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06)화 (106/246)

103화

18. 뜻밖의 상황

하루하루가 지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앞에는 최신 영화가, 그리고 입가심할 팝콘과 콜라가 가득 준비된 상황이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반쯤 누운 자세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로 이 빈백이었다.

그저 몸을 감싸주는 것일 뿐이었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포근함 또한 선사하는데, 이 또한 무척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

게다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는 최신 개봉했다던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그것도 아직 VOD가 발행됐다는 말이 없는 영화가 말이다. 이게 가능한가 싶어 은근슬쩍 김세현에게 불법 파일이 아닌가 물어봤지만, 영화 기획사에서 직접 얻어 온 거라고 했다. S급 헌터는 뭐든 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S급 헌터가 곁에 있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긴장이 풀릴 순 없었다.

두 형사가 이끌어 가는 코믹 하면서도 액션 장면이 가득한 화면에서 눈을 떼 옆을 보니 영화 삼매경에 빠진 모양인지 김세현은 스크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손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움직이며 입으로 팝콘을 나르고 있었고.

그저 먹는 모습을 볼 뿐인데, 김세현답다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내민다. 입가를 말아 올리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화면 가득 형사 콤비가 투덕거리고 있었다. 코믹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웃으며 영화에 집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

이대로 잠이 든다면 정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잠이 들 수 있었지만,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께 영화를 보던 와중에 잠든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또 없었다. 결국 몰려드는 수마에서 벗어나고자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최후의 보루였건만, 이 행동도 잠을 물리치기란 어려운 듯했다. 꼬집을 때만 잠시 정신이 들 뿐이지 좀처럼 가시지 않는 잠의 무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무거워졌다.

아주 조금은 눈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아니지, 오늘 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이대로 잠이 들었다간 내일 눈을 뜰 게 분명했다. 이렇게 잠이 든다면 김세현이 실망할 게 뻔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만큼 잠이 몰려왔지만, 애써 상체를 일으켜 앉곤 콜라로 손을 뻗었다.

“형, 콜라 더 줄까요?”

“네.”

톡 쏘는 탄산 덕분일까, 아주 조금은 잠이 달아난 것 같다.

언제 챙겨 왔는지 김세현이 페트병을 열어 종이컵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컵을 건네는 이에 아주 조심스럽게 전달받곤 다시금 빨대를 입에 물었다.

“목말라요?”

“그냥, 영화 보면서 마시니 좋아서요.”

“그럼 나도 마실래요.”

불쑥 고개를 내민 김세현이 남은 빨대를 입에 문다. 쪼옥,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채운 콜라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볼 때였다.

“이렇게 먹으니 더 맛있는 거 같네요.”

“아.”

말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째 콜라를 마실 때보다 훨씬 얼굴이 가까워졌다. 워낙 잘생긴 사람인지라 그런 걸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도 어디 하나 모난 부분이 없었다. 옥에 티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에 감탄할 무렵이었다.

콰앙!

갑자기 울려 퍼진 굉음에 고개를 돌리니 형사들이 용의자의 자동차를 추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콜라를 내려놓곤 다시 빈백에 몸을 묻었다.

“…….”

아직 잠이 완전히 깬 게 아니라 다시 졸음이 찾아올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금은 아닌 듯했다.

“쳇.”

같이 영화를 보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들려온 혀 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김세현이 막 빈백에 몸을 묻는 모습이 보였다. 팝콘 통을 든 채로 말이다. 나는 다시 영화로 눈을 돌려 집중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잠을 버틸 수 있을 거란 내 예상은 보기 좋게도 엇나갔다.

자동차 추격 장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눈꺼풀 무게가 느껴졌다. 참아보려 했음에도 어찌 된 게 이번에는 참으려 해도 자꾸만 감길 따름이었다. 최대한 버텨 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결국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영화 소리, 딱 좋게 느껴지는 선선함, 그리고 몸을 감싼 빈백의 느낌까지.

정말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나 싶어질 지경이다. 기분 좋은 감촉과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입가를 올릴 때였다.

“…….”

알 수 없는 뭔가가 볼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데, 그게 무척 간지러웠다. 손을 들어 그것을 치우고 싶었지만, 무거운 몸은 좀처럼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미간을 구기며 어서 떨어져 나가길 바라고 있자니 볼을 건드리던 무언가가 조금씩 자리를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솜털을 만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게 입술 근처를 맴돌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길래 잠을 청하려는 사람을 간지럽히는 건지 모르겠다. 주변을 이리저리 오가던 것이 이번엔 입술을 점령했다. 미약한 터치였지만, 그 때문인지 입술이 너무 간지러웠다. 나는 결국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

혹시 모기 같은 게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다. 가슴팍에 손을 올려 다시 잠을 청하려던 때였다.

조금 전의 터치와는 달리 이번엔 뜨거운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그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은, 습기가 느껴지는 그런 바람이 말이다. 얼굴 왼편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영 불쾌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으음.”

고개를 트니 이젠 그 바람이 얼굴에 닿지 않는다. 만족감에 작게 소리를 뱉던 와중에, 이번엔 거친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후욱.”

“…….”

익숙한 듯하면서도 또 아닌 것 같은 게 영 거슬린다. 잠시 사라졌던 뜨겁고 축축한 바람 또한 목덜미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정말 이보다 더 성가실 수가 있나 싶어질 지경이다. 이번엔 확실히 내쫓고 말겠다는 의지로 강하게 팔을 몇 차례 휘젓기 시작했다.

삑. 삐빅, 삑, 삐익―

이건 무슨 소리지?

굉장히 익숙한 소리가 귀에 잡혔다.

그래, 마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듯한…. 누르는 듯한?

집에 누가 왔나?

아니, 올 사람도 없을뿐더러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기석이 녀석 하나밖에 없었다. 기석인 지금 군대에 있으니 다른 사람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낯선 사람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단 생각에 서서히 잠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문을 열려는 이가 누군지, 그리고 문이 열리기 전 안에서 대비해야만 했다. 자꾸만 늘어지는 몸에 힘을 실으며 정신을 일깨우던 중, 별안간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 소린?

생각지도 못한 문소리에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단 생각에 번쩍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아.”

김세현의 집에서 영화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영화가 끝났는지 스크린은 원래의 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뿐이랴, 영화를 보기 위해 불을 껐던 방은 어느새 은근한 조명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던 김세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문소리가 혹시 김세현이 방을 나가는 소리였던 걸까.

그래, 그거라면 방금 전 문소리가 이해되었다.

사람을 옆에 두고 잠이 들다니, 이보다 더 민망할 수가 없었다. 황급히 마른세수하며 자리서 일어날 때였다.

“…까.”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재차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마저 몸을 일으키곤 문 쪽으로 향했다.

“…셔야지요.”

문과 가까워지니 한층 더 잘 들리는 목소리다. 김세현이 아닌 제삼자의 목소리임을 확인하곤 더는 대화를 듣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내가 멋대로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무척이나 날이 선 김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멈칫하던 참이었다.

“그러게 전화는 받으셨어야지요.”

“내가 내 전화 안 받겠다는데, 그쪽이 무슨 상관이라고.”

“어르신이 거는 전화를 무시하셨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안 거야?”

“도련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저희에게 전달됩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

그저 아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비록 들은 건 짧았지만, 이렇게까지 사적인 대화가 오갈 줄은 추호도 몰랐다.

이 이상 대화를 듣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던 때였다. 재차 들려온 바깥의 대화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와 이 이상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청와대?

“그건 그쪽이 알 바 아니지 않아? 이미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말 나눈 것으로 아는데.”

“청와대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간섭하는 겁니다.”

사적인 대화에서 청와대까지 거론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