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20. 폭풍전야
박 주무관이 알려 준 정부 사이트 덕분에 짧지 않을 것만 같았던 오전 근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그럼 내일 봐.”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도 집 앞까지 바래다준 팀장이다. 손을 흔드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니 이윽고 차가 출발했다. 잠시 뒤, 차가 완전히 골목을 빠져나갔음을 확인하곤 그대로 뒤돌아섰다.
대문을 마주 보고 있자니 집을 나서기 전 곤히 잠들어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
집에 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자고 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들어가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문 앞을 서성이며 마음을 다스리던 중이었다.
“하늘아, 뭐 해?”
깜짝이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놀라 뒤돌아보니 오래간만에 보는 이웃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무슨 일 있어?”
집 앞을 서성이는 게 이상했는지 앞집 아저씨가 집 쪽을 바라본다. 덩달아 집으로 시선을 주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요. 집에 들어갈까, 아니면 밖을 좀 더 돌아다닐까 고민 중이었어요.”
실은 그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아저씨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무슨 일 있나 했네. 곤란한 상황 생기면 언제든 말하고.”
“네.”
“에휴, 이 예쁜 녀석.”
“하하.”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뱉은 아저씨가 안쓰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인다. 부모님이 살아생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었던 만큼 날 안쓰러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이런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일이 바쁜지 영 보기가 힘들어.”
“네, 잘 챙겨 먹고 있어요. 회사 분들도 친절하셔서 일 다니는 것도 즐겁고요.”
“다행이네.”
“그렇죠?”
회사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아저씨가 즐겁다는 말을 듣더니 살짝 올라가 있던 눈썹이 아래로 내려왔다. 안도하는 모습을 보며 웃다가 매번 물어보고자 하면서도 묻지 못했던 걸 떠올렸다.
“참, 아저씨.”
“음?”
“담벼락에 간혹가다 공 모양의 기계가 놓여 있던데, 그거 뭐예요?”
“공?”
가리키는 담벼락 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아저씨가 다시 날 바라본다. 의문으로 가득 찬 모습에 이전에 봤던 구체의 크기를 가늠하며 양손이 맞닿은 모습으로 손가락을 오므렸다.
“한 이 정도 크기였거든요.”
“…글쎄다.”
“혹시, 모르세요?”
“잘 모르겠어. 안사람이나 아들들이 올려 뒀나?”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아저씨를 보니 내가 너무 그것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긁적이는데,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일단 식구들한테 한 번 물어보마.”
“네, 아저씨.”
“나중에 한 번 놀러 와. 아줌마가 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하더라.”
“조만간 꼭 들를게요.”
“그래.”
빤히 날 보던 아저씨가 한 번 더 어깨를 토닥이더니 집으로 들어간다. 담 너머로 들려오는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다시금 내 집을 눈에 담았다.
“…후우.”
그래, 내 집에 내가 들어간다는데 이렇게 망설일 이윤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발걸음엔 망설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빠르게 현관문에 도착해 잠긴 문을 열자, 고요한 집 안이 날 반겼다.
“…갔나?”
이렇게까지 조용한 걸 보면 김세현은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아침에 그가 잘 때도 무척 조용히 잠을 잤었다. 아무래도 거실까지 들어가 봐야 상황을 알 수 있을 듯싶었다. 곧바로 신을 벗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나는 부엌에서 나오는 이를 발견하곤 눈이 커졌다.
“왔어요?”
“…아직, 안 가셨네요?”
너무 조용했던 터라 가거나 아니면 자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김세현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이 너무 맛있어서.”
“아.”
그러고 보니 김세현의 손에는 젓가락과 함께 밥공기가 쥐어져 있었다. 식사 중이었단 사실에 곧바로 부엌으로 가 식탁을 보곤 말을 잃었다.
“김치랑 김 맛있던데요?”
“…계란말이라도 좀 해 드릴게요.”
“좋아요!”
냉장고에 반찬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먹을 게 없던 건 아니었다. 밥에 김, 그리고 김치만 달랑 놓인 상을 보니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란말이를 해 주겠단 말을 환영하는 그의 모습에 바로 손을 씻고 나와 계란말이와 함께 통조림 햄을 굽기 시작했다.
“하늘 형, 아직 점심 전이죠?”
“네.”
“그럼 형 밥은 내가 뜰게요.”
“…고마워요.”
밥그릇과 젓가락을 든 채 기웃거리는 것보단 밥을 푸는 편이 나았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김세현이 밥솥으로 가 익숙하게 밥을 푼다. 야무지게 수저와 젓가락까지 챙겨 식탁으로 간 그가 자리에 앉자, 나는 다시 프라이팬으로 눈을 돌렸다.
“…….”
어서 완성되었으면 좋겠는데, 오늘따라 햄과 계란 익는 속도가 왜 이리 늦는지 모르겠다. 체감상으로 한참만에야 완성된 통조림 햄 구이와 계란말이를 챙겨 식탁으로 향했다.
“잘 먹을게요.”
“밑반찬도 좀 더 꺼낼게요.”
“좋아요.”
밑반찬 이야기에 멈칫하던 김세현이 고개를 주억인다. 나는 냉장고에서 남은 반찬을 꺼내어 그릇에 던 뒤, 그것 역시 식탁에 올렸다.
“형도 얼른 먹어요.”
“네.”
“진짜 이런 집밥을 먹는 것도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꿀맛이네요.”
“하하.”
평소 김세현이 먹는 걸 생각하면 이 식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집밥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으니 민망한 마음이 앞섰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앞으론 반찬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단 생각이 앞선다. 이런 일이 또 있을진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그가 방문했을 때 더욱 맛있는 밥을 먹게 하려면 그러는 편이 나았다. 계란말이를 먹을 때마다 연신 칭찬을 늘어놓으며 꿀떡꿀떡 잘도 삼키기 바쁘다. 말없이 그런 김세현을 보다가 어서 먹으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젓가락을 들었다.
***
식사를 마친 김세현은 정말 유유자적했다. 소파에 앉아 TV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이곳이 본인의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돌아갈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듯, 소파에 앉아 TV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이곳이 본인의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세현 씨, 오늘은 일정이 없으신 거예요?”
“여기 있는 게 일정이에요.”
너무도 단호한 답이 돌아오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나.”
“참, 밥 먹기 전에 내가 볼 만한 영화 좀 찾아봤는데 같이 봐요.”
“좋아요.”
이번 주 할 일을 어느 정도 해 둔 상황인지라 이젠 출근 시간까지 푹 쉴 생각이긴 했다. 영화를 보잔 말에 응하니 김세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리란 말을 남기곤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간다. 뭔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는데, 김세현은 곧바로 돌아왔다.
“이걸로 봐요.”
“그게, 왜….”
“이쪽이 벽이 하야니 여기다 비춰서 봐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다.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데, 김세현은 그걸 바닥에 두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커튼을 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완전 암막이 아니라 잘 보일런진 모르겠네요.”
“…….”
“아, 저거요? 생긴 건 저래도 빔프로젝터예요. 휴대하기 좋은데, 성능이 좋아서 가지고 다니기 좋아요.”
“그, 래요?”
해 봤자 사람이 오가는 걸 인식하는 기계가 아닐까 했는데, 빔프로젝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빔프로젝터가 어째서 집 주변 여기저기서 보였던 건지 모르겠다. 그걸 사용할 만한 사람은 이 근방에 몇 되지도 않을뿐더러, 기능을 생각해 보면 저게 바깥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이유 역시 없었으니까.
아니지, 생각해 보면 꼭 저런 구체 모양의 기계라고 해서 무조건 빔프로젝터일 리는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제조한 물건이라면 디자인이 같지만, 내용물은 다른, 세트 물건일 수도 있었다.
“핸드폰이랑 바로 연결되어서 좋아요. 영화도 볼 수 있고.”
“…….”
“그래서 말인데, 이거 형 집에 하나 두고 가도 되죠? 놀러 올 때마다 같이 영화 봐요. 형도 나 없을 때 자주 써요.”
그는 고개를 내 쪽으로 틀며 씩 웃어 보였다. 무해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보니 의심과 경악 어린 감정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리 크지도 않은 것이기에 두고 가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팀원들이 말했던 것처럼 김세현이 그렇게 위험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소파로 돌아온 김세현이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검은 구체로 시선을 주었다.
“…….”
정말, 유사한 디자인의 세트 아이템이 맞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오리무중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영화를 보는 게 급선무였다.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던 김세현이 한쪽 벽면을 바라본다. 나는 곁으로 가 앉곤 그를 따라 흰 벽면에 시선을 주었다.
저 구체에 대한 궁금증이 좀처럼 가시진 않지만,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었다. 그래, 저걸 두고 간다니 살펴볼 시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