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30)화 (130/246)

127화

19. 긴장

“형?”

내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아 다가온 모양이었다. 뭐라 답하긴 해야 할 텐데, 지금으로선 널뛰는 심장을 다독이는 게 최선이었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최대한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던 참이었다.

“형, 뭐 죄지은 거라도 있어요? 자꾸 고개만 숙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갤 숙였나 보다. 물론, 그게 아니라고 해도 김세현의 시선이 나보다 높을 수밖에 없긴 했다. 키 차이도 키 차이일뿐더러 김세현은 서 있고, 난 앉아 있었으니까.

“…….”

당황했다지만 지금 상황에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속으로 주절주절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다시금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이부자리까지 다 깔아 놓곤 내외하는 거예요?”

웃음기가 넘치는 목소리가 이보다 신경 쓰일 수가 없다. 건넨 말도 말이었으나 역시 김세현의 헐벗은 상체가, 달라붙은 하의가 너무 신경 쓰였다.

“나 드라이기 줘요. 머리 말리게.”

“네!”

드라이기가 필요하단 말이 이토록 반가울 순 없었다. 그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부리나케 방으로 이동할 때였다. 등 뒤에서 웃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큽!”

“…….”

지금은 김세현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래, 빨리 머리를 말려야 몸을 가려도 가릴 것이었다. 잽싸게 드라이기를 챙겨 나와 TV 쪽 빈 콘센트에 연결 후 그걸 내밀었다.

“여기요.”

“잘 쓸게요.”

“네.”

“형은 TV 보고 있어요.”

“그럴게요.”

드라이기 소리만 난다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TV라도 켜면 조금이나마 신경이 분산될 터.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소파로 돌아가 TV를 켰다. 그리고, 그 곁에서 머리를 말리는 김세현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붙잡았다.

뉴스만 보인다. 나는 뉴스만 볼 거다.

위잉-

내 눈엔 TV만 보인….

위잉-

“…….”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든 감탄할 수밖에 없는 몸이 떡하니 앞에 있는데, 다른 곳에 시선을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망하나 가질 수 없는 몸이 눈앞을 알짱거려서일까, 결국 내 시선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김세현의 몸이었다.

소파 쪽을 등진 채 머리를 말리는 데 여념이 없는 터라 시선을 알아차리진 못할 거다. 그래, S급 헌터라고 한들 이런 미약한 시선을 감지하진 못할 것이었다. 나는 곁눈질하는 걸 포기하고 아예 대놓고 그의 몸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

그간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던전을 클리어한 터라 이런 근육들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잔근육들과 더불어 떡 벌어진 어깨를 홀린 듯 훔쳐보는데, 김세현은 내 예상처럼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보였다.

“음, 음.”

뭐가 그리 신나는지 이젠 콧노래까지 부르며 머리를 말린다. 흥얼거릴수록 손의 움직임도 더욱 격해졌고 말이다. 덩달아 등 근육도 함께 요동치는데, 어찌 된 게 보면 볼수록 입에 침이 고였다. 혹여 침 삼키는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는데, 때마침 드라이기 작동이 멈췄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황급히 TV로 시선을 주었다.

“형, 이거 여기 두면 돼요?”

“네.”

혹여 목소리가 떨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해서 TV에 시선을 주는데 머리를 몇 차례 손으로 털며 김세현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뭐 뉴스거리 있어요?”

“으음.”

TV를 켜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고는 김세현의 등밖에 없었다. 난감함에 말을 흐리자 김세현이 리모컨을 채갔다.

“특별한 거 없으면 볼 만한 거 봐요. 영화 같은 거 안 하나?”

“…….”

나 또한 뭐라도 좋으니 집중할 수 있는 게 방영 중이었으면 좋겠다. 볼 만한 게 있다면 자꾸만 옆으로 가려는 시선과 신경을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인 듯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그가 작게 한숨을 뱉더니 TV를 끈다. 그와 동시에 옅어지나 싶던 긴장이 다시 차올랐다.

“토요일인데도 볼 만한 게 없네요?”

“그러게요.”

“할 일도 없는데, 우리 편하게 누워서 대화나 나눠요.”

“…….”

사전에 이야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워서 대화하잔 말이 왜 이리 자극적으로 들리는지 모르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고 싶지만, 지금 입을 연다면 이 긴장감이 바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형?”

아무 대답도 없자 김세현이 재차 부른다. 그에 알 수 없는 뭔가로 턱 막힌 목을 애써 뚫으며 답했다.

“…그래요.”

“물 가져다줄까요?”

티 내려 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많이 갈라졌나 보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였다.

“잠시만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자리서 일어난 김세현이 곧바로 부엌으로 향한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김세현을 바라봤다가 얼른 시선을 거뒀다.

“…….”

이 이상 보는 건 무리일 듯싶다. 재차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들으며 거실 천장을 응시하는데, 김세현이 소파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바로 앉았다.

“얼른 마셔요.”

“고마워요.”

이젠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째 조금 전보다 더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던 중이었다. 가만히 서서 날 내려다보던 김세현이 옆자리를 꿰찼다.

“…….”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았기 때문일까, 조금 전보다 훨씬 거리가 가까워진 기분이다. 서로의 무릎이 닿은 것도 모자라 내 뒤의 소파 등받이에 한 손을 올리며 앉은 김세현이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는데, 이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서 일어났다.

“왜요?”

“얼른 세수하고 올까 해서요. 잔도 씻고요.”

물을 마셔도 목소리가 갈라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멀쩡해진 목소리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김세현을 내려다보니 미묘한 표정을 짓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TV 보고 계세요.”

빠르게 할 말을 전달한 뒤, 부엌으로 가 컵을 씻곤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하아.”

욕실 문을 닫자마자 한숨이 나는 걸 보면 제법 긴장했던 모양이다. 한 번 더 한숨을 뱉으며 세면대 앞으로 가 서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정말 보기 좋을 만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지어 눈동자에도 살짝 핏기가 오른 것이 누가 봐도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바로 찬물로 세수를 여러 차례 한 뒤, 이를 닦으며 계속해서 낯빛을 확인하고 있자니 아주 조금씩이지만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그토록 뛰었음에도 내 꼴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상황이 상황이긴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김세현의 꼴을 보게 된다면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안을 핑계로 열이 식을 때까지 욕실에 머무르다가, 겨우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욕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왔어요?”

문 닫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이번만큼은 김세현의 몸을 보고 결단코 흔들리지 않을 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굳게 다짐하며 이부자리가 깔린 쪽을 힐끔거릴 때였다.

“…….”

막상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지만, 고민한 시간이 아까운 기분이다. 그도 그럴 만했다. 이번에야말로 김세현의 몸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자며 수없이 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제법 시간을 허비했으니 말이다.

“…….”

하지만…. 하지만 왜 이리 아쉬운지 모르겠다.

복잡한 마음을 감춘 채 김세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한 손을 내밀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형, 얼른 누워요.”

“네.”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은 눕는 게 좋을 듯했다. 제안받자마자 누워 이불을 덮는데,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한 공간에서 자는 것도 오래간만이네요.”

“그, 래요?”

“어릴 땐 부모님이랑 같이 자고 했다는데, 그건 너무 옛날 일이라서.”

“…저도 어릴 땐 부모님과 함께 자곤 했었어요.”

어려서는 부모님 방에서, 머리가 좀 커서는 지금처럼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서 같이 잤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오래간만에 떠오른 추억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던 참이었다.

“형은 어릴 때도 귀여웠을 거 같은데.”

“어린아인 다 귀엽죠.”

악동처럼 뛰어놀며 사람 진을 빼 놓긴 해도 어린아이는 귀여웠다. 나 역시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움이 있었을 것이었다. 물론, 김세현은 외모부터 주변을 압살하니 어릴 땐 장난 아니었을 터였다.

“세현 씨가 정말 귀여웠을 거 같아요.”

“지금은요?”

“네?”

“지금은 안 귀여워요?”

“어, 음…. 지금은 귀엽다는 말보단 멋지단 말이 더 잘 어울리죠?”

간혹 귀엽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역시 김세현 하면 멋있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게 당연했다.

“흐음. 형 눈에는 내가 그렇게 멋져 보여요?”

“…모두가 세현 씰 멋있어하죠.”

“그 말은 형한테도 내가 멋있다는 거잖아요.”

슬쩍 말을 돌렸건만, 김세현은 김세현이었다. 그냥 모르는 체해주면 좋았을 텐데, 정확하게 짚어내니 이보다 민망할 수가 없다. 괜스레 천장을 훑어보는데 이번에도 김세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형이 멋있다고 하니 기분 좋네요.”

“…….”

가까운 거리에 이부자리를 펴긴 했지만, 거리를 둔 터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올 순 없었다.

마치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가까이 들린 목소리다. 나는 삐걱거리는 목을 움직였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는 언제나 날 배신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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