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28)화 (128/246)

125화

19. 긴장

“안 돼!”

마치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팀장의 목소리가 머리를 강타한다. 그에 나도 모르게 김세현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걸 당연시하며 답하려 했단 사실을 깨닫곤 거절하려 재차 입을 열었다.

“다음에….”

“형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밤늦게까지 대화하는 것도 참아 볼게요.”

먼저 말했지만, 이어진 김세현의 목소리가 더 컸다. 누가 봐도 내 거절을 목소리로 덮으려던 의도가 빤히 보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기세 좋던 김세현의 표정이 축 늘어졌다.

“얌전히 자고 갈게요.”

“…….”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하고 손만 잡고 자면 되잖아요.”

얌전히 자고 간다고 해 놓곤 손만 잡고 자겠단 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말없이 계속 바라보자 더더욱 풀죽은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한참 시선을 마주하던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다른 사람 집에서 자는 거 처음인데.”

“…….”

“지난주에 봤잖아요. 나 잠버릇도 없는 거.”

이번엔 내 마음을 흔들어 보려는지 목소리까지 울적해졌다. 덩달아 표정까지 더욱 불쌍해지다 못해 내 눈치까지 살피기 급급한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풉.”

…하필 이 타이밍에 웃음이 터진 건지 모르겠다.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볼 장은 다 본 상황이었다.

“그럼 허락한 거죠?”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화등잔만 해졌던 김세현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그뿐이랴, 얼굴엔 한층 더 환한 미소가 걸렸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팀장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푸른 눈동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미 마음의 추는 기운 지 오래였지만, 그렇다고 냉큼 답할 순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척하며 시간을 끈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한 거 꼭 지킬게요.”

“네.”

“손만 잡고 쥐 죽은 듯 잘게요.”

“…….”

손을 잡고 잔다는 말은 왜 하는 걸까. 여기서 잔다고 해도 각자 다른 공간에서 잘 텐데 말이다. 내 방 침대 정리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느새 울적한 기운이 사라진 김세현이 으스대기 시작했다.

“나 완전 조용히 잘 자는 거 알죠?”

상체를 내 쪽으로 한껏 기울인 김세현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지난주 영화를 보던 중 잠깐 잠들었었던 그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보긴 했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참, 나 이따가 갈아입을 옷 빌려줘요.”

“옷, 이요?”

“자기 전에 씻고 자야죠.”

“아.”

씻고 자는 거야 당연했지만, 과연 내 옷이 김세현의 몸집을 버틸 수 있을까 싶다. 아니, 버티기 이전에 들어갈 지부터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가 입을 만한 옷이 있나 옷장 안 상황을 곱씹어 보던 중이었다. 순간 떠오른 옷가지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세현 씨가 입을 수 있음 직한 옷이 몇 벌 있긴 한데, 맞을 진 모르겠네요.”

평소 옷을 크게 입던 기석이 녀석인지라 잘하면 김세현도 입을 수 있음 직했다.

“뭐, 못 입을 거 같으면 벗고 자면 되죠.”

“…그건 좀.”

남자끼리 옷 좀 벗고 있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이 벗고 잔다면 내가 곤란했다.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인다고 한들 눈 앞에 펼쳐질 살색의 향연이 남길 흔적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할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그대로 속마음을 내보이게 될지도 몰랐다.

“…….”

혹여 기석이 녀석의 옷도 맞지 않는다면 근처 마트라도 가서 가장 큰 사이즈의 옷을 사 와야겠다. 그래, 괜히 김세현을 헐벗게 뒀다간 나만 손해였다.

절대 속내를 들키지 않겠단 의지를 다지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이불 뒤집어쓰고라도 잘게요.”

…맨몸에 이불이라니.

나 역시 샤워 후 가끔 하는 행동이었지만, 김세현이 그러겠다고 하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내 집에서 김세현이 헐벗은 상태로 이불을 덮고 잔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술렁였다.

“사람과 대화 나누는 게 이렇게 즐거운 것인 줄은 이제껏 몰랐어요.”

“다행이네요.”

“기왕이면 좀 더 진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요.”

“…진한 대화요?”

여기서 진한 대화라 함은 사적인 대화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김세현이 날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대화를 나눌 만큼 거리를 좁히고자 할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 때문일까, 조금 전 느낀 술렁임과는 또 다른 술렁거림이 마음을 흔든다. 덩달아 차오른 간질거림은 삽시간에 온몸을 집어삼켰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차오르고 또 흘러넘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참이었다.

“형만 허락해 주면 바로 나눌 수 있는데.”

“…….”

“단둘이서, 아주 진하게요.”

말없이 날 지켜보던 김세현이 말을 잇는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그보단 저 표정과 거친 숨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더불어 묘하게 달뜬 표정을 보고 있자니 대답하는 게 자꾸만 망설여졌다.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지난주 김세현의 집에서 들었던 낯선 목소리의 정체와 더불어 어째서 그런 대화가 오갔는지 알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어때요, 형? 하는 김에…. 예전에 말했던 단둘이서 할 수 있는 운동도 시험 삼아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였다. 운동 이야기를 꺼낸 김세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야기만 해요.”

“편히 할 수 있는 운동인데도요?”

“마음만 받을게요.”

누워서 편히 하는 운동이라 했다. 그렇기에 집에서 하기 안성맞춤이었지만, 여기서 함께 운동하게 된다면 내가 몸치라는 게 들킬 것이었다. S급 헌터에겐 일반인들의 운동신경이 거기서 거기겠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간 운동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포장했는데, 이제 와 들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더 마음만 받겠다고 말하자 들썩이던 김세현의 어깨의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드는 게 보였다.

“…정말 안 할 거예요?”

“네.”

“완전, 엄청 좋을 텐데?”

“그래도요.”

“…….”

거듭되는 거절에 이내 들썩이던 김세현의 어깨가 완전히 멈췄다. 그뿐이랴, 잔뜩 들떠 보였던 얼굴엔 어느새 심통이 들어차 있었다.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였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어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가서 받아 올게요.”

“…그래요.”

자리서 일어나 식탁을 벗어나려니 김세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허리를 구부려 엉덩이만 의자 끝에 대충 걸친 자세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자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 배달원에게 김세현이 주문한 피자를 받는데, 역시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자 일곱 판에 콜라 네 병이 든 봉지를 받고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세현 씨, 피자 왔어요.”

“…그래요.”

“금방 만들어서 왔는지 따끈따끈하네요. 방금 먹은 피자보다 더 맛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

제안을 거절한 게 저리 심통이 날까 싶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김세현을 바라보다 코를 자극하는 피자 냄새를 맡고는 부리나케 받아 온 걸 꺼내어 식탁에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어서 드세요. 그리고, 잘 먹을게요.”

“하아.”

잠시 나를 보는가 싶던 김세현이 깊은 한숨을 뱉곤 다시 자세를 바로 한다. 말없이 빈 잔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에 곧바로 콜라를 따라주자, 침묵하던 그가 말을 걸어왔다.

“형은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소질이 천부적인 거 같아요.”

“제가요?”

“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죠!”

“…….”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소질이 있단 말은 또 처음 듣는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이 빠져 그를 보는데, 김세현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 내기 바빴다.

“매번 알아줬으면 하는 건 모르고, 모르고 지나가 줬으면 할 땐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게다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거지 매번 사람 심장 들었다 놨다 하고!”

“어, 음.”

“솔직히 말해 봐요. 형 좋다는 사람 많았죠? 막 미치고 펄쩍 뛰는 사람 주변에 많았죠?”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답하긴 했지만, 이번 질문은 좀 생각하고 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생각을 정리 후 입을 열었다.

“좋다는 사람 없었어요.”

“미치고 펄쩍 뛰다가 주변을 맴도는 사람 분명 있었을 텐데요? 그것도 엄청 많이!”

“그건….”

그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조용히 과거 일들을 되짚고 있으려니 단번에 콜라를 마시곤 잔을 앞으로 내미는 김세현이 보였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그 잔에 콜라를 따라주었다.

“생각나죠? 너무 많아서 말 못 하는 거죠?”

이죽거리듯 말하는 본새가 영 별로다. 하지만 지금 모습이 김세현의 본모습은 아니기에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잔뜩 뿔이 난 이의 질문에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해 봐야 될 거 같아요.”

“…하?”

지난 이야기를 물어본 터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저 모습을 보니 얼른 생각해 답하는 게 좋을 듯했다. 과거 일들을 반추해보다가 몇몇 이들이 생각나자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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