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17. 첫 방문
“이곳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주무관이 일러 준 것처럼 도착과 함께 공무원증을 내미니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경찰의 도움을 받아 싸이카를 타고 주소지와 한 블록가량 떨어진 곳에 도착해 나와 부팀장을 내려 주곤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하는 두 경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서 가죠.”
“네, 부팀장님.”
아직 갈 길이 남은 터라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부팀장과 함께 현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쑥대밭이 된 주변이 보였다. 움푹 팬 도로들과 함께 군데군데 무너진 건물들, 그리고 크게 훼손된 차량까지.
매체를 통해서 볼 때와 현장에서 상황을 볼 때의 차이는 정말 천양지차와도 같았다.
“조심해요.”
“부팀장님도 조심하세요.”
최대한 길이 뚫린 쪽으로 안내를 받은 터라 사람이 오갈 만한 너비의 길이 군데군데 보이긴 했지만, 평소 보던 평평한 길은 아니었다. 크게 솟아오른 보도블록 길을 돌아 그나마 멀쩡한 도로를 이용해 계속해서 박 주무관이 알려준 장소를 향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눈에 들어온 현장 상황과 코를 찌르는 낯선 냄새에 멀미가 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던전이 생성되면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헌터였다. 자기 목숨을 걸고 전투하며 사람들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전투가 진행된 장소에 직접 와 보니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간 매체를 통해 접한 내용만 가지고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만 했던 게 이보다 더 후회될 수가 없다. 그뿐이랴, 책상머리 앞에서 떠들기 바쁜 이들 모두에게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라고 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
말없이 그렇게 부팀장의 뒤를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가까운 거리를 돌게 만들던 잔해들이 조금씩 모습을 감춘다. 아니, 잔해들은 많았지만, 잔해의 크기가 작다고 표현해야 맞을 듯했다. 마치 제주도에서 본 돌담 정도의 크기로 산산이 조각난 건물 잔해를 보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곳이 이렇게 폐허가 된 모습을 보고, 또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기분은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일깨우는 듯했다.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 그리고 보는 것마다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릴 뿐이다.
그렇게 혼란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던 공간에 사람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다들 저곳에 모여 있는 듯합니다.”
“네.”
말없이 이동하던 부팀장이 오래간만에 말을 꺼낸다. 부팀장까지 들었다는 건 이제 곧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에 힘을 실었다.
“…까!”
“…니다만.”
“…라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웅성대는 소리로만 들리던 사람들의 말이 조금씩 분간되기 시작한다. 좀 더 가까이 가면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분간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이동했을까, 드디어 모여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발견했으니 이 아이템이 네 거다. 그 말 하고 싶은 거잖아!”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레드 리자드의 배를 가르기 전 이 개체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템은 제 소유인 거 아닙니까?”
“아니, 이미 죽은 개체에 다가가서 멋대로 배를 가른 게 누군데!”
“죽은 개체가 아니라 심장이 뛰고 있었대도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듯했다. 박 주무관과의 통화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드잡이질만 하지 않았을 뿐 곧 서로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팀장과 서강민에게 다가갔다.
“어, 막내 왔어? 부팀장님도 오셨네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보던 김 주무관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오는데, 꾀죄죄한 행색으로 저리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나는 슬쩍 웃는 것으로 그 감정을 집어삼켰다.
“예.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그것이…. 이미 들으셨겠지만, 아이템 주인을 놓고 옥신각신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기에 이렇게 다들 흙투성이가 된 걸까. 지난번에도 보긴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 다시 보니 한 번 더 현실감이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던전 클리어는 김세현 헌터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템 소유주는 김세현 헌터입니다만.”
김 주무관 옆으로 이동한 나와는 달리 팀장 곁으로 간 부팀장이 의견을 낸다.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방금 부팀장이 꺼낸 말은 나 또한 인정하는 바였다. 부팀장까지 합류한 터라 서강민이 이번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들었지? 아이템은 던전 클리어한 사람 소유가 되는 게 맞다니까 그러네!”
“던전 클리어와 이 몬스터 숨을 끊어진 건 별개입니다. 간혹 던전이 클리어되었다고 해도 명이 끊어지지 않은 몬스터가 있다는 것쯤은 부팀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이템이 나왔기 때문일까,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서강민이 저리 말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 몬스터의 숨이 끊어지기 전 아이템을 찾아낸 것이라면 지금 상황은 무척 억울할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아이템이 나올 리 없다는 식으로 말을 꺼내던 김세현의 말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아, 그러니까 곧 숨이 끊어질 몬스터 숨을 끊은 네가 아이템을 소유하는 게 맞다?”
“그렇습니다만.”
“그래? 계속 그렇게 우긴다, 이거지?”
“우기는 게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겁니다.”
서강민을 보며 픽 웃음을 터뜨린 팀장이 별안간 이쪽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 그가 잠시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말을 걸어왔다.
“아직 잉여 오려면 멀었어?”
“그, 조만간 도착할 예정입니다.”
“들었지? 곧 온다니까 어디 그놈 앞에서도 그렇게 우길 수 있나 보자고.”
김세현이 온다는 게 저렇게 으스댈 일인가 싶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니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팀장이 김세현보다 서강민을 더욱 고깝게 보고 있단 걸 말이다.
그걸 알아차린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딱딱하게 굳은 서강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가 팀장이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단 느낌이 들 만큼 성난 기세를 내보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그랬다.
“…….”
사람들이 자길 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걸까, 서강민이 대뜸 크게 한숨을 뱉더니 성난 기색을 갈무리한다. 이미 볼 장 다 본 터라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좋지 못한 처사인 터라 지금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하늘 씨 오셨네요.”
깜짝이야.
이렇게 갑자기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나는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네, 안녕하셨어요.”
“그, 못 볼 꼴을 보여 드린 거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서강민에 대한 말을 제법 들어서일까, 방금 전 대화를 들었음에도 딱히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별 감정이 없어도 되나 싶은 당혹감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강민은 죽을 뻔했던 내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었으니까.
“…….”
다시 말을 걸 줄 알았는데, 벙긋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다물더니 날 빤히 바라본다. 뭐라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그저 서강민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참이었다.
“형.”
난데없이 귓가에 들려온 낮은 목소리다. 흠칫하며 몸을 틀었다가 흰색 슈트 어깨선이 눈에 들어오자 절로 입가가 떨려왔다.
“뭘 그렇게 봐요? 나 오는 것도 모르고.”
목소리를 들으니, 그리고 이런 곳에 오며 저리 하얀 옷을 입고 올 사람은 누가 봐도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고개를 드는 대신 시선을 떨어트리자 흰 슈트론 부족했는지 백구두까지 신고 왔단 사실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이거 오늘 세트로 샀는데, 잘 어울려요?”
“그, 네.”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잘 어울리는 건 맞았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세현은 외모도 최고였지만, 몸 선 또한 최고였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샐쭉 휘어지는 눈가를 발견했다.
“…….”
어째서 이곳에 흰옷을 입고 왔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만나서일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덩치, 여기 내 거 하나 더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 있어?”
그런 나와 한참을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던 김세현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막상 김세현의 푸른 눈동자에 얼핏 보이는 내 모습이 사라진 건 무척 아쉬웠다.
“네 거? 당연히 여기 하나 있지. 그리고 하나밖에 없으니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지?”
“얼른 내놔. 나 바빠.”
“원래대로라면 바로 줬겠지만, 여기 이게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또 있어서 말이야.”
“…뭐, 좀 예쁘게 생겼나? 하늘 형이 갖고 싶다면 선물할 의향 있는데.”
뭐라고?
갑작스레 내 이름이 거기서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무척이나 위험한 발언 속에서 말이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공무원은 그렇게 비싼 건 선물 받지 못해요!”
“그냥 몬스터 몸에서 나온 돌덩이인데요?”
“그래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으로 알고 있었다. 김세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이템은 평생 살며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희귀한 물품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나에게 선물할 의향이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난 딱히 안 필요한데. 필요하지 않은 거 그냥 주는 것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럼 하늘 형한테 맡겨 두는 건요?”
“그것도 안 돼요.”
선물이 아니라고 한들, 그런 값비싼 걸 나에게 맡겼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었다.
“그럼 내가 형 집에 갔다가 깜빡하고 놓고 왔다거나?”
“그것도 안 돼요.”
“내가 실수로 형 가방에 떨어…”
“다 안 돼요!”
주고 싶은 마음은 고맙지만, 저런 걸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잠시라도 맡고 있을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단호한 내 의지가 드디어 전달된 걸까, 계속해서 이 말 저 말을 붙이던 김세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젠 더는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혹여 다시금 그 말을 꺼내진 않을까 김세현의 입을 경계하던 중이었다.
“흠, 흠! 대화 도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아.”
잠시 김세현과 대거리를 하느라 여기가 어디인지 깜박했다. 팀원들뿐만이 아닌, 서강민도 함께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곤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며 서강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