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05)화 (105/246)

102화

18. 뜻밖의 상황

생각지도 못한 접촉으로 인해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김세현과 함께한 저녁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빠르게 거실 정리를 마친 뒤, 그를 따라 부엌 맞은편의 방으로 들어섰다.

“와.”

간혹 집의 비는 방을 영화관처럼 꾸미는 집이 있다 들었지만, 이곳은 그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창문이 없는 방에 갖춰진 빔 프로텍터와 바닥에 놓인 빈백 두 개, 그리고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스피커 여럿이 놓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건 방 사이즈였다.

분명 작은 방이라 들었는데, 작은 방 크기가 우리 집 거실만 하다니.

이미 김세현의 집이 무척 큰 평수임을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체감될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놀란 마음을 안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계들과 방 내부를 훑어볼 때였다.

“형, 거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먹을 거 가지고 올 테니까.”

“네, 그럴게요.”

너무 부산스럽게 내부를 구경한 게 민망하다. 먹을 걸 챙겨 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빈백에 앉아 나른하니 몸을 늘어뜨렸다.

“하아.”

생각지도 못한 던전으로 인해 무척 긴 하루를 보낸 상황이었다. 지금 역시도 이렇게 그 하루가 끝나지 않은 채 김세현과 함께하고 있었고 말이다.

마치 몸을 집어삼킬 듯한 푹신함을 느끼고 있자니 괜히 노곤했다. 이제 곧 영화를 볼 텐데, 잠이라도 들면 큰일이었다. 나는 애써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읏차.”

그때였다. 김세현이 돌아온 건. 양손에 먹거리가 가득했다. 기지개를 켜던 손을 내리며 곁으로 오는 이를 지켜보았다.

“영화 볼 땐 팝콘이랑 콜라죠.”

역시 김세현은 김세현이었다. 성인 몇 명이 먹어도 남음 직한 양의 팝콘과 더불어 1리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종이컵만 봐도 아직 그의 배가 덜 찼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형, 여기요.”

“네.”

자리에 앉으며 김세현이 콜라를 건넨다. 그에 곧바로 건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잔을 막 받으려던 차에 김세현이 먼저 콜라를 놓았다. 쏟아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황급히 손을 움직였지만, 도리어 너무 급했는지 콜라는 내 위로 그대로 쏟아지고 말았다. 상의는 물론, 속옷까지 빠르게 스며든 액체가 차갑기 그지없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라 멍하니 있을 때였다.

“하늘 형,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흠뻑 젖어버린 옷은 문제였지만 말이다.

“영화 보기 전에 씻어야겠는걸요?”

“……”

“얼른 씻으러 가요. 아, 그리고 빨랫감은 욕실 바깥에 두고요.”

팝콘 통을 바닥에 둔 김세현이 자리서 일어나 손을 내민다. 온몸이 끈적했지만, 그렇다고 빈백을 짚고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손을 잡고 일어나자, 바지와 상의에 스며든 콜라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물도 아니고, 끈적한 느낌이 영 찝찝했다. 얼른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씻는 게 우선이었다. 김세현을 따라 몇 걸음 이동하다 발밑으로 흘러내린 콜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음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왜요?”

“수건 좀 가져다주세요. 일단, 여기서 대충 닦고 가야 할 거 같아서요.”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바로 반응하던 김세현이 별안간 멍하니 날 바라본다. 의아함도 잠시, 어느새 몽롱하게 풀린 얼굴로 몸을 훑기 시작하는데, 괜히 민망하고 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상황을 살피려는 행동이라고 치기엔 저 표정과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계속해서 내려가던 김세현의 시선이 하체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이윽고 좀 더 아래로 향한다. 찬찬히 내려가던 시선이 바닥에 닿더니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침묵에 민망함이 사라질 때 즈음이었다. 한참만에야 돌아온 답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네, 얼른 챙겨 올게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보다 더 사람을 긴장시킬 수는 없었다. 속의 감정을 억누르는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간다. 하지만 그 긴장은 더 길어지진 않았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방을 나서는 김세현의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김세현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긴장할 게 뭐 있나 싶다. 양쪽 팔뚝을 문지르며 마음을 다독이고 있자니 수건을 챙긴 김세현이 다시 돌아왔다.

“닦아줄게요.”

“제가 할게요.”

다른 것도 아니고 닦아주겠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난데없는 말에 당혹스러웠지만, 단호하게 잘라 내곤 수건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그리곤 빠르게 상체를 닦은 후 하체 쪽, 특히 바짓단 쪽을 닦으며 밑단을 접어 올렸다.

“후우.”

하필 그 타이밍에 콜라가 흘러내릴 건 뭔지 모르겠다. 찝찝함이 배가 되는 기분에 빠르게 닦아 내곤 이번엔 젖어 버린 바닥을 대충 닦기 시작했다.

“바닥은 내가 정리할 테니까 어서 가서 씻어요.”

“발밑이라도 좀 닦아 내려고요.”

여기서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는다면 이동하는 동안 콜라 흔적이 심하게 남을 것이었다. 김세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콜라와 발바닥을 1차적으로 닦아 낸 뒤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끈적끈적한 건 씻고 나와서 한 번 더 닦으면 될 거 같아요.”

“그건 내가 할게요. 형은 가서 씻어요.”

“…그럴게요.”

자꾸만 어서 욕실로 가라는 게 아무래도 꼴이 볼 만한 듯했다. 하긴, 그게 아니고서야 조금 전 내 상태를 살필 때 그리 집요하게 보진 않았을 거다. 나는 처음 집에 왔을 때 김세현이 안내했던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

“…….”

콜라만 잘 건네받았다면 지금쯤 영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을 거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다가 뒷정리가 남아 있음을 상기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어서 정리하고 콜라 흔적을 없애는 게 급선무였다. 앉아 있던 빈백에도 콜라 흔적이 남은 만큼 그 또한 정리해야 했고 말이다.

“형, 문 앞에 옷 가져다 놨어요!”

“네!”

빠르게 몸을 씻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김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이 벌써 건조까지 되진 않았을 테니 아마 본인 옷을 준비했을 것이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의 옷을 이런 식으로 입게 될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렇게 그의 집에서 샤워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 또한 상상해 본 적 없었고 말이다.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멍하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빠르게 몸을 헹군 뒤 대충 몸을 닦곤 그것을 대충 허리에 두르며 욕실 문을 열었다.

“세현 씨?”

바닥 정리를 하겠다고 한 터라 당연히 방에서 뒷정리 중일 거로 생각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김세현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벌써 정리 끝났어요?”

“…….”

“세현 씨?”

또다, 저 표정.

콜라를 뒤집어쓴 날 바라보며 짓던 예의 그 표정이 다시금 김세현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니, 어떻게 보면 좀 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얼굴 근육의 힘이 완전히 다 풀린 듯한 김세현을 볼 때였다.

지잉― 지이잉―

혹 내 전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던전으로 가는 길에 진동을 푼 터라 이 소리는 김세현의 핸드폰이 내는 소리일 것이었다. 나는 좀처럼 움직임이 없는 그를 보며 거실을 가리켰다.

“전화 왔어요, 세현 씨.”

뭐라 답이 돌아올 법도 한데, 좀처럼 답이 없다. 그저 멍하니 날 바라볼 뿐인 이를 재차 불러 봤지만, 초점이 있나 의심스러운 눈동자엔 내 모습만이 가득했다. 이렇게 뜸들이다간 전화가 끊길 텐데. 한 번 더 그를 부르며 전화가 왔다고 알리려 했지만, 염려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

진동 소리가 사라진 곳에는 고요만이 감돌 뿐이었다.

정적이 길어지니 수건 하나 걸친 채 그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보다 민망할 수가 없다. 서서히 부끄러움도 차오르기 시작했고 말이다. 나는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다 바닥에 놓인 옷가지를 발견했다. 김세현의 시선을 잔뜩 의식하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인 옷을 챙긴 뒤 다시 욕실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얼른 입고 나올게요.”

이번에도 역시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메두사의 공격이라도 받은 듯 제자리에 우뚝 선 김세현을 뒤로한 채 문을 닫곤 챙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사이즈를 말한 적이 있었나?

당연히 김세현의 옷인 줄 알았는데, 하나씩 입고 있자니 내 몸에 딱 맞았다. 심지어 속옷까지도 말이다.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마저 옷을 입는 게 우선이었다. 베이지색의 반바지와 흰 티를 입고 욕실 문을 열자, 여태 그 자리에 서 있는 김세현이 보였다.

넋이 나간 모습 그대로 말이다. 아무래도 먼저 말을 걸어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 생각과 동시에 바로 입을 열었다.

“세현 씨, 걸레나 일회용 물티슈 있으면 주세요.”

“…….”

“세현 씨.”

“아!”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했다. 강한 어조로 그를 부르자 반 박자 늦은 그의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한 번 더 걸레나 일회용 물티슈를 요청했다.

“벌써 다 입었어요?”

“네?”

있다, 없다로 답할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어색하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놓친 거니까 어쩔 수 없죠. 얼른 정리해서 영화나 봐요.”

“그래요.”

뭐가 아쉽다는 건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뒷말은 나 또한 바라던 일이었다.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방으로 가 김세현과 함께 뒷정리를 시작했다.

지잉― 지이잉―

“세현 씨 전화 왔나 봐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조금 전 전화를 건 사람이 한 번 더 건 게 아닐까 싶었다. 자리를 뜨는 그를 보다가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 왔어요.”

“전화는요?”

방금 전화를 받으러 가 놓곤 벌써 돌아올 줄은 몰랐다.

“스팸이더라고요.”

“이 시간에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깨를 으쓱인 김세현이 픽 웃으며 바닥을 닦기 시작한다. 이 시간에 스팸 전화가 올 수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던전도 생성되는 마당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조언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하는 게 좋았다.

“내일 스팸 전화 왔다고 신고하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그래, 던전과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 시각에 스팸 전화를 하는 건 납득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미 법으로도 밤 9시 넘어 스팸 활동을 하는 게 금지된 만큼, 확실하게 정리해야 마땅했다.

“형이 도와주면요.”

잠시 침묵하던 김세현이 씩 웃으며 말을 뱉는다. 약간의 어리광이 느껴지는 말투가 귀엽기 짝이 없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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