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20. 폭풍전야
“빵 사 왔어요.”
팀원들 몫까지 사 오란 말 때문인지 정말 그의 손에는 빵이 한가득 든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동 속도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빵을 샀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일, 찍 오셨네요?”
“당연하죠! 형이 빵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던전을 둘러보는 김에 빵집에 들렀다 오겠다고는 했지만, 빵집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렇게 일찍 돌아올 수 없었다.
던전이 생성되면 헌터부에서 긴급 문자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문자를 보낼 때마다 대피 범위를 알리기에 그 안의 사람들은 무조건 대피해야만 했고. 그랬기에 빵집 주인도 대피 길에 올랐을 텐데….
“…….”
설마 빵집 주인이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빵집에 들렀던가?
빵으로 가득 찬 종이가방 두 개를 내 책상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자리에 앉는 김세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빵집이랑 던전 거리가 좀 있던 거예요?”
“멀진 않아요. 보니까 던전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는 길에 던전 산책 좀 했죠.”
“그렇군요.”
분명 던전 현장 상황을 보여 주려고 갔다가 빵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 빵을 사러 갔다가 던전에 들른 것처럼 말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잘 먹을게요.”
“이건 나랑 형 먹을 거고….”
종이가방 두 개 중 하날 챙긴 김세현이 남은 가방을 내밀었다.
“이건 팀원들 거예요.”
“정말 사 왔네요.”
사 들고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양이 될 줄은 몰랐다. 종이가방이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가득한 빵을 보고 다시 김세현을 보자, 그가 씩 웃어 보였다.
“형 체면 살리려고 힘 좀 썼어요.”
“하, 하.”
내 체면을 살리겠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 왔다니. 쑥스러움에 괜스레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부팀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팀장님, 세현 씨가 빵을 이만큼 사 왔네요.”
“…….”
“부팀장님?”
몇 번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반응이 없는 부팀장이다. 멍한 얼굴로 김세현을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빵 양을 보며 놀란 듯했다. 나는 팀원들 몫이라던 종이가방을 챙겨 부팀장 자리로 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부팀장님.”
“아, 예.”
“빵 드시면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는 게 힘든 듯, 반 박자 늦게 부팀장이 답하며 종이가방을 받는다. 그에 정수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율무차 좀 타다 드릴게요.”
“형, 나는 커피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덧붙이는 김세현이다.
“석 잔 타 갈게요. 부족하면 이따가 또 말하고요.”
“좋아요.”
석 잔을 타 오겠단 말에 김세현이 씩 웃더니 이윽고 종이가방에서 빵을 꺼낸다. 책상에 놓이는 빵을 보니 괜히 군침이 돌았다. 나는 곧바로 마실 것을 만들어 부팀장에게 전달한 뒤 내 몫과 김세현의 커피를 챙겨 자리로 돌아갔다.
“이거 얼른 먹어 봐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먹는데, 형 입맛에는 맞을지 모르겠네요.”
여기 들를 때마다 항상 사는 건데, 맛있어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세현이 빵을 권한다. 나는 그의 앞에 커피를 두고는 빵을 건네받았다.
“잘 먹을게요.”
“많이 사 왔으니까 먹으면서 해요.”
“네. 세현 씨도 드세요.”
“형 먹는 거 보고 나서요.”
볼 게 뭐 있나 싶긴 했지만 기대감이 넘실거리는 눈빛을 보니 그에 응하지 않을 순 없었다. 빵 봉지를 벗겨 한 입 베어 물며 괜스레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빵에 다시금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맛 어때요?”
“맛있어요.”
가끔 팀장이 사 오는 빵만큼이나 맛이 좋다. 잠깐, 팀장이 사 오는 빵?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건 불과 며칠 전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난주 토요일에 먹었던 초밥 말이다.
“…….”
설마, 아닐 거다.
팀장은 대개 회사 근처 빵집을 이용했다. 그러니 같은 가게에서 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나친 억측이었다. 괜한 민망함에 입술을 오므리는데, 김세현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생각 해요?”
“어디 빵집일지 궁금해서요.”
“궁금하면 나중에 같이 가요.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위치 말해 줘도 못 찾아갈 거거든요.”
“그….”
아차.
하마터면 그러자고 답할 뻔했다. 힐끔 부팀장 자리를 보니 눈이 마주친 그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 빵이 있는데, 그건 만들어지자마자 먹는 게 가장 맛이 좋아요.”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혹여 계속해서 같이 가자 말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에 안도하자 그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가끔은 궁금한 채로 남겨두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일 때도 있었다.
커피와 함께 빵을 먹으며 오늘 자 협조금 관련 문서를 작성할 때였다.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세현 헌터님!”
어, 저 사람은….
이전에 김세현과 함께 외국에 나갔던 그 사람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이였지만, 썩 반갑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그가 했던 말로 인해 분위기가 싸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했으니까.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오늘 협회 회의가 있다는 거 잊으셨어요?”
“알아서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 헌터님이 자리를 비우는 건 보기 좋지 않습니다!”
보기 좋지 않다니.
저 말에 담긴 속뜻이야 다르겠지만, 듣기가 영 거북했다.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일까, 마치 김세현을 얼굴마담으로 삼기 위해 참여하라는 것만 같다.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채 앉아있는데, 남자는 내 모습 따윈 보이지 않는지 성큼성큼 다가와 김세현 바로 옆으로 와 섰다.
“손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김세현이야 다른 이들의 묵인으로 말미암아 여기 있는 거지만, 책상이 있는 곳까지 손님이 들어와서는 안 될 일이었다. 황급히 화면에 띄워 두었던 파일들을 내리며 한 번 더 단호하게 나가 달란 말을 돌려 표현하니 그제야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지킬 건 지키시죠, 손님.”
“…….”
조용하던 부팀장이 말을 얹는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나와 김세현을 번갈아 가며 보던 그가 물러섰다.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는 이에 원탁을 가리켰다.
“저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부팀장의 말이 있었다고는 하나 순순히 물러서는 모습이 기이했다. 원탁에 자리 잡은 남자를 뚫어져라 보다가 다시 김세현에게 시선을 줄 때였다.
“…회의가 있다고 하네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김세현은 이미 날 보고 있었다. 반 박자 늦게 말을 건네자 그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 봤자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아요.”
“아….”
“의견을 묻지 않는 게 아니라 김세현 헌터님이 먼저 의견 없다고 말씀하시잖습니까!”
“툭하면 협박이나 해 대고. 정말 회의감 느낀다니까요?”
“그건, 그건 위에서 하는 말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들었죠? 위에서 절 압박한다니까요? 세계 최고 S급 헌터에게 줄을 대 보려고 각국에서 굽신거리는데, 뭐 하나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눈치만 주고 말이죠.”
“…….”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나에게 고자질하려는 듯한 김세현의 태도에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올릴 때였다. 김세현이 자세를 바꿔 앉았다.
다리를 바꿔 꼬며 내 의자 등받이에 한 손을 올려 성큼 거리를 좁혀온 이다. 그에 순간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키는데, 김세현이 귓가에 제법 큰 소리로 속삭였다.
“게다가 내가 협회에서 쓰는 방이 있단 말이죠? 그곳에서 뭐가 나왔는지 알아요?”
“…뭐가 나왔는데요?”
“카메라요! 내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는지 방 여기저기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뒀더라고요.”
“아….”
그건, 범죄 아닌가?
기가 막혀 원탁에 앉아 있는 이를 보니 그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세현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할 땐 언제고, 저런 모습을 보니 참 그랬다.
“일이 있어서 자리 비울 때마다 수작을 부린다니까요. 이거 알아요? 나만 당하는 게 아니란….”
“흠, 흠! 김세현 헌터님!”
황급히 김세현의 입을 막아보려는 듯했지만, 이미 그가 하려던 말은 여과 없이 전달된 상태였다.
“…….”
정말 기가 차도 이렇게 찰 수가 있나 싶어질 지경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소속 헌터들에게 그런 짓을 벌이다니.
“그러니까, 그냥 가지? 여기서 더 까발려?”
그때였다, 김세현이 원탁 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 건.
평소완 달리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그가 낯설다. 아니, 낯설면서도 낯익긴 했다. 이전에도 한 번 저 사람에게 날 선 목소리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잘 바라보았다.
“김세현 헌터님. 안 가시면 제가 정말 곤란합니다.”
“내가 그쪽 사정까지 봐줘야 하나? 말도 안 되는 협박을 사람 앞에서 할 땐 언제고?”
“그건….”
“이전에도 말했지만, 선 넘지 마. 한 번 더 넘으면 너희들 밥상 제대로 엎어 버릴 테니까. 가서 똑바로 전해. 앞으로 말 같잖은 회의 같은 거 참석할 생각 없다고.”
물러서려 하지 않는 남자에게 한 번 더 참석할 의향이 없음을 알린다. 그에 남자가 멈칫하는데, 김세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꼬우면 제명하든가.”
이 자리에 박 주무관이나 김 주무관이 있었다면 감탄사를 늘어놨을 거다. 그만큼 김세현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김세현의 태도에 망설이는가 싶던 그가 자리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출입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하곤 김세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