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9. 변화
…라고 생각한 지 몇 시간이 지났다고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나는 사무실 안을 서성일 뿐, 좀처럼 방문 의도를 밝히지 않는 남자를 곁눈질했다.
“…….”
어제만 해도 사이트 사용과 관련된 사항이 협회 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찾아왔나 싶었는데, 오늘의 방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저렇게 고소한 향을 내뿜는 빵을 들고 와서는 계속해서 머무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없었고.
팀장의 날 선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을 맴돌던 남자가 가까워지자, 한 번 더 빵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저도 모르게 넘어가는 군침에 미간을 찌푸렸다 펴며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남자는 내 앞에 와 서 있었다. 그것도 날 내려다보며 말이다.
조용히 남자와 시선을 교환하다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셔도 됩니다.”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이어진 침묵에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이영혁 부장님은 언제 옵니까?”
드디어 이곳에 온 본론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남자의 물음에 반색하며 아침에 전해 들은 말을 곧바로 전달했다.
“일정이 있어 점심 이후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대답을 들은 남자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별안간 남자가 빵이 든 종이봉투를 내 책상 한쪽으로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드시면서 하시죠. 방금 막 구웠다고 하더군요.”
“어, 그게….”
빵을 받을 만큼 친분이 있나 싶다. 아니, 친분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받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힌 찰나,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우린 그런 거 못 받습니다.”
“그럼요! 어디서 만든 무슨 무슨 법 때문에 그런 거 절대 받지 못하죠!”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 법이나 통과시키지 말든가. 병 주고 또 병 주려고 하나?”
내가 빵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팀원들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별안간 쏟아진 팀원들의 말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나 또한 이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어 남자가 종이봉투를 내 쪽으로 밀어 넣자, 그것을 밀어내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죄송하지만 손님,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 안 합니다만.”
“가격이 문젭니까? 받는 사람이 문제지? 어디서는 아기가 건넨 사탕 한 알 받았다고 바로 민원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런 거라면 더더욱 받을 순 없지! 누가 민원 넣을 줄 알고!”
“…….”
팀원들이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다시 날 바라본다. 아주 조금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이었지만, 그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이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는 이런 거 받지 못합니다. …무슨 무슨 법 덕분에요.”
“크흡!”
“풉!”
“…….”
단호하게 말하기 무섭게 팀원들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게 우선이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한 번 더 봉투를 남자 쪽으로 밀었지만, 도통 챙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 저 봉투를 두고 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였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챙겨 그에게 내밀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마음만 받겠다는 말 때문일까, 아니라면 단호한 내 태도 때문일까. 뭐가 되었건 간에 남자가 다시 빵이 든 봉투를 회수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무언가 불만에 차 보였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었다. 볼일을 마쳤으니 이젠 정말 일에 집중해야겠다. 물론, 남자가 완전히 사무실을 떠나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부장님은 오후에 오실 예정이니 볼일이 있다면 그때 다시 방문해 주세요.”
혹여 다시 사무실을 서성일까 싶어 어서 가보라는 뜻을 내포한 말을 던지며 한 손을 내밀어 출입문 쪽으로 안내할 때였다.
“연 주무관님.”
할 말이 남았는지 남자가 날 부른다. 고개를 주억이며 그에 응했다.
“네, 손님.”
“연 주무관님은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저요?”
갑자기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것 같다던 어제의 말이 떠올라 정색했다.
“좋아하는 거 없습니다.”
“…….”
좋아하는 건 많았지만, 굳이 협회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협회 소속인 김세현의 얼굴이 떠오르자 잠시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경계심을 한껏 끌어 올린 뒤, 말을 덧붙였다.
“설령 좋아하는 게 있어도 제가 말씀드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도 주변에서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탄성에 가까운 소리에 왜 그러나 싶었지만, 역시 지금은 이 남자를 잘라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면 좀 더 강하게 말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입이 한참 만에 열렸다.
“…그러시군요.”
“그렇습니다, 손님.”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이 부장님이 오면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이 부장님 또한 공무직에 있어서 이런 걸 받을 수 없습니다, 손님.”
만약 이영혁 부장이 이곳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말했을 거다. 청와대에 속한 이인만큼 더더욱 그 무슨 무슨 법을 신경 쓸 테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단호한 답이 돌아가서일까, 한 번 더 봉투를 내밀었던 남자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삽시간에 갈무리된 표정으로 남자가 씩 웃는다. 덩달아 눈매 역시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연 주무관님의 뜻 잘 전달받았습니다. 그럼 더는 방해하지 않고 가보도록 하죠.”
뭘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 남자가 간다니 다행이다.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변화인지라 그가 나갔음에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으려니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하듯 등에 매달렸다.
“우리 막내, 완전 대박인데?”
“내가 말했잖아. 시청에서도 밀리지 않더라니까?”
“아, 이영진 의원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저희도 봤죠!”
“그나저나 저 사람 나갈 때 표정이 영 별로던데,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등에 매달린 박 주무관, 그리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김 주무관과 한 주무관이 내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건만, 지금은 남자가 갔기 때문인지 몰라도 무척 좋았다. 평소보다 더 좋아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박 주무관이 말을 걸어왔다.
“막내야, 혹시 모르니까 한동안 우리 집 와서 지낼래?”
“박 주무관님 집이요?”
“응.”
“괜찮아요.”
표정이 별로이긴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라고 집까지 옮길까 싶다. 박 주무관이 건넨 파격적인 제안에 손사래를 치던 중, 팀장 자리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서라. 여기서 가장 안전한 곳이 우리 막내 집이거든?”
“혼자 사는데요? 거기다 단독 주택이라면서요.”
“그런 게 있어. 그 동네가 얼마나 살기 좋은 동네인데. 특히 막내 집은 던전이 근처에 생겨도 끄떡없다고.”
“맞아요. 살기 정말 좋은 동네긴 하죠.”
던전이 생겼다고 해서 끄떡도 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동네가 안전하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단기간에 우리 동네가 팀장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라며 고개를 주억이니 날 보던 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막내 걱정은 말고! 3분 안에 다 해결되니까.”
“…와. 저 지금 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는데요.”
“김 주무관님도요? 저도 지금 번뜩 떠오른 게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는 그거 맞아. 그러니 걱정 그만해도 돼.”
“진짜요? 이거 본격적이네?”
“가만히 둬도 되는 겁니까?”
“아아. 무슨 일이 있었다면 막내가 다른 반응을 보였겠지. 우리 막내, 항상 똑같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
도대체 무얼 떠올렸기에 저런 대화가 오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3분이라니. 즉석 카레도 아니고 갑자기 왜 3분을 거론할 이유가 있나 싶다. 멍청하게 팀원들을 둘러봤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답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준다거나 어깨를 토닥여주는데 그 행동이 마치 날 위로하려는 듯했다.
“그나저나 이거 테러 아닙니까? 점심 직전에 먹지도 못할 음식 냄새 폴폴 풍기고 가다뇨!”
“팀장님, 저 지금 빵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한 주무관의 말에 이어 박 주무관이 의견을 보탠다. 그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던 빵 냄새가 맡아지는데, 이보다 더 당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사줘야지! 이거 내 카드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사 와. 오는 길에 음료도 함께 사 오고.”
“예! 감찰부 분들 것도 한 아름 사 오겠습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느닷없이 자신들이 거론될 줄은 몰랐는지 황급히 손사래 치며 거절하는 이들이다. 그에 나는 다시 팀장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저희 먹는 거 사면서 좀 더 사는 거뿐인데요. 그냥 편히 드시면 됩니다.”
“…그래도 얻어먹는 게 좀….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들으니 절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방금 전 남자에게 했던 그 무슨 무슨 법 말이다.
“빵 좀 먹는다고 무슨 무슨 법에 걸리나요?”
“그럴 리가!”
“여기 민원인이 있나요?”
“없지!”
“없으니 괜찮습니다.”
“…….”
남자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팀원들이다. 마치 만담을 나누는 듯 서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데, 그 모습을 보던 감찰부 사람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저 표정만 봐도 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금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팀원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김 주무관님, 저랑 다녀오시죠?”
“나? 나야 좋지!”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김 주무관도 간다니 괜히 나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슬쩍 가고 싶다는 의견을 내니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럴래?”
“그럼 막내 손 가득 빵 사 와.”
“옙!”
“우리 팀장님 카드, 아주 소중하게 사용하고 오겠습니다!”
“저 그냥 막 긁습니다?”
“그래, 그래. 긁은 거 보고 내 성에 차지 않으면 한 번 더 내보낼 테니까 그런 줄 알고!”
빵 몇 개만 사도 사람 수가 있어 돈이 상당히 깨질 텐데, 잔뜩 신이 난 두 사람을 보니 아무래도 중간에서 잘 조율해야 할 듯했다. 계속해서 팀장의 카드를 엄청나게 긁어버리겠다는 두 사람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팀장의 대화가 이어진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에 나는 황급히 두 사람에게 팔짱을 끼며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