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19. 긴장
여기서 넘어진다면 못 볼 꼴을 보여 주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세현 앞에서 추태를 부린다? 앞으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찰나에 없는 운동신경을 끌어모으며 바닥을 짚어 보려 한 손을 뻗으려는데, 이미 몸이 상당히 기울어져 별 의미는 없었다.
“흡!”
그렇다고 이대로 고꾸라질 순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힘을 쥐어 짜내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노력이 빛을 발해 손이 바닥을 짚던 그 순간 내 몸 역시 완전히 바닥에 닿았다. 아니, 닿은 듯했다.
“…….”
오른손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은 확실히 이불이 맞았다. 폭신폭신하면서도 손아귀에 잡힌 천의 감촉은 바닥을 잘 짚었단 걸 의미했다. 하지만 다른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쉬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
가까웠던 터라 아무래도 김세현의 몸 일부를 덮치듯 쓰러진 모양이었다. 당장 일어나 사과하고 싶었지만, 넘어진 꼴을 인지하고 나니 쉬이 몸을 움직이기란 어려웠다.
무릎을 세운 채 엉덩이는 하늘로 가 있고, 얼굴과 어깨 쪽은 완전히 김세현에게 처박힌 상태다. 거기까지만 해도 민망함이 흘러넘쳤건만, 왼쪽 손 또한 팔꿈치 부위만 바닥에 닿았을 뿐, 얼굴과 함께 김세현을 덮친 상태였다.
의도치 않게 이런 자세로 김세현의 단단한 몸을 느끼고 있으려니 이보다 더 민망할 수가 없다. 당장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여기서 얼굴을 든다면 그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꼴불견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와중이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과 함께 이어진 말에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나쁘진 않지만, 이 이상은 좀 많이 위험할 것 같아요.”
난감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운다. 나는 민망함을 뒤로 한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세현 씨.”
“…미안할 것까지야.”
잠시 날 바라보는가 싶던 김세현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던 그가 멈칫하더니 다시 손을 바꿔 얼굴을 가리는데, 동시에 허리가 구부정해지는 것이 영 자세가 이상해 보였다.
“혹시 다쳤어요?”
“다치진 않았어요.”
다치지 않았다는 사람이 왜 저리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등이 굽은 자세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타격이 있었던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김세현을 살피는데, 찰나에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아래로 향하는 걸 포착했다.
“…….”
한 번 발견하니 그의 눈길이 더 잘 보였다. 여기저기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체로 그의 눈은 본인의 하체 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시선을 내렸다가 황급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다급히 옆으로 돌아앉았다.
“후욱.”
때마침 들려온 숨소리가 무척 익숙하다. 오래간만에 듣는 김세현 특유의 숨소리였지만, 그보단 방금 전 본 그 장면이 더 문제였다.
흥분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 하체 상황이 무척 긴박해 보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쓰러지며 하체에 자극이 가게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일까, 이보다 더 민망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
외면하고 싶단 마음관 다르게 자꾸만 김세현 쪽으로 온 신경이 향한다. 아예 시야에서 벗어나게끔 돌아앉았음에도 이러는 걸 보면 집의 고요함이 한몫하는 듯했다. 이대로 있다간 김세현의 숨결 하나하나까지 집중할 것만 같다. 나는 곧바로 TV를 켰다.
기왕이면 빨리 진정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또 이게 생각한 대로 쉬이 진정될는지 모르겠다. 복잡한 머리를 애써 비워내며 한참을 그렇게 TV 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할 즈음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던 후욱후욱대던 소리가 잦아들더니 조용해졌다.
이젠 좀 진정이 된 걸까? 확인 겸 조심스럽게 그를 살피려는데, 돌연 김세현이 제지했다.
“조금만 더 그렇게 있어요. 아직 진정되지 않았으니까.”
“그, 럴게요.”
이젠 좀 진정되었겠거니 했는데, 아직도일 줄은 몰랐다. 재차 몸을 TV 쪽으로 돌린 채 있으려니 겨우 흩트려놓은 신경이 다시 그쪽으로 쏠렸다.
“…….”
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작은 소리라도 난다면 괜히 상상력이 자극받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 지금 사태와 연결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가급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왜 이리 입 안이 바싹 말라 오는지 모르겠다. 덩달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 영 달갑지가 않다. 이럴 땐 역시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는 TV를 보는 게….
“형.”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온몸에 소름이 내려앉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노력하며 천천히 돌아앉았다.
“나 이제 좀 진정됐어요.”
눈이 마주친 김세현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분명 반가운 말이었지만, 어색하다 느껴지는 건 전부 저 손이 가리키는 부위 때문일 거다.
“그, 잘됐네요.”
아래를 가리키는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세현이 곧바로 자리에 눕더니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형도 얼른 누워요.”
“그래야죠.”
조금 전 상황을 완전히 잊고 싶기라도 한 듯 날 올려다보며 씩 웃는 모습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밝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정말 있었던 일이 맞나 싶을 지경이다. 무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다가 나 역시 몸을 뉘었다.
“역시, 형도 가까운 게 좋죠?”
예상치 못한 사태로 말미암아 이부자리를 옮긴다는 걸 깜박했다. 아차 싶었지만, 이제 와 다시 이부자리를 떼어내는 건 무리였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형.”
“네.”
“그 지난번에 기석인가 하는 놈팡이 말고 형 집에 와서 잔 사람 또 있어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건지 기석이 녀석을 입에 담는다. 난데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답했다.
“친구들이야 제법 되죠.”
유치원 때부터 지금껏 우리집을 거쳐 간 이들은 많았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좁아진 인간관계 덕에 지금은 기석이 녀석 말곤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막상 질문을 받으니 몇 명이 왔었나 궁금해졌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가며 놀러 와 자고 갔던 이들을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난 처음인데.”
생각이 너무 깊었던 걸까? 뭐가 처음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뭐가 처음인데요?”
“다른 사람 집에서 자는 거요.”
“아.”
“형한테도 누가 와 자는 게 처음이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처음이니 됐어요.”
자기가 처음이라 되었다고 하면서 표정은 왜 저리 불편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잠시 말을 고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세현 씨가 와서 자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게 더 의미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김세현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마주해 왔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데 푸른 눈동자에 내 모습이 작게나마 자리한 게 보였다.
그간 김세현과 눈이 마주칠 일은 많았지만,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보일 만큼 자세하게 저 눈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 싶다. 신기함과 새로움, 그리고 설렘을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흔들림이라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김세현의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어째서 시선이 저리 흔들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하지만 불과 몇 분 전에도 시선을 피한 전적이 있는 나로선 질문하기 뭣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처음이 뭐가 중요한가? 의미가 중요하지.”
한참 눈을 굴리던 김세현이 이윽고 다시 눈을 마주해 오며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접근하는 방향을 비트니 이것도 제법 괜찮은데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김세현이 씩 웃는데, 그 모습이 뭐랄까, 고민거리를 해결한 듯한 것처럼 보였다. 속으로 안도하고 있자니 그가 다시 모로 몸을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앞으로 나랑 많은 거 같이 해요.”
“그래요.”
“처음 하는 거면 더 좋고.”
“하하.”
좀 전부터 처음이란 단어에 꽂힌 모양이다. 처음이란 단어에 강세를 힘껏 넣은 이가 새끼손가락을 편 손을 내민다.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걸어 몇 차례 위아래로 흔들곤 TV를 끈 뒤 정자세로 누웠다.
“…….”
막상 일찍 자려 누웠건만, 도통 잠이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이 바로 곁에 누워있었으니까.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려도 보고 또 무늬 수도 세어가며 어서 잠이 오길 바라는데, 어째 그러면 그럴수록 곁의 김세현이 더 의식되었다.
…조용한 걸 보면 자는 거 같은데, 한 번 확인이나 해볼까?
그래, 그게 좋을 듯했다. 적어도 김세현이 잠든 상황이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윤 없었으니까. 혹여 그가 잠에서 깰세라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였다.
“형도 잠 안 와요?”
“그, 렇죠?”
“TV에 영화하는 거 있으면 그거 볼까요? 형 집에서 처음 보는 영환데.”
“좋아요.”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또 있을까 싶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TV를 켰다. 영화 위주로 틀어주는 채널을 돌리자, 때마침 시작 직전의 영화가 있음에 입을 열었다.
“좀비 영환데 괜찮으세요?”
“뭐든요. 같이 보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럼 이거 봐요.”
나야 가리는 것 없이 보기에 좀비 영화도 괜찮았다. 김세현의 시선이 TV에 고정되자, 나 역시 몸을 TV 쪽으로 몸을 틀었다.
“…….”
뭔가에 집중할 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다. 기왕이면 영화를 보는 사이에 잠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래, 그렇게 된다면 이 어색하면서도 긴장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CF가 이어지던 TV 화면이 이윽고 어둡게 변한다. 이어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좀 더 편하게 자세를 바꾼 뒤 시작된 영화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