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17. 첫 방문
“음, 음.”
출근길이 이렇게까지 즐겁고 또 설레는 건 전부 저녁에 잡힌 약속 때문일 거다.
평소보다 공들여 옷을 갖춰 입고, 옷차림을 살피고 나서야 현관을 나섰다가 대문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자동차 엔진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
조금만 보고 나서려 했는데, 벌써 부팀장이 올 시간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부랴부랴 차에 오르자 부팀장은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에게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방금 도착했어요.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옷차림도 그렇고.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제법 신경 쓴 거 같은데.”
열심히 공을 들인 터라 누군가 눈치챌 것 같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벨트를 매며 부팀장의 물음에 답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요.”
김세현과 만나기로 한 건 저녁이었다. 퇴근 후 다시 깨끗하게 씻고 김세현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아침부터 이렇게 공들일 이유는 없었지만, 역시 기분을 내니 저녁이 더욱 기대되었다.
“내일이 쉬는 날이라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네, 그 영향이 좀 있긴 하네요.”
내일도 출근이었다면 김세현과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졌을 확률이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이동 시간이 제법 걸렸으니까.
“……”
만약 내일이 평일이었다면 김세현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질 테고, 결국 안 가느니만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한다면 내일의 휴식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하늘 씨.”
“네, 부팀장님.”
“조사관들 쪽에서 다른 사인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까?”
“사인이요?”
“다들 같은 공간에 있기는 하지만, 이영혁 부장이 하늘 씨 옆자리를 고수하는 터라 혹여 옆자리에서 우리 모르게 쪽지를 보낸다거나 하는 일이 있나 싶어서 말이죠.”
이영혁 부장이 뭔가 열심히 날 도우려 하고 또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가장 먼저 나에게 묻긴 했지만, 그런 접촉은 일절 없었다.
“아직까진 없었지만, 혹 다른 사인을 주거나 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예.”
눈이 마주친 부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출발시킨다. 그에 자세를 바로 하며 앞을 보려던 참이었다.
“…….”
하필 사이드미러가 눈에 들어올 게 뭘까 싶다. 사이드미러에 내 모습이 보일까 싶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중, 옆에서 들려온 웃음소리에 상황을 깨닫곤 급히 몸을 바로 했다.
“거울 보고 싶어서 그래요? 선바이저 내려서 봐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거울을 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이드미러를 통해 거울을 보려 했던 내 모습이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슬그머니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보니 역시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상태라면 애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려 해도 붉은 낯빛으로 인해 별로 소용은 없을 듯했다. 슬쩍 거울을 보는 척 고개를 몇 번 흔들곤 다시 선바이저를 원위치시킨 뒤 다시 앞을 바라볼 때였다.
“하늘 씨, 나 좀 더운 거 같은데 에어컨 틀어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열기를 식히기엔 에어컨만 한 게 없었다. 반색하며 옆을 보자, 부팀장의 입가가 위로 올라간 모습이 보였다. 힐끗 날 보곤 다시 웃으며 에어컨을 트는데, 그 행동 속에 담긴 뜻을 읽어 내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열이 오른 날 위해 에어컨을 튼 거겠지.
민망함이 다시 얼굴을 뒤덮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또 티를 내게 된다면 에어컨 바람을 더 쐬어야 할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노력하며 한참 동안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열기가 점차 가시는 걸 느꼈다.
“부팀장님, 이제 에어컨 꺼도 될 거 같아요.”
“그래요.”
말을 걸자 부팀장이 웃으며 바로 에어컨을 끈다. 역시, 날 위한 배려였던 거다. 아닌 것 같지만 매번 섬세하게 챙겨주는 부팀장이 이보다 더 고마울 순 없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팀장에게 마실 거라도 대접해야겠다 다짐할 때였다.
“…….”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회사 건물이 목전이었다.
부드럽게 건물 주차장에 접어든 차가 빈자리에 주차한다. 나는 부팀장과 함께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출근길에 생각지도 못한 작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모든 게 완벽 그 자체였다.
다른 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고 있자니 이보다 더 뿌듯할 수가 없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살폈다.
“……”
오늘따라 이상하게 팀원들 모두가 일 처리를 하는 데 집중한 상황이다. 혹여 청와대에서 나온 이들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난 며칠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었던 터라 지금의 침묵은 이상했다.
혹시나 뭔가 알고 있진 않을까 싶어 옆자리를 봤건만, 김 주무관 역시 모니터를 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 바빴다.
“…….”
무슨 일이 있었다면 출근길에 부팀장이 언질을 줬을 거다. 하지만 지금 팀원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혹여 툭하면 내 옆자리를 차지하는 이영혁 부장 모르게 처리할 일이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이영혁이 다른 조사관들과 서류들을 살피기 바쁜 것을 확인하곤 슬쩍 김 주무관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김 주….”
“헉!”
특별한 것도 없건만, 이렇게 놀랄 일이 있나 싶다. 덩달아 놀라 그를 보다가 심장께를 만지작거리며 날 바라보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뭐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할 일 다 끝났어?”
“네. 손이 남아서요.”
손이 남는다는 말을 들은 김 주무관이 눈을 굴리다가 턱으로 자기 모니터를 가리킨다. 모니터를 보곤 어째서 그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
다른 작업 창들 사이로 보이는 타자 연습 프로그램과 함께 누군가와 채팅을 나누고 있었던 듯 채팅창이 떠 있었다. 되도록 채팅창 쪽으론 시선을 주지 않으며 다시 김 주무관을 보았다.
“이런 상황이야.”
시선을 거두자마자 김 주무관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저 미소에 담긴 뜻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다른 팀원들을 살폈다.
“…….”
뭔가 일감을 찾는다거나 대화를 나눌 때면 항상 말을 얹던 이들만 봐서일까,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이상할 수가 없다. 앉아서 말을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를 확인하곤 조용히 자리서 일어나 책상을 맞대고 있는 한 주무관과 박 주무관 자리 쪽으로 이동하며 그들을 불렀다.
“한 주무관님, 박 주무관님.”
“헉!”
“어? 어. 그래. 무슨 일이야?”
뭔가 열심히 타이핑하는 듯싶던 두 사람이 말을 걸기 무섭게 황급히 마우스로 무언가를 클릭하더니 몸을 바로 한다. 방금 전 본 김 주무관의 모습이 그 위로 덧그려지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혹시 맡기실 일이 있나 싶어서요.”
“일?”
“음, 나는 딱히 없어.”
“나도 지금 하는 거 말곤 할 일이 없어서. 예전에 내가 부탁했던 거 마저 작업 부탁해도 될까?”
“그럴게요.”
혹여 다른 급한 일이 있진 않을까 싶었는데, 이들 또한 급한 일은 없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부팀장과 팀장을 보았지만 그들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결국 얻은 바 없이 자리로 돌아오니 이보다 더 아쉬울 수가 없다. 오늘처럼 능률이 최고조일 땐 드문데 말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자리서 일어나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커피 드실 분?”
“난 패스.”
“나도.”
“저도 괜찮습니다.”
“아, 저희도 괜찮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무조건 마실 차를 주문할 팀원들이었다. 괜찮다고 말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은 채 다시 타이핑을 하기 바쁜 모습에 결국 혼자 마실 커피를 타고 와 자리에 앉았다.
“…….”
손이 많이 가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혼자 마실 커피를 타고 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힐끔 옆자리를 보니 다시 타자 연습을 시작한 듯, 김 주무관은 무척이나 진지한 모습으로 타이핑하고 있었다.
…막상 저 모습을 보니 나도 타자 연습이나 할까 싶다. 물론, 그 생각대로 정말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커피를 마시며 김 주무관을 비롯해 사무실을 살피며 잠시 휴식을 취할 때였다.
“…….”
지금 이 상황은 뭘까.
각자 하는 일이 바빠 시선이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 자꾸 눈이 마주치는 건지 모르겠다. 그뿐이랴, 서로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바쁜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들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니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긴 했다.
“으음.”
출근하던 이들 모두가 내 차림새를 보며 무슨 일이 있냐 물었었다. 심지어 이영혁 부장과 다른 조사관들까지 그런 말을 꺼냈고 말이다.
지금 모습이 좀 그런가?
내 차림새와 꾸민 모양새가 팀원들의 시선이 이렇게까지 잡아끌 상황인가 싶었지만, 어쩌면 그간 헌터부에 근무하며 몇 번 보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된 터라 신기해서 이렇게 보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이 시선을 설명할 방법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하아.”
커피를 마시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괜스레 오늘 저녁의 약속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약속하던 날 보았던 김세현의 모습을 상기하며 그렇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Rrrr- Rrrr-
“…….”
지금 울리면 안 되는 벨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곧바로 자리서 일어난 김 주무관이 긴급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며 절로 벽시계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