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19. 긴장
“많진 않지만, 몇 있긴 했던 거 같네요.”
대화를 나누다 뒷골을 잡는 녀석들이 있긴 했다. 게 중에는 그 뒤로 툭하면 말을 걸고 딴죽을 거는 이들도 더러 있었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기석이 녀석과 더불어 어울리는 녀석들의 인상이 워낙 곤죽 같아서 다들 피하곤 했으니까.
“누가요? 얼마나? 언제?”
“…….”
“왜 말을 안 해요? 설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거였어요?”
“세, 현 씨?”
“어쩐지! 날 쥐락펴락하는 게 능숙하다 했지!”
아니, 말이 왜 거기로 가지?
내가 언제 쥐락펴락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예상 밖의 반응에 끔벅이며 그를 보는데, 더욱 날뛸 것 같던 그가 별안간 모든 행동을 멈췄다.
“…….”
“…….”
먼저 말을 거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지켜보는 게 나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아무래도 지켜보는 게 바람직한 선택인 듯했다. 그래, 괜히 말을 걸었다가 겨우 진정되려는 김세현을 자극한다면 조금 전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말을 쏟아 낼 게 뻔했다.
다시금 식탁 위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지금은 정적이 김세현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했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당혹스러웠던 감정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김세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후우.”
크게 한숨을 뱉은 김세현이 몇 번을 크게 심호흡하더니 단번에 잔을 비운다. 그에 바로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잘 마실게요.”
“네.”
목소리가 진정된 것이 흥분을 가라앉힌 듯했다. 혹여 계속 격앙되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안도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자, 김세현이 피자로 손을 뻗었다.
“얼른 먹어요. 다 식겠다.”
“그럴게요.”
분위기를 환기해보려는 듯 김세현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피자를 권한다. 하지만 정적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지 좀 어색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색하다 티를 낸다면 더더욱 어색해질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막 도착한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
사무실에서 챙겨온 피자도 맛있었지만, 역시 따끈할 때 먹는 피자가 제맛이었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두 조각을 먹어 치우곤 그대로 몸을 물렸다.
“벌써 다 먹었어요?”
“좀 전에 먹은 게 있어서 그런지 배가 금세 차네요.”
“…입이 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
벌써 배부르냐는 듯 김세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평소보다 더 먹은 편이에요.”
“먹는 입도 작고, 들어가는 입도 작고.”
초밥 도시락 두 개에 치킨 조금, 그리고 피자 두 조각이면 배가 차고도 남을 양이었다. 물론, 김세현이 먹는 양에 비해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조그맣단 말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김세현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의 어색한 침묵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한 번에 먹는 양 늘리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더 먹으라곤 안 할게요.”
“네.”
“형 다 먹었으면 볼일 봐도 돼요. 난 이거 다 먹어야 해서 시간 좀 걸려요.”
“아니에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혼자 지낼 때 가장 서럽고 외로울 때가 있는데, 바로 식사할 때였다.
자리를 지키고 있겠단 말에 김세현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이내 잘게 휘어졌다. 볼 때마다 이전의 잘생김을 갱신할 수 있는 건 김세현이 유일할 거다. 연신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자니 씩 입가를 끌어올린 김세현이 식사를 재개했다.
야무지게 피자를 먹는 김세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밥 먹는 모습을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면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뭐 새로운 기사 있어요?”
“한 번 살펴볼게요.”
그러지 않아도 뉴스를 살피려던 참이었다. 흥미로운 뉴스가 있으면 함께 읽고, 또 그것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김세현은 마지막 피자 조각을 들고 있었다.
“후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마지막 피자를 먹어 치운 김세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기울인다. 등받이에 기대어 가느스름한 눈으로 식탁 위의 빈 피자 상자들을 한 차례 훑는데, 그 모습이 퍽 행복해 보였다.
“잘 먹었습니다.”
“저야말로 세현 씨 덕분에 잘 먹었어요.”
“입가심 좀 하고 싶은데, 집에 콜라 있어요?”
피자와 함께 주문한 콜라는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은근한 기대감을 안은 채 냉장고를 바라보는 모습에 바로 자리서 일어났다.
“500㎖지만 하나 있긴 해요.”
“오, 입가심으론 딱이네요!”
부족하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가지고 온 콜라를 건네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바로 뚜껑을 연 김세현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잔에 따르지도 않고 마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목이 멨나 보다. 단번에 페트병을 비운 그가 씩 웃으며 자리서 일어났다. 그에 얼른 말했다.
“세면도구 챙겨 드릴게요.”
“옷도요.”
“네.”
씻는 김에 한꺼번에 씻을 심산인가 보다.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곧바로 욕실로 향한다. 뒤따라가 여분의 칫솔을 꺼내어 건네며 수건 위치까지 알려 준 뒤 거실로 나왔다.
“옷은 문밖에 둘게요.”
“네.”
“혹시 입다가 작으면 꼭 알려 주시고요.”
맞지 않으면 바로 마트로 가야 했으니 말이다. 알려달란 말에 다소곳이 답한 김세현이 씩 웃으며 문을 닫는다. 웃음에 잠시 정신이 팔려 멀거니 문 앞에 서 있는데,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
지금 들리는 물소리는 세면대에서 난 소리였다. 그럼에도 민망한 건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일 거다. 오늘따라 유독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생각하며 방으로 가 옷장 서랍을 뒤적였다.
“어디 뒀더라?”
얼마 전 옷장을 정리하며 몽땅 꺼내 빨 때도 보였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어서 옷이 나오길 바라며 계속해서 찾다 보니 서랍 맨 아래 칸, 그것도 가장 안쪽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냄새를 맡아 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옷에선 섬유유연제 냄새만 날 뿐이었다. 안도하며 욕실 문 앞으로 이동해 헛기침 후 말을 이었다.
“세현 씨, 앞에 옷 두고 갈게요.”
“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소리 너머로 김세현의 답이 돌아왔다. 나는 옷가지를 바닥에 두곤 거실 소파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옷도 전달했으니 이젠 이부자리를 펴야겠다.
“흠.”
침대를 내어 주는 편이 나을 듯한데, 과연 김세현의 키를 내 침대가 소화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혹시 몰라 방으로 가 침대를 둘러보고 또 누워 봤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대를 살 때 싱글 말고 슈퍼싱글로 장만할 걸 그랬다. 대각으로 누울 공간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커버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쩌지.”
침대에 자리를 펴려 생각했는데, 사이즈 문제로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방바닥에 이불을 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난 위에서 자고 손님을 아래에서 자게 하는 것도 좀 그랬다.
…차라리 거실에서 같이 이부자리를 펼까?
그래, 소파 테이블 위치만 옮기면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은 충분했다.
곧바로 거실로 나가 소파 테이블을 한쪽으로 옮기고는 바닥을 간단히 청소 후 몸을 일으켰다.
“…….”
토퍼도 없으니 이불들을 동원해 도톰하게 깔아야겠다. 평소 침대 생활하는 사람이니만큼 바닥이 딱딱하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테니까.
빠르게 장롱에서 요를 꺼내어 겹겹이 쌓아 올리니 제법 도톰한 것이 그럴싸했다. 그 옆으로 남은 요를 깔아 어느 정도 높이를 맞춘 뒤, 덮을 이불 두 채와 베개를 챙겨 나와 잠잘 자리를 꾸렸다.
“괜찮네.”
이 정도면 김세현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 이부자리와 이부자리 사이의 공간도 사람이 오갈 만큼 거리를 둔지라 혹시라도 밤에 화장실을 오갈 때 거치적거리거나 하진 않을 거다.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가 식탁을 정리했다.
워낙 깔끔하게 먹은지라 뒷정리라고 해봐야 분리수거만 잘하면 되었다. 빠르게 뒷정리를 마무리한 뒤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
앉아서 이부자리를 내려다보니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김세현도 이부자리를 보면 분명 놀랄 거다. 혼자 흐뭇해하는데 등 뒤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한 번 더 문소리가 났다.
옷을 챙긴 듯하니 이제 곧 김세현이 나와 거실 상황을 보게 될 것이었다. 과연 이 이부자리를 보며 어떤 말부터 할까.
“손만 잡고 잘게요.”
하필 저 말이 떠오를 건 뭘까 싶다.
시선을 내려 내 손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다시금 문이 열렸다. 이어 거실 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에 이부자리를 가리키며 몸을 틀었다.
“침대가 작아서 여기에 자리 폈….”
“바진 어떻게 입었는데, 상의가 좀 껴서요.”
“…….”
눈을 사로잡는 헐벗은 상체도 상체였지만, 하체 쪽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저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팽팽한 바지 상황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성큼 거리를 좁혀 온 김세현이 허리를 굽히며 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