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20. 폭풍전야
“왜 그렇게 봐요?”
“…그냥요.”
조금 전까지 날을 세웠던 이는 어디로 갔는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로도 김세현을 위로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걱정을 담아 그를 보자 김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더 걱정돼요.”
그래, 얼마나 당했기에 그런 심각한 일에도 저리 흔들림 하나 없이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다.
“…….”
도대체 협회는 뭐 하는 집단일까.
헌터들의 복지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설립된 것관 달리 그들의 활동은 소속 헌터들에게 이롭지 않아 보였다. 그래, 항상 돈만 밝히고 뒤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이건 누가 봐도 본인들의 이익을 사수하고자 활동하는 집단이었다.
무슨 말을 할 법도 한데, 김세현은 침묵할 뿐이었다. 나 또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걱정해 주니까 마음이 좀 아린 거 같기도 하네요.”
“그럴 만도 하죠.”
협회와 김세현의 관계가 나와 팀원들처럼 돈독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몸담은 곳에서 그런 수작을 부린 걸 알게 되었다면 그보다 더한 충격은 없을 터였다.
“내가 자꾸 여기 오는 이유, 형도 이젠 알겠죠?”
“네.”
그런 곳에 자꾸 발길 해야 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집에 찾아온 알 수 없는 남자도 그렇고, 협회에서도 김세현을 가만두지 않는 상황이라니. 나였다면 진즉에 이 나라를 떴을지도 모를 만큼 발을 내딛는 곳마다 가시밭이었다.
안쓰러운 와중에도 김세현이 이곳을 도피처로 삼아 오고 있단 사실이 제법 좋다 느껴지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지금은 김세현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게 우선이었다.
“혼자만 너무 끙끙 앓지 말아요.”
“하늘 형.”
내 말에 김세현의 얼굴 위로 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너무 많은 감정이 지나갔지만,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짙은 피로함이었다.
“형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줘서 다행이….”
“김세현 씨.”
아차.
일하는 와중에 너무 많은 잡담을 했나 보다. 부팀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하며 돌아보니 그의 시선이 김세현을 향해 있었다.
“불쌍한 척은 그만하죠. 티 납니다.”
불, 쌍한 척?
“쳇.”
부팀장의 말에 놀라는데, 김세현의 반응은 더더욱 놀라웠다. 혀를 차는 소리에 그를 보니 조금 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간, 형이 있어 다행이라고요.”
“…그래요.”
“이제 정말 방해 안 할 테니까 형은 형 할 일 해요. 나는 내가 할 일 할 테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방문으로 말미암아 잠시 흐트러지긴 했지만, 이젠 정말 처리할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내렸던 창을 다시 올려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옆자리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설마, 이게 할 일이란 걸까.
자주 사진을 찍히긴 했지만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무척 의식되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색하다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집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매번 집중한다, 집중한다고 하면서 매번 김세현이 말을 걸면 그에 끌려가 허우적거렸지만, 지금은 정말 일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옆에서 연사 소리가 요란했지만 애써 들리지 않는 척하며 작업 파일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아침엔 이영혁 부장이, 이후 던전과 김세현을 데리러 온 이의 방문으로 인해 퇴근 시간까지 숨 가쁘게 일 처리를 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던 하루였다.
“…….”
던전 뒤처리로 인해 빠른 귀가가 물 건너간 팀원들을 위해 김세현이 사 온 빵과 가는 길에 산 음료를 챙겨 현장으로 가 전달한 게 불과 몇 분 전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앞의 익숙한 사무실 풍경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분명 귀가하자마자 쉬었는데, 왜 이리 노곤한지 모르겠다. 외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막내 많이 피곤해 보이네.”
“형 피곤해요?”
한 주무관이 지적하자 바로 옆자리의 김세현 또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뭐, 본인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만…. 너무 피곤하다 싶으면 점심시간 이용해서 잠깐 눈 붙이고.”
“네.”
“잘 때 다리 빌려줘요? 베고 자면 편할 텐데.”
“아뇨.”
그랬다간 편하기는커녕 긴장해서 피로가 더 누적될 것이었다. 단호한 내 대답에 김세현의 표정이 불퉁하게 변했지만, 양보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막내야, 파일 보냈으니까 내가 표시한 부분 체크해 줘.”
“알겠습니다!”
어제 미리 오늘 일까지 처리하길 잘했다. 한 주무관이 보낸 지도를 본 뒤 손가락을 풀며 흐린 정신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피곤한 것도 피곤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할 일이 생긴다면 이 피론 잠시나마 잊힐 것이었다.
곧바로 교통 채널에 접속해 한 주무관이 보낸 파일과 하나하나 대조하며 입력하는 데 심력을 쏟아부었다.
처음엔 좀처럼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보고 또 보다 보니 확인하고 입력하는 것이 물 흐르듯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작업할 때완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빨라진 속도를 느끼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뿐이랴, 일에 익숙해지고 있단 걸 인지하니 좀 더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단 욕심이 샘솟았다.
“…….”
그렇게 한참을 집중해 지도를 완성해 나가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 잡힌 희미한 전화벨 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인다. 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팀장이 막 전화 받는 모습이 보였다.
“예, 서울시 헌터붑니다.”
“아.”
저 전화가 울릴 땐 언제나 그곳에서 연락을 취해 왔단 것이었다. 시청에서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을 줬나 싶어 지켜보는데, 순식간에 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청와대에 무슨 연줄이라도 있습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나왔고, 판단 내린 걸 왜 이곳에 따집니까! 지금 연봉 따질 땝니까? 던전이 계속해서 생성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는데, 미리 대비해야죠!”
“쯧.”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아.”
생각해 보면 기자회견이 끝남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려도 한참 울렸을 터였다. 하루 지난 오늘에서야 연락해왔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던전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그 생각은 정말 잠시 뇌리에 머무르다 지워졌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우스웠지만, 시청에선 던전이 생성되고 되지 않고를 떠나 자신들이 할 말을 전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 이들이 하루 늦게 전화를 걸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솔직히 계약직이나 정직이나 급여 차이는 거의 나지 않습니다! 아, 그렇다니까요? 협회로 새어 나가는 돈 생각하면 새발의 피 차인데 왜 그렇게 아낍니까, 아끼기를! 아낄 걸 아끼십쇼! 아, 불만 있으시면 청와대에 직접 어필하라니까요? 언제는 우리보고 불만 있으면 청와대에 어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시청에서도 적극 어필하셔야죠!”
통화가 이어질수록 낯이 뜨거워지는 건 이 자리에 김세현이 있기 때문일 거다. 슬며시 옆자리를 보니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 통화 내용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시청으로 가죠.”
한참을 목청 높여 대치하던 팀장이 난데없이 소리를 죽이더니 시청으로 가겠단 말을 남기곤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변화일까 싶어 그를 보니 생각보다 팀장은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시청에서 호출한 겁니까?”
“그렇지. 청와대에서 헌터부 인원 충원한다고 하더니 정말 충원시킬 모양이야.”
“충원되면 좋긴 하지만 말입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다가 탈이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
하필 김 주무관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며 김 주무관을 바라보는데, 팀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런 말 하지 말고.”
“…이미 해 버렸지만, 뒷말은 삼키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다른 건 몰라도 김 주무관이 툭 던지듯 말하는 건 조심하는 게 좋았다.
팀장의 말에 그 어느 때보다 동조하며 몸을 틀어 뒤를 보자 자리서 일어난 팀장이 곧바로 짐을 챙기곤 출입문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팀장님, 혹시 거기서 퇴근하십니까?”
“상황 봐야겠지. 혹여 4시까지 오지 않으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 시각에 퇴근들 하고.”
“예!”
“전달할 말이 있으면 부팀장 통해서 전달하마.”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쓱 사무실을 훑어본 팀장이 마지막으로 날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팀장이 내 옆, 그러니까 김세현을 잠깐 보더니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뭔가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다. 상황이 아리송했지만, 팀장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옆자리를 봤다면 언제나처럼 그와 단둘이 있지 말란 뜻일 것이었다.
그래, 그것 말곤 넘겨짚을 만한 것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시청에서 무슨 일로 팀장님을 부른 걸까요?”
“방금 팀장님이 말했잖아. 헌터부 인원 충원 때문에 가는 거라고.”
“충원 이야기 전에 팀장님이 목청 높였던 게 신경 쓰이네요.”
박 주무관이 턱을 매만지며 꺼낸 말을 들으니 정말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어디 가나 팀장이 상대에게 기가 눌릴 일은 없겠지만, 쉬이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없는 사람이 존재했다.
과연 시청에선 어떤 말을 할까.
기왕이면 시청과 헌터부 모두에게 건설적인 이야기가 오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다시금 팀장이 나간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