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19. 긴장
오늘을 끝으로 청와대로 복귀하게 된 감찰부 사람들이었다. 다른 날과는 달리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짐을 챙기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
처음 왔을 때부터 잠깐 머무르다 돌아갈 거란 말을 들었음에도 이렇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거 보면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을 줬던 모양이다.
그래, 아쉽지 않다면 이번 주말 휴식 예정이었던 김 주무관과 한 주무관이 자발적으로 출근해 일손을 도울 리 없었다.
“박스에 표시 안 해도 괜찮습니까?”
“안에 표시해 뒀으니 가서 봐도 됩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좀 번거로울 텐데요.”
“저희도 가시적인 게 좋지만, 보는 눈들이 있어서요. 행여나 말이 나올까 싶어 조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영혁 부장이 그간 보았던 서류가 담은 박스를 봉한 뒤 출입문 쪽으로 가지고 가며 말한다. 하긴, 바깥 상황을 고려해 보면 번거로움을 택하는 게 이득이긴 했다.
창가로 가 동태를 살피니 역시나 주변을 맴도는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가 제법 많아졌다는 것이었고, 그들이 사무실 앞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
건물 앞에 똬리를 튼 것보다야 지금이 나았지만, 갑작스레 저렇게 행동하는 연유를 모르겠다.
“막내야, 바깥 상황 어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한 주무관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어왔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그를 보며 답했다.
“아침과 별반 다르지 않네요.”
“흐음. 저렇게 흩어진 거 보면 건물 앞에서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건데.”
한 주무관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래 보였다. 건물 쪽만 마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좀 더 유심히 관찰해보니 그들은 헌터부 건물뿐만 아니라 옆 건물도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사실에 몸을 틀어 한 주무관을 바라보았다.
“봤어?”
“네.”
“…여기랑.”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가리킨 한 주무관의 손가락이 내 방향, 정확히는 옆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랑 연결된 거라곤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지.”
이곳과 저곳이 연결된 하나라….
생각은 길지 않았다. 곧바로 뇌리를 스쳐 지나간 한 사람에 나 또한 심각해졌다.
“혹시 세현 씨를 기다리는 걸까요?”
“아무래도 저쪽이랑 이쪽 연결고리라곤 그 녀석밖에 없으니까. 혹시 뭐 들은 건 없고?”
특별할 게 뭐 있나 싶었지만, 바로 기억이 나는 건 없었다.
“그냥 똑같아요.”
“흐음.”
“거기서 뭐 해? 다들 와서 돕지 않고!”
“바로 가겠습니다!”
팀장의 일갈에 한 주무관이 빠르게 감찰부 자리로 향한다. 잠시 바깥을 살핀 뒤 그쪽에 합류해 서류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감찰부 사람들이 말하는 위치에 놓고, 또 포장하는 이에게 그것을 전달하던 중이었다.
“흠, 흠!”
조용히 일손을 돕던 팀장이 별안간 크게 헛기침한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기색에 서류를 든 채 팀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짐 다 챙기고 같이 식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드디어 회식하나요?”
“회식 좋죠!”
팀장이 물어본 대상은 감찰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반응을 보인 건 다름 아닌 팀원들이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전에 회식 날짜를 정해 놓곤 막상 하지 못했던 것이 떠오른다. 빠르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이들이 이쪽을 본다.
나야 회식이 있다면 좋았다. 그러나 이건 내가 답할 부분이 아니었다. 곧바로 이영혁 부장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혹여 말이 나올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럼 점심 회식 어떻습니까. 자리 옮기지 말고 여기서 만찬 즐기죠.”
침묵하던 한 주무관이 낸 의견을 들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저녁 회식이었다면 더 좋을 뻔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할 자리만 있다면야 문제 될 건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이영혁 부장이 감찰부 소속 두 사람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팀장을 바라본다. 나는 잠자코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라면 확실히 눈치 볼 일도 없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군요. 사실 저희도 이렇게 헤어지기 좀 아쉬웠는데 다행입니다.”
“좋습니다. 얼른 정리하고 메뉴 정해서 주문하죠!”
“예, 그럼 빨리 마무리해야겠군요.”
“다들 들었지? 빠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정리하자!”
이영혁 부장과 이야기를 나눈 팀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나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며 좀 더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서류 양이 많네요.”
이미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을 줄은 몰랐다. 서류 양에 질려 난색을 보이다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박스가 부족하단 사실에 곧바로 그쪽을 지원했다.
“제가 박스 조립할게요.”
“오, 좋아. 그럼 박스 조립하는 족족 우리 쪽이랑 이 부장님에게 건네고.”
“네.”
그거야 어렵지 않았다. 박스를 조립해 테이프로 단단히 바닥과 옆을 고정 후 팀원들과 감찰부 쪽으로 넘길 때였다.
“그래도 외장하드에 자료가 많아 다행입니다.”
“…….”
건네받은 박스에 서류를 채운 뒤, 테이프를 붙여 봉한 이영혁 부장이 웃으며 말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절로 시선을 피하게 된다. 그도 그럴 만했다. 감찰부가 오기 전 나눴던 이야기들과 더불어 초반에 컴퓨터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일부러 서류로 만들어 건넸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이영혁 부장의 옆에서 서류 정리 중이던 박 주무관을 바라보니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역시, 나만 찔리는 게 아닌 모양이다.
“흠, 흠! 그나저나 우리 점심은 어떤 메뉴로 갑니까?”
아무래도 어색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박 주무관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쪽을 보며 살짝 윙크하는데, 함께 화제를 바꾸잔 신호로 보였다. 나는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점심 메뉴가 궁금하네요.”
“중식 먹을까?”
“어, 음….”
중식을 먹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헤어지는 날에 중식을 먹는 건 아니었다. 난색을 보이고 있자니 바로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어야지.”
옆을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출입문 쪽에서 박스 정리 중이던 김 주무관이 씩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메뉴를 말하라는 듯 눈을 끔벅이는데, 이것 또한 다른 이들에게 결정권을 줘야 마땅했다.
“메뉴는 감찰부 분들이 정해야죠.”
그래, 평소 같았다면 메뉴를 정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영혁 부장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에이, 저희가 말을 꺼냈는데, 당연히 우리 팀장님이 쏘셔야죠!”
“맞습니다! 한 끼 대접은 해야 저희 마음이 편합니다!”
“굳이, 정말 굳이 사셔야겠다면 후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부장님.”
“…어제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해서 당연히 제가 사려고 회식에 응한 건데 말이죠.”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한 듯 이영혁 부장이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팀장이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저는 헌터부, 이 부장님은 감찰부를 맡는 건 어떻습니까? 따로 불러 같이 먹으면 되니까요. 대신, 후식은 이 부장님께 얻어먹겠습니다.”
“하하, 그거 좋네요.”
혹여 이 또한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하던 내 걱정과 달리 이영혁 부장은 그 제안이 퍽이나 마음에 든 듯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메뉴 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곧 점심시간이네요.”
“좋습니다. 다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내 카드 사용은 오늘까지니까 염두에 두고!”
“비싼 거요!”
“아무래도 비싼 거죠!”
“당연히 비싼 거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메뉴를 결정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사람이 같은 말을 뱉는다. 이번 기회에 비싼 걸 먹고 말리란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일까, 멈칫하던 팀장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그냥 날을 잡았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 적어도 내년이 돼야 봉인이 풀린다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오늘 야무지게 써야죠!”
“그럼요!”
“막내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세 사람의 반응을 보던 팀장이 이쪽을 보며 묻는다. 동시에 세 쌍의 눈동자가 날 바라보며 이리저리 눈을 움직인다.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걸 보아하니 여기서 저렴한 걸 먹겠다고 하거나 한다면 역적이 될 게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입을 뗐다.
“전 그냥 다른 분들 의견에 따를게요.”
“그래? 그렇다면 메뉴는 내가 정해야지! 저희는 피자랑 치킨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 부장님.”
“와, 팀장님!”
“팀장님!”
내 뜻을 전하기 무섭게 메뉴를 정한 팀장이 곧바로 이영혁 부장에게 메뉴를 전달한다. 빗발치는 원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역시 팀장다웠다.
“풋! 예, 그럼 저희는 초밥으로 가겠습니다. 다들 동의하지?”
“예, 부장님.”
“좋습니다.”
팀원들과는 달리 이영혁 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주억인다. 어쩐지 괜히 비교되는 기분이 들어 팀장을 바라보니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보였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팀장의 얼굴엔 다시금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것도 꽤 짓궂은 미소가 말이다.
“안 먹을 거야? 그럼 라면 끓여 먹고.”
“에이, 팀장님. 저희 피자면 충분합니다.”
“거기다 치킨까지 사는데, 저흰 발언할 권한 따위 없죠. 암요!”
팀장의 장난을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팀원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넘쳐흘렀다.
“하여간에 오늘은 내가 주문도 넣을 테니까 다들 그만 구시렁대고 마저 정리하던 거 하자!”
“예!”
“어서 정리하자!”
팀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자, 구시렁대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상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짐을 싸는 데 집중하는 팀원들이다. 급변한 분위기에 당황한 감찰부 사람들이 보였지만, 어차피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변론할 필욘 없을 듯했다.
잠시 방황하나 싶던 감찰부 사람들도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박스 하날 조립해 이영혁 부장에게 건네며 벽시계를 확인했다.
“…….”
갓 정리를 시작한 거 같은데, 벌써 11시가 넘었다. 배달 시각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지금은 보다 속도를 내어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내가 시간을 확인하는 걸 보았는지 팀장과 이영혁 부장 역시 벽시계를 확인하곤 핸드폰을 꺼낸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이영혁 부장과 그 자리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팀장을 보니 아무래도 점심 주문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막내야, 박스.”
“네!”
아차,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지.
어서 정리해야 여유 있게 식사하며 그간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터였다. 음식 또한 꿀맛 같아질 테고 말이다.
나는 정신을 다잡곤 남은 상자 조립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