 부분을 누군가가 컨트롤한 것이라면….
“하아.”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골치가 아팠다.
만에 하나 정말 통제한 것이라면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내가 중요직에 한 자리 꿰고 있다거나 하는 사람이었다면 수작을 부릴 만한 타당한 이유라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위치의 사람이 아닌, 헌터부 소속 말단 공무원일 뿐이었다.
“……”
잠시 생각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러웠다. 잔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김세현 쪽으로 눈길을 주니 그가 뚫어져라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그냥요.”
질문하기 무섭게 씩 웃으며 고개를 저은 김세현이 조금 전 건네받은 커피를 마신다. 정말 별 일 아니었는지 커피를 마시는 데 집중한 걸 보니 내가 걱정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나는 얼굴을 만지려다 말고 김세현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박 주무관이 건넨 커피를 마실 때마다 표정이 풀리는 걸 보니 커피 맛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한껏 누그러진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팀원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서강민이 박쥐 같은 놈만 아니었어도 제법 쓸 만한 인재인데 말이죠.”
“S급 헌터만큼은 아니더라도 A급 헌터 역시 협회에서 모셔 가려고 하니까요. 듣자 하니 서강민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몸값 제법 올렸다던데요?”
“혹시 서강민을 놓고 왈가왈부 중이라면 팀장님이 딜레마에 빠진 건 아닐지 걱정되는군요. 쓰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그러니 말입니다.”
“…뭐가 되었건 간에 헌터부가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데 말이죠.”
한 주무관의 말처럼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별안간 한 주무관이 날 바라보았다.
“아직도 서강민 생각하면 좀 그래?”
방금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해서일까, 그 어느 때보다 깜짝 놀랐다. 파닥거리는 몸을 다독이곤 입을 열었다.
“네. 교통사고 당시 상황도 그렇고, 서강민 씨 관련해서도 그렇고 이전과 같아요.”
“…정신계 공격이라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풀리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등급 높은 이가 암시를 건 게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도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군요.”
“…여태 알아보고 계셨던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부팀장의 고백 아닌 고백에 놀라 그쪽을 보니 부팀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팀 일인데 신경 쓰는 게 당연합니다.”
“…….”
이럴 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잘 챙겨 주고 있었고 또 생각한다 느끼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나에게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가슴 가득 알 수 없는 벅참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입을 떼면 한껏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아 그저 입만 벙긋하는데, 그런 날 보며 팀원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우리 막내 이런 거에 감동해서 어쩐답니까?”
“팀원 모두가 신경 쓰고 있다는 말 들으면 곧 울겠는데요?”
박 주무관이 웃으며 꺼낸 말에 놀라 주변을 살피니 그들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삼키며 방금 박 주무관이 한 말에 관해 되물었다.
“정말, 계속 알아보고 계신 거예요?”
“당연하지. 우리 막내 일인데.”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감사하단 말 말고 더 큰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이걸 표현할 만한 대체재는 없었다. 그간 나도 잊고 지냈던 부분을 신경 써주고 있었다니. 가족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진 못할 터였다.
좀처럼 감동의 해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불쑥 김세현이 끼어들었다.
“형, 나도 신경 많이 쓰고 있는데.”
“당연히 세현 씨에게도 고맙죠.”
“얼마나요?”
“그게….”
고마운 마음은 감히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감함에 눈을 굴리는데, 김세현은 오히려 더욱 거리를 좁혀왔다.
“내가 더 고맙죠?”
“와.”
“몇 살이야?”
“…….”
김세현과 관련한 팀원들의 평가에 동조하고 싶진 않았지만, 저 말은 팀원들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 상황을 볼 수 없어서 발 동동 구르는 거 직접 가서 실시간으로 영상 통화도 했는데.”
“그건.”
“간 김에 빵도 사 오고 길 막는 것들도 처리하고.”
팀원들의 반응은 보이지도 않는지 김세현은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여기서 답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꺼낼 것 같단 예감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세현 씨가 더 고맙죠.”
“그럴 줄 알았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세등등해진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는다. 그 모습을 보다가 맞은편 자리의 한 주무관을 보니 그 또한 어이없는 표정으로 김세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팀장님이 자리 비우신 만큼 열심히 하죠.”
“예!”
“네!”
잠시의 대화 시간이 끝난 듯 부팀장이 상황을 일깨운다. 팀원들과 함께 답하며 모니터를 보는데, 괜히 옆자리가 신경 쓰였다. 힐끗 김세현을 확인하니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일해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요.”
어제도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며 김세현은 자기 일하기 바빴었다. 사진을 찍는, 그런 일 말이다. 오늘도 핸드폰을 꺼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옆자리를 경계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셔터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
셔터 소리가 들려도 신경 쓰이고, 들리지 않아도 신경 쓰인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욱 옆자리로 신경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문서 작업을 하기 전 한 번 더 곁눈질했지만, 김세현은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저 모습을 보니 괜히 나 혼자만 의식하는 기분이다. 밀려드는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다시 모니터를 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일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은 김세현을 신경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마저 할 일을 처리하고 한 주무관의 일을 도와 지도 작업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하잔 말을 되뇌며 서류 작업을 해나가던 무렵이었다. 부팀장 자리의 전화가 울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