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07)화 (107/246)

104화

18. 뜻밖의 상황

“은퇴했다면서도 아직도 그렇게 갖고 싶대?”

“말조심하십시오.”

“이 이상 어떻게 조심하라고. 뒷방 늙은이는 이제 늙은이답게 곱게 죽으라고 할 수도 없잖아?”

“도련님!”

“스무 살까지만 협조해 준다고 했지, 그 이상은 응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어째서 내가 영감탱이 뒷배경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도련님은 어르신의 친손자이니…. 컥!”

날이 선 언사가 오가던 중 갑자기 상대방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 숨이 막힌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호기심을 채우려 다시 문으로 가 몰래 엿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까.”

“크흡!”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세현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웅얼거리는 소리 위로 거친 숨을 토해 내는 상대의 소리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짧게 듣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들은 사적인 대화 내용은 다른 이들이 들으면 안 될 것이었다. 그래, 그 다른 이들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이미 들은 내용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했지만, 더는 듣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다시 빈백에 자리를 잡았다.

“…….”

두근두근.

막상 귀를 막으니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내 안의 소리가 무척 잘 들렸다. 점차 속도가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들으며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할 때였다.

달칵.

미약하게나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는 김세현의 모습이 보였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화가 잔뜩 묻어났건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표정은 무척 온순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에 슬쩍 고개를 움직여 김세현의 뒤를 살펴보았다.

혹여 제삼자가 보이진 않을까 했는데, 거실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슬며시 귀에서 손을 떼어 내던 순간이었다.

“하늘 형.”

“네.”

“설마, 귀 막고 있었던 거예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김세현이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앞부분은 피치 못하게 들었어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 김세현의 눈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하하!”

별안간 김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저리 웃으니 무슨 상황인가 싶다. 멀거니 그를 보고 있자니 눈가를 훔치며 김세현이 입을 열었다.

“아, 정말. 형은 최고예요.”

“어, 그. 고마워요.”

뭐가 최고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김세현의 기분이 좋아졌다니 다행이었다. 대답을 들은 그가 쿡쿡 웃으며 성큼 다가오더니 내가 앉은 빈백 옆 공간에 한쪽 무릎을 세우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빈백의 빈 부분을 양손으로 짚으며 얼굴을 내미는데, 성큼 좁혀진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식사하던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떨려 왔다.

“세상에 형 같은 사람이 가득하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이 잘 안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일머리가 썩 좋지 않은 터라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하지만, 김세현의 말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아뇨, 형 같은 사람이 많으면 분명 잘 돌아갈 거예요. 욕심도 없고, 순하고, 착하고. 거짓말도 못 하고요.”

“아.”

거짓말이라는 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부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세현과 만나는 게 아닌가 확인하던 부팀장이 지금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잘했다고 하진 않을 것이었다. 정색하는 부팀장의 모습이 떠오르자, 괜히 지금 이 상황이 걱정될 따름이다. 나는 어색하게 입가를 말아 올리며 김세현의 시선을 피했다.

“형?”

약속이기에 김세현의 집에 밥을 먹으러 오긴 했지만, 평소 김세현과 단둘이 있지 못하게 하라며 단속하던 팀원들이 있었다. 귀가 따갑도록 조심하란 말을 들었음에도 약속이란 핑계로 이렇게 그의 집에 와 있다 생각하니 모른 체하고 있던 양심이 쓰라려 왔다.

“하늘 형,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어, 그게….”

허를 찌르는 말이 이보다 더 당황스러울 수가 없다. 어떻게 답해야 하나 망설이던 참에 김세현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진짜 숨기는 거 있어요? 뭘 숨겼는데요?”

숨기는 게 있으면 어서 말하라며 채근한다. 딱히 김세현에게 숨긴 건 없었지만, 충격으로 점철된 저 눈빛을 보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로 상황을 무마시킬 순 없을 듯했다. 나는 결국 조금 전 생각했던 걸 입에 담았다.

“그게 끝이에요?”

“네.”

“난 또. 나한테 뭐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잖아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피식 웃음을 터뜨린 김세현이 고개를 젓는다. 마치 안도하는 듯 보이는 모습에 곧바로 답했다.

“속이지 않아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현 씨한테는 감출 생각 없어요.”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에게 뭔가를 감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하늘 형.”

한참을 말없이 날 바라보던 김세현이 입을 연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형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네?”

갑자기 왜 안아 봐도 되냔 말을 하는 걸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하며 그를 보았다.

“그냥, 지금 꼭 한번 안아 보고 싶은데.”

“으음.”

“안은 김에 이것저것 하고 싶지만, 꾹 참아볼 테니까 한번만요. 네?”

애타는 눈빛으로 어서 답하라 종용한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별안간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요.”

그래, 지금 김세현이 포옹하고 싶다는 건 나완 전혀 다른 마음으로 요청하는 것일….

끄덕이기 무섭게 몸 위로 손이 올라온다. 그뿐이랴, 성큼 거리를 좁혀 온 김세현의 몸이 내 몸을 감쌌다.

“…….”

잠깐이라는 말을 말미에 덧붙였지만, 막상 안기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말할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쉬이 입을 열 수 없을 듯했다. 지금 입을 벌리면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하아.”

어깨에 턱을 올린 김세현이 크게 한숨을 뱉는다. 동시에 몸을 안은 손에 힘을 주는데, 더욱 밀착된 몸 때문인지 몰라도 더욱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형이랑 이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네요.”

저 말은 즉, 거실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몸을 꽁꽁 감싸는 손길에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그를 마주 안았다.

“…….”

뜻밖의 상황이라 그런 걸까, 손 아래로 경직된 듯 빳빳해진 몸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손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아주 조금은 김세현과 이렇게 마주 안고 싶단 욕심이 섞여 있었으나 그보단 김세현을 도련님이라 부르던 사람과의 대화 내용이 신경 쓰였다.

스무 살까지 협조한다느니, 뒷배경이 어쩌고 하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미성년자 시절의 김세현이 영감탱이란 작자에게 많이 굴려졌음을 의미했다.

따지고 지금도 어린데, 미성년자일 때 그런 일을 겪었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등을 토닥이다가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간 이전 일에 손을 멈췄다.

“왜 안 토닥여요. 얼른 해 줘요.”

아주 잠깐 멈춘 것뿐인데, 김세현은 다시 토닥이라며 채근했다. 나는 멈칫하다가 다시 손을 움직이며 떠오른 생각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첫 도움을 받았던 날 역시 그는 미성년자였다. 제아무리 헌터라고 한들 그 시간에 어린아이가 밖을 돌아다니게 놔두다니.

도대체 김세현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쓰이는 것이었다. 더욱 품으로 끌어당기는 김세현의 등을 토닥이며 복잡한 마음을 애써 속으로 집어삼켰다.

***

“…….”

느리게 흘렀으면 할 땐 빨리 흐르는 시간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해도 너무 했다.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린 주말이 아쉬워 연거푸 한숨을 뱉다가 거울을 보자 참으로 볼 만한 내 얼굴이 보였다.

주말에 휴식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피부가 광이 났던 적은 없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낯으로 이렇게 아쉬워하고 있는 꼴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났지만, 지금은 이렇게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연하늘.”

꿈과도 같았던 주말은 주말이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이제 곧 부팀장이 올 시간이기에 슬슬 챙겨 나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현관의 거울을 보며 옷차림을 살핀 뒤, 집을 나섰다.

“하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니 폐 깊숙한 곳까지 아침 공기가 들어찼다. 다른 날처럼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습한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집 앞을 서성이며 부팀장을 기다리다가 떠오른 무언가에 건너편 담벼락으로 눈길을 주었다.

“없네.”

오늘도 저 자리에 있다면 다녀와 꼭 물어보려 했는데, 검은 물체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발견하고 다음에 보려 할 때마다 사라지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집 주변에서 자꾸만 발견되는 걸까.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골목으로 접어든 차 소리에 그쪽을 보니 부팀장의 차가 오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차가 멈춰서길 기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팀장님.”

인사를 하며 차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벨트를 매려 몸을 틀었다.

“주말에 푹 쉬었나 보군요.”

“네. 덕분에 편히 쉬었어요.”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

다른 날관 달리 무척이나 묘한 말투다. 의아함에 부팀장을 보니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그가 보였다.

“부팀장님?”

“아닙니다, 아무것도. 별일 없는 거 같아 다행이군요.”

별일이라는 말과 함께 지난 주말 일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그렇다고 해서 주말 내내 김세현의 집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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