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104)화 (104/246)

101화

18. 뜻밖의 상황

“어서 먹어요.”

“…….”

배가 고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리 안 먹는지 모르겠다. 쥐고 있던 집게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냉면 또 만들어 올까요?”

평소 김세현의 식사량을 보건대 지금껏 먹은 양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갔을 것이었다. 이미 냉면 세 그릇에 갈비 1㎏을 먹긴 했지만 말이다.

“…….”

다른 때 같았다면 금방 반응이 올 텐데, 좀처럼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얼굴로 답하려는 듯 김세현의 얼굴엔 불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내 몸 곳곳을 살피며 말이다.

혹여 그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있는 걸까 싶어 슬쩍 시선을 내려 살폈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김세현이 준 앞치마도 하고 있었고, 깔아 둔 신문지 위에 앉아 있었고.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형.”

드디어 어떤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하려는 모양이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네, 세현 씨.”

“정말 안 씻을 거예요?”

“아.”

“형 입을 옷도 다 챙겨 뒀다니까요?”

…그거 때문이었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손 씻었으니 괜찮아요.”

깔끔하게 씻고 옷도 새로 챙겨 입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집에서 할 일이었다. 김세현이 여기서 씻고 옷도 갈아입어도 된다고 허락했다고는 하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곳이었다면 조금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응했을 거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세현의 집에서 그런 행동을 할 만큼 내 배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생각을 행동으로 한다는 건 힘들었다.

“…….”

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일까, 표정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불만을 토해낼 듯한 모습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집게를 들어 잘 구워진 고기를 김세현 쪽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세현 씨 덕분에 호강하네요.”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기 위해 호강이라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무작정 회피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간혹 고기가 정말 당길 때 집에서 홀로 구워 먹기도 했지만, 그때 먹었던 고기와 지금 먹는 고기의 질 차이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

띄워주는 말을 할 때면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던 김세현이었는데, 이번엔 영 반응이 없다. 그에 재차 잘 구워진 고기 나머지를 김세현 쪽의 불판 가장자리로 옮겼다.

“어서 드세요. 고기 잘 익었어요. 맛도 좋고요.”

“씻고 나면 더 호강할 수 있는데.”

생각이 통하기라도 한 듯, 동시에 말을 꺼낸 상황이다. 내용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말이다.

한 번 더 씻기를 종용받아서일까, 혹 내가 놓친 게 있나 싶어질 지경이다.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고기를 굽기 시작한 현재 상황까지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

집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씻는 것을 포기한 채 함께 김세현의 집으로 왔다.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러운 집을 소개하는 김세현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도착한 욕실에 빠르게 손을 씻고 나왔었고.

나오자마자 마주친 김세현은 옷을 챙겨 왔다며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가 샤워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행동에 말문을 잃은 사이, 나와 김세현 사이에 울려 퍼진 배곯은 소리에 식사부터 하자며 곧바로 저녁 먹을 자리를 편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기를 굽기 전 김세현이 준 딸기가 그려진 빨간 앞치마를 입었었지. 시선을 내려 빨간 딸기 앞치마를 본 채 재차 기억을 반추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불만을 드러낼 일은 없었다.

설마하니 씻고 오지 않아 이러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이 앞치마를 입을 때 그리 흐뭇해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음.”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배가 덜 차 신경이 예민하다고밖에 볼 수 없을 듯했다. 나중에 올린 고기 역시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걸 확인 후 몇 점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 또한 김세현 쪽으로 몰았다.

“어서 드세요.”

“하아.”

말없이 나를 보던 김세현이 큰 한숨을 뱉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이어 멈췄던 젓가락을 움직여 야무지게 쌈을 싸 먹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내 예상이 맞은 듯했다. 고민거리가 사라지자 잠시 잊고 있었던 식욕이 되살아난다. 덩달아 쌈을 싸며 무심코 앞을 보니 이쪽을 바라보는 김세현이 눈에 들어왔다.

“왜요?”

이제 고기에 집중하나 싶었는데, 다시 또 손을 멈출 줄은 몰랐다. 날 보는 듯하면서 미묘하게 어긋난 시선 또한 묘하게 마음에 걸렸고. 곧바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무엇인지 확인하니 내가 방금 싼 쌈이 보였다.

“…….”

방금 야무지게 쌈을 싸 먹어놓곤 이걸 왜 보는 걸까. 이대로 먹기엔 마음에 걸려 쌈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을 걸었다.

“쌈 하나 싸 드릴까요?”

저렇게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면 내가 싼 쌈이 제법 맛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자칭 쌈 싸기 달인이라던 기석이 녀석도 내가 싼 쌈이 맛있어 보인다며 왕왕 부탁했었으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상이 맞은 듯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세현의 눈이 커지더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뿐이랴, 언제 불퉁한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 은근히 올라간 입매가 이 제안이 매우 마음에 들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미 1㎏가량 고기를 먹은 상황이었지만, 평소 김세현이 먹는 양을 생각해 볼 때 아직 배가 차려면 멀기만 했다. 배도 많이 고플 텐데 얼른 쌈 하나 싸 줘야 할 듯했다. 바로 상추와 깻잎을 겹쳐 들고 그 위로 갈비와 구운 마늘, 파절임과 쌈장을 기가 막히게 올려 오므린 후, 그것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진 김세현의 돌발행동에 황급히 내민 손을 뒤로 물렸다.

“왜 안 넣어요?”

당연히 손으로 받아 갈 줄 알았지, 이렇게 입을 벌리며 고개를 내밀 줄은 미처 몰랐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는 이에 솔직하게 답했다.

“그건 좀.”

쌈을 입에 넣어 주는 건 어지간히 친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무리였다. 상대가 식사하지 못할 만큼 손이 바쁜 상황이라면 또 달랐겠지만, 김세현은 아니었다.

“한 번도 안 돼요?”

쌈이 뭐라고 저리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날 보는지 모르겠다. 푸른 눈동자에 어린 묘한 실망감 또한 마음을 무겁게 했고.

“진짜 딱 한 번이면 되는데.”

“…딱 한 번이에요.”

그래, 한 번 정도야 민망함과 떨림을 무릅쓰고 해봄 직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쩍 벌린 김세현이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곤 쌈을 그의 입에 넣어 주곤 황급히 손을 뺐다.

“혀이 져서 마시써요(형이 줘서 맛있어요.)”

김세현이 맛있다는 말을 전해왔지만, 지금 나에겐 그 말이 중요하지 않았다. 쌈을 건넨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점차 손가락 끝에서부터 열감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

다른 것도 아니고 쌈을 먹이려던 중의 접촉이었다. 그런 상황에선 의도치 않아도 접촉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심장이 뛰고 또 떨리진 않았을 거다. 전부 상대가 김세현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었다.

“형, 나도 하나 싸 줄게요.”

손가락 끝을 스친 입술에 감정이 이렇게 요동치는데, 정작 입술 주인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신나게 쌈을 싸더니 상체까지 앞으로 기울이며 거리를 좁혀 왔다.

“형, 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김세현이 웃는 얼굴로 입을 벌리라 종용한다. 곱게 휘어진 푸른 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형?”

“아.”

나도 모르게 너무 얼굴에 집중한 모양이다. 김세현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다잡곤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냥 건네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김세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게다가, 게다가 아주 조금은 욕심이 나기도 했고 말이다.

“…….”

입 안으로 쌈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좀처럼 김세현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집요하게 느껴질 만큼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꼭 내 속내를 읽은 것만 같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쌈이 완전히 입 안으로 들어온 순간, 다급히 몸을 물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쳇.”

못마땅한 얼굴로 자기 손과 날 번갈아 보던 김세현이 혀를 찬다. 다른 날 같았다면 왜 그러냐 물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 전 내가 쌈을 건넬 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그저 손바닥으로 가린 입술로 온 신경을 집중할 때였다.

“하늘 형 입이 작은 거 같아서 작게 쌌어요.”

나완 달리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혀를 찰 때만 해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건만, 빠르게 감정이 갈무리된 걸 보면 조금 전 상황은 그에게 있어 나만큼 크게 다가오는 일이 아닌 듯했다. 가파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고, 마워요.”

“하나 더 싸 줄까요?”

“괜찮….”

“이번엔 내가 먹던 것처럼 싸 볼게요, 형.”

쌈을 싸주겠다는 건 좋았지만, 이렇게까지 거리가 가까워질 이유가 있나 싶다. 자연스럽게 곁으로 와 앉은 김세현이 날 보며 씩 웃는데, 그 모습 또한 너무 잘생겨 문제였다. 결국 반짝이는 얼굴을 피해 쌈을 싸기 바쁜 김세현의 손으로 눈을 옮겼다.

“형, 고기 더 넣을까요?”

깻잎 위에는 벌써 고기가 석 점이 올라가 있었다. 다른 건 전혀 넣지 않고, 오로지 고기만 싸서 먹던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됐어요.”

“형 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네요. …너무 작아도 좋지 않은데.”

작다고 해서 생활하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은 적은 편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고 말이다. 슬쩍 김세현을 보니 내 입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마저 쌈을 싼 김세현이 다시금 그것을 내밀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빼앗듯 가지고 와 입 안으로 우겨 담았다.

“…….”

괜히 한 번 더 건네는 걸 받아먹다가 재차 접촉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래, 내 안전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맛있어요?”

대답하고 싶지만, 입 안 가득한 쌈으로 인해 답하는 건 어려웠다.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이며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하늘 형, 배고픈데 냉면 또 먹어요.”

역시, 배가 안 찼을 줄 알았다. 대답 대신 자리서 일어나자 뒤따라 김세현이 일어났다. 함께 부엌으로 가 물을 안친 뒤, 끓기를 기다리며 정수기에서 물을 받을 때였다.

“형.”

“네, 세현 씨.”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잔뜩 신이 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곧 냉면을 먹을 거라 기분이 좋아진….

“우리 밥 다 먹으면 영화 볼래요?”

“영화관 가시려고요?”

“…그것도 좋지만, 저기서 봐요.”

김세현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부엌 맞은편에 방 하나가 보였다. 그것도 조금 전 집을 소개하는 와중에 보여 주지 않았던 그 방 말이다. 나는 고심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영화를 보는 건 좋지만, 시간이 많이 늦어질 거 같아서요.”

이미 늦은 시각까지 머무른 터라 자칫하다간 지하철도 끊길지 몰랐다. 택시를 이용하면 되었지만, 비용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시간이 늦어지면 뭐 어때요. 형이랑 같이 보려고 최신 영화도 골라 뒀는데.”

“그게, 교통편이 끊길 것 같아서요. 다음에 봐요.”

“…집에서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네?”

이게 무슨 소리지?

“당연히 집에서 자고 갈 줄 알았는데? 내일 출근도 안 하잖아요! 덩치가 출근 안 해도 된다고 연락이 온 거 다 들었는데!”

연락이야 받았지만, 어째서 그 전화가 김세현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것으로 연결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당혹감을 드러냈다.

“밥 먹기로 했잖아요.”

“이미 늦은 시간인데, 밥 먹고 같이 영화 보다가 잠도 자고! 내일도 같이 진득하게 시간 보내다가 일요일에 집에 가야죠!”

진득한 건 또 뭐고, 일요일에 집에 가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혼자 이미 계획을 짜둔 듯한 말투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렇게 웃어도 이번은 양보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나도 나였지만, 김세현이 오늘을 이렇게나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조금 전의 말처럼 구체적인 상황을 나열하진 못했을 테니까.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다 먹고 영화 봐요.”

영화를 보게 된다면 돌아가는 게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이렇게까지 기대감을 표출하는 걸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 후 영화를 보잔 말에 한결 누그러진 김세현의 표정을 보다가 끓기 시작한 물에 면을 넣으며 냉면 준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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