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19. 긴장
“저기서 먹는 거 아니었어요?”
김세현은 거실 소파 테이블을 가리켰다. 편히 앉아 먹어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불편하게 저기서 먹을 이윤 없었다. 김세현의 긴 다리를 보다가 시선을 거둔 뒤 한 번 더 식탁을 가리켰다.
“그냥 식탁에서 먹어요.”
“…뭐, 그래요.”
내 대답에 못내 아쉬운 듯 소파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고개를 끄덕인 김세현이 망설임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걸음걸이로 식탁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앞서 걷던 김세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와선가? 바깥보단 훨씬 편하고 좋네요.”
“…….”
안으로 들어왔단 말을 강조하는 걸 보니 출입을 막으려 이런저런 핑계를 댔던 게 진즉 들켰던 모양이었다. 감추려 한 부분이 까발려져서일까, 여간 창피한 게 아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음식을 차리는 게 우선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이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한 김세현 곁으로 가 피자와 치킨을 꺼내던 중이었다.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게 잡히자 놀란 마음에 소리를 뱉었다.
“어?”
종이가방에서 나오는 도시락의 외관이 묘하게 익숙했다. 그뿐이랴, 낮에 배달되었던 도시락 역시 지금 보이는 종이가방처럼 그 작은 문양도 없는 흰 종이가방에 들어 있었다.
도시락 포장 용기에 종이가방까지 같은 걸 사용하는 초밥집을 하루에 두 번이나 마주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설마 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죠?”
아직 뚜껑이 닫혀 있어 내용물 확인도 못 한 상황이었다. 잔뜩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이에 어색하게 웃자니 김세현이 곁의 의자를 빼곤 등받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얼른 앉아요. 내가 컵 가지고 올 테니까.”
컵을 가지고 오겠다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위치만 알면 바로 움직일 기세다.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곧바로 찬장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컵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거면 됐어요.”
고개를 저은 김세현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가는데, 내가 앉으려던 바로 옆자리에 김세현이 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
나란히 앉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둘이서 먹을 땐 역시 마주 보며 앉아 먹는 게 좋았다. 서로 얼굴을 확인하며 대화를 나누기엔 그게 더 좋았고 말이다. 옆자리를 툭툭 치며 와서 앉으라는 김세현을 보며 고개를 저은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왜 거기 앉아요?”
“마주 보면서 먹으려고요.”
“…….”
당연히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김세현은 그저 눈만 끔벅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낯설어 얼굴을 살필 때였다. 작게 헛기침하던 김세현이 식탁 위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초밥 재료가 다 떨어진 바람에 적게 가져왔는데, 다른 것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김세현의 말마따나 피자와 치킨이 없었다면 음식이 턱없이 부족했을 거다. 고개를 주억이며 동조하는데 한쪽에 쌓아 둔 도시락 중 두 개를 내밀었다.
“일단 두 개 먹고 부족하면 말해요.”
그러지 않아도 양이 적은데 도시락 두 개를 빼니 김세현 앞이 너무 허전해 보였다. 그래서 하나만 받으려고 하니, 김세현은 끝까지 두 개를 가져가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도시락 두 개를 받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이거 다 먹고 부족하면 배달 음식 불러요.”
“좋아요.”
집밥을 차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으나 포장부터 고급스러운 초밥과 비교될 게 뻔했다. 흔쾌히 그러자 답하는 이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문할 만한 게 있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형, 얼른 먹어요. 퇴근하자마자 청소하느라 배 많이 고플 텐데.”
“그럴게요.”
김세현 앞의 도시락은 이미 뚜껑이 열려 있었다. 젓가락까지 야무지게 손에 쥐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까딱이곤 도시락을 오픈했다.
“아.”
“왜요? 맛있어 보여요?”
“그…. 네.”
포장이 같아도 가게마다 내용물은 다르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너무 넘겨짚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안을 확인하니 같은 초밥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이 같았다.
“여기 초밥 알아주거든요. 저도 자주 먹고요.”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세현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거다.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그를 보니 잠시 내 도시락을 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오늘까지만 가려고요. 인기가 많은 집인지라 그저께 오전에 예약해 뒀거든요? 가능하다고 할 땐 언제고, 찾으러 갔더니 재료가 부족해 이것밖에 마련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돼요?”
“…그건 좀 아니네요.”
당일 바로 주문한 것도 아니거니와 일이 생겼다면 미리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라도 두 번 다시 그곳에 발길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동조하자, 김세현도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찾으러 가니 그쪽에서 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오늘 낮에 높으신 양반께서 갑자기 주문을 넣는 바람에 내 주문에 쓸 재료까지 소진했다는 거예요.”
“낮, 이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높은 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면서 사과하는데, 그런 상황이면 미리 연락해야지, 찾으러 가서야 그러니 기가 안 막혀요? 원래대로라면 도시락 열다섯 개는 더 왔을 텐데!”
“…….”
어찌 된 영문인지 점심에 본 도시락 개수까지 비슷하다. 하나만 같았다면 그저 지레짐작했다며 치부하고 말았겠지만, 겹치는 상황이 추가되니 같은 초밥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 쪽으로 추가 기우는 느낌이었다.
“말하고 나니 좀 불안하네. 그냥 먹기 전에 미리 주문하죠. 형,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같이 주문할게요.”
아무래도 초밥 주문 건을 상기하니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핸드폰을 꺼내 든 김세현이 묻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걸로 충분해요.”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할게요.”
“그래요.”
초밥 주문 건과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질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김세현의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먹기 전 주문을 해두면 이 음식들을 다 먹을 즈음 주문한 음식이 도착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중간에 입을 멈출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배달 앱을 살피는 듯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핸드폰을 보던 중이었다. 방금 꺼내 온 잔이 텅 빈 상태임을 확인하곤 바로 콜라를 채워 김세현 앞에 놓았다.
“고마워요, 형.”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고맙다고 할 줄은 몰랐다. 괜히 쑥스러워져 볼을 긁적였다.
“뭘요.”
“주문했으니 어서 먹어요. 아, 피자 보니까 좀 당겨서 피자로 불렀어요.”
“잘하셨어요.”
이 동네 피자라면 저녁 시간이라고 해도 제법 일찍 도착할 것이었다. 다시 젓가락을 든 김세현이 날 바라보며 어서 먹잔 눈짓을 보낸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
미관상으로도 이미 맛있단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먹으니 이보다 더 극락일 수가 없다. 낮에 먹은 초밥과도 견줄 만한 게 김세현이 자주 먹는다는 이율 알 듯했다.
“근데 형.”
“네, 세현 씨.”
부름에 고개를 드니 김세현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묘하게 시선이 어긋나 있어 뭔가 싶었는데,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내 입가였다.
“아.”
설마, 뭐라도 묻었나?
황급히 입가를 가리며 입가를 닦곤 김세현을 보자, 씰룩이던 입매가 호선을 그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초밥 맛은 어때요?”
김세현이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질문한다. 나는 바로 답했다.
“맛있어요.”
“난 또. 입맛에 안 맞아서 아무 말도 없나 했죠.”
“…너무 맛있어서 말할 겨를도 없었어요.”
민망함을 누르며 대답하니 김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네. 정말 맛있어요.”
오늘 먹은 초밥 모두 역대급이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금이 더 맛있긴 했다. 슬쩍 김세현의 얼굴을 보고 초밥을 보니 윤기가 흐르는 것이 확실히 더 맛있어 보였다.
원하는 답을 들어서일까, 김세현이 어서 먹으라며 손짓한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도시락 두 개를 금세 비운 김세현이 콜라를 마시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낮에 사무실 주변에 기자들이 진 치고 있었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
“그게 말이죠….”
기자들이 있단 말만 전한 뒤 연락하지 않은 터라 궁금해할 만도 했다. 나는 퇴근하며 겪었던 일을 상세히 전했다.
“……”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 도시락을 먹으려 준비하던 김세현이 별안간 모든 행동을 멈추더니 날 바라본다. 황당하단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보였다. 나는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더 집요하게 물어볼 줄 알았는데, 바로 철수해서 좀 당혹스럽더라고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당연히 맞장구를 칠 줄 알았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을 끔벅이는데, 김세현이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곤 손깍지를 끼며 식탁 위에 손을 얹었다.
“그냥, 형이 대단하다 싶어서요.”
“…….”
“하긴, 나도 이렇게 쥐락펴락하는데 그까짓 기자들이 무슨 대수겠어.”
김세현을 쥐락펴락한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푸슬푸슬 웃음을 흘리기 바쁜 이를 보며 정색했다.
“…쥐락펴락한 적 없어요.”
매번 내가 휘둘리면 휘둘렸지, 김세현을 흔들어 보고자 한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흔든다고 흔들릴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
내 반응이 너무 격했던 걸까, 김세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게 된다면 내가 김세현을 쥐락펴락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나는 한 번 더 강하게 부정했다.
“정말 그런 적 없어요.”
“알았어요. 형은 한 적 없어요.”
“…….”
담백하면서도 빠른 대답이었지만, 얼굴에 어린 흐뭇함을 보고 있자니 엎드려 절을 받는 기분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태도도 불만이었고.
한 번 더 강하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김세현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
웃을 때마다 사람 혼을 빼놓기 일쑤였지만, 볼 때마다 반짝이는 정도가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게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김세현과 반짝임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반짝이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돌연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 더는 못 참겠다.”
못 참겠다는 말과 함께 김세현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어 커다란 웃음을 쏟아 내는데, 두서없는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자니 한참만에야 웃음이 잦아든 그가 눈가를 훔쳤다.
“진짜 형은 최고예요.”
답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마지못해 답하는 티를 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큽! 그래요.”
고맙다는 말에 재차 웃음이 터질 뻔했는지 김세현이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이미 볼 장은 다 봤는데, 저리 웃음을 참는다고 이전 상황이 변하거나 하진 않았다.
“형.”
“…….”
“하늘 형?”
부름에 응하면 또 웃음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자니 김세현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제 그만 웃을게요.”
“네.”
드디어 원하는 말이 나왔음에 바로 답하니 김세현의 입가가 한 번 더 씰룩거렸다.
“흠, 흠! 그건 그렇고. 기자들이 날 찾던 거 말고 다른 말은 없었어요?”
상황을 무마해보려는 듯 다시 기자들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그와 동시에 눈가를 잘게 휘며 예쁘게 웃는데, 누가 봐도 그냥 넘어가 달란 애교였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