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19. 변화
“형, 잘 먹을게요.”
“네.”
챙겨 온 고기양이 상당해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그건 내 기우일 뿐이었다. 구워지는 족족 사라지는 고기와 더불어 방금 내온 냉면까지 빠르게 먹어 치우는 김세현을 보고 있자니 배가 불렀다.
사실, 이미 먹은 게 있어 배가 찬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 냉면을 먹기 시작하는데, 이전에 먹은 양이 있음에도 전혀 줄지 않은 속도가 경이롭다. 멍하니 그를 보다가 아직 입을 대지 않은 내 몫의 냉면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만 먹으려고요?”
“네.”
먹으려면 한두 젓가락 정돈 먹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건넨 그릇을 가리키며 묻는 이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활짝 갠다. 얼굴 가득한 미소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배가 차려면 먼 듯했다.
“형, 오늘 사무실에선 별일 없었어요?”
빠르게 손에 쥔 그릇의 냉면을 먹어 치운 김세현이 내가 내민 그릇으로 손을 내밀며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할 건 없었어요. 평소 같았고요.”
“청와대에서 나온 사람들은 언제 간대요? 매일같이 형 보러 가다가 안 가니까 일만 계속 생겨서 별론데.”
일이 생기는 것과 헌터부로 오는 것에 대한 관계성에 의문이 생겼지만, 김세현이 저런 말을 굳이 하진 않을 것이었다. 콜라가 담긴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다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이번 주에 마무리하고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그럼 다음 주부터는 없겠네요?”
“네.”
“그러면 월요일부터 바로 헌터부로 가야겠네.”
돌아간다는 날을 듣자마자 대번에 월요일부터 오겠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답할 정도로 기다렸나 싶은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다시 옆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 좋아요?”
빤히 날 바라보던 김세현이 씩 웃는다. 눈매가 예쁘게 휘어지니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화사하게 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반 박자 늦게 반응을 보였다.
“…나쁘진 않네요.”
“하, 진짜….”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마른세수를 한다. 그러더니 한참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데, 귀를 기울여도 제대로 들리는 말은 없었다. 조용히 그가 진정될 때를 기다린 지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김세현이 냉면 그릇을 다시 들었다.
“매번 말하지만, 형이라서 봐주는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정말 얄짤도 없는 거 알아요?”
뭐가 얄짤도 없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물어보기보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먹을 때보다 더 맛있어서 봐주는 거예요.”
“다행이네요.”
김세현의 집과 비교해 정말 보잘것없는 곳인지라 불편하거나 혹은 입맛이 떨어지거나 하면 어쩌나 속으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래서 말인데….”
말을 하다 끊고 냉면을 한 입 먹은 김세현이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지난주엔 우리 집에서 놀았으니까 이번 주는 형 집으로 놀아요.”
“여, 기서요?”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도 놀라웠는데, 우리 집에서 놀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당황하다가 난색을 보였다.
“저 주말에 출근해야 해요.”
“일요일은 출근 안 하잖아요.”
대개 그런 편이었지만, 헌터부는 아니었다. 격주제로 일요일 오전까지 근무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덩치가 그렇게까지 사람을 굴려요?”
일요일에도 출근한다는 말에 김세현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그 모습이 마치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해 아주 약간은 씁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도 일요일은 오전만 출근해요.”
“그럼 토요일 저녁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가면 되겠네요.”
“으음.”
“청소 때문이면 그때 같이 해도 되는데.”
“아뇨, 그건 좀.”
기석이 녀석이라면 또 모를까, 김세현에게 청소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호한 대답에 냉면을 먹다 멈춘 김세현이 뚫어져라 날 바라본다. 같이 해도 된다는 의지가 넘쳐흐르는 푸른 눈동자가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듯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니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음에도 말없이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해왔지만, 지금으로선 해 줄 말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다음에 꼭 초대할게요.”
“초대할 생각은 있고요?”
“그게….”
집에 들이지 않으려는 생각에 다음이란 말로 상황을 흐지부지되게 해보고자 했건만, 돌아온 답이 이럴 줄은 몰랐다. 대번에 양심을 찌르는 말에 난감해져 말을 흐리는데, 김세현이 대뜸 말했다.
“덩치는 집에 초대하고.”
“초대라뇨?”
“덩치 집에 들였잖아요! 한참 만에 나오던데!”
“어, 그건 초대가 아니….”
“초대가 아니면 뭔데요! 나는 안 되고, 덩치는 되고!”
이렇게까지 반응할 상황인가 싶을 만큼 김세현의 반응은 무척 격렬했다. 어깨가 들썩거릴 만큼 뿔이 난 모습에 황급히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초대 아니에요!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잠시 집에서 대화를 나눴을 뿐이에요.”
“그런 말은 사무실에서 하면 되잖아요! 단둘이! 그것도 여기도 아니고 집 안에서 이야기하고!”
“그게….”
“집에 들이면서까지 긴히 할 말이 있었다는 거 보면 형은 나보다 덩치가 더 좋은 게 맞죠? 그게 아니고서야 나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할 리 없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그래, 그건 결코 아니었다!
팀장은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을 뿐이었지만, 김세현은 아니었다.
“그럼 뭔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기 때문일까, 잠시 멈칫하던 김세현이 손에 든 냉면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나는 한참 말을 고른 후 입을 뗐다.
“팀장님은 직장 상사로서 정말 좋은 분이지만, 세현 씨는….”
“저는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은인이다? 하지만 이거론 김세현을 보며 드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건 또 이것대로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다.
말하려 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말을 들은 김세현의 반응이 문제였다. 혹여 내가 팀원들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날 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가 그간 쌓아온 관계가 무너질지도 몰랐으니까.
“…….”
다른 때 같았다면 어서 답하라 종용했을 텐데 오늘따라 말이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인 이에 압박감을 느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이렇게 계속 침묵하면 안 될 거 같단 생각에 말을 이었다.
“…하여튼, 팀장님이랑은 달라요.”
“푸하, 미치겠다!”
“세현 씨?”
이번에도 대답 대신 쳐다보면 어쩌나 했는데,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릴 줄은 몰랐다. 퍽이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당황하던 찰나, 눈가를 훔친 그가 눈을 마주해 왔다.
“형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
“표정만 봐도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훤히 보여요, 보여.”
딴에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바로 알아볼 만큼 마음이 드러났을 줄은 몰랐다.
어색하게 얼굴을 만지작거리니 김세현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간 김세현이 웃는 모습을 자주 봐오긴 했지만, 다른 감정이 하나 묻어나지 않고 오롯이 즐기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
신기함과 더불어 너무도 반짝이는 김세현을 얼마나 지켜볼 때였다. 한참을 웃던 그가 돌연 눈을 마주해왔다.
“…….”
김세현이 웃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가쁘게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아주 조금은 알 듯도 했다.
이렇게 티 하나 없이 맑은 얼굴을 한 김세현을 보는 건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하, 진짜 돌겠네.”
이번에도 빤히 날 바라보던 김세현이 조금 강한 어조로 말을 뱉는다. 이어 뒷머리를 헤집으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날 보길 반복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세현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형 마음 잘 알았으니까 우선은 먹던 거 마저 먹어요. 다 먹고 커피도 한잔해야죠.”
“그래요.”
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데, 김세현은 언제 웃었냐는 듯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따지고 보자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날 훑어보는 은근한 시선은 이전과 달랐으니까.
김세현이 불판에 남은 고기 몇 점을 내 앞으로 옮기곤 나머지를 제 앞으로 가져가 다시 냉면과 함께 먹기 시작한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먹으라고 챙겨준 마당에 거절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
어제의 예기치 못한 방문은 퇴근 후의 모든 일정을 흐트러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식사를 끝내고 정리할 때, 그리고 커피를 마시자며 은근슬쩍 안으로 들어오려는 김세현을 말리느라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아주 잠깐의 틈만 보였다 하면 집 안으로 들어오려던 이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즐겁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피곤하기도 한 하루였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반추하며 연거푸 한숨을 뱉을 때였다. 맞은편 집 담장 위의 검은 구체를 발견하곤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
한동안 보이지 않아 기억에서 잊히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그렇게 한참을 검은 구체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다가오던 차가 이내 속도를 줄이곤 대문 앞에 정차한다. 반쯤 열린 차 창문 너머로 팀장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막내야,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꾸벅 인사하며 차에 올라 벨트까지 매고 출발하기를 기다렸지만, 다른 날관 달리 좀처럼 차는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함에 운전석으로 고개를 틀었다.
“팀장님?”
“…흐음.”
뭘 하나 싶었는데, 팀장은 집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팀장은 매번 이곳에 올 때마다 주변을 살폈었다. 혹여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싶어 창밖을 보며 물어보았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아. 동네가 참 조용한 거 같아서 자꾸 보게 되네. 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매번 보기에 뭔가 이상한 게 있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동네 칭찬에 괜히 칭찬받은 기분이 들어 볼을 긁적였다.
“좋은 동네예요.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너만 봐도 그런 거 같다.”
내 대답을 들은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네 온다. 따라 미소를 지으니 팀장의 입가 역시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 출발하자.”
“네.”
자세를 바로 한 그가 차를 출발시킨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동네 모습을 눈에 담았다.
“…….”
이런저런 입지 면에서는 다른 지역보다는 뒤떨어지는 게 현실이었지만, 주거지로서는 조용한 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동네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차는 큰 도로에 접하기 직전이었다.
“슬슬 라디오나 들을까?”
“좋아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이 곧바로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를 켬과 동시에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파묻었다.
어제저녁엔 김세현이란 큰 폭풍이 지나간 터라 하려던 일을 제대로 못 했다. 사무실에 가 일하는 중간중간 타 지역 공무원들을 살피려면 오늘 일과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
어제저녁, 김세현이란 큰 폭풍이 지나갔기 때문일까, 부디 오늘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진심으로 바라며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