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16. 차오르는
“첫날이니만큼 오늘은 되도록 일감을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말입니다. 모두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팀장 옆자리에 놓인 책상 위로 차곡차곡 서류들이 쌓여 간다. 나 또한 팀원들을 도와 올해 발생한 던전 관련 서류들을 그들이 쓸 책상으로 옮겼다.
“…예상보다 양이 많군요.”
“아시다시피 최근 던전 생성 빈도가 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말입니다. 게다가 난이도 등급이 높아 자료량이 많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은 던전 생성되었을 때 주변 현황이 담긴 영상 및 CCTV로 촬영된 몬스터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마지막으로 외장하드 다섯 개를 책상에 내려놓자,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흐려지는 게 보였다. 저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그럴 만했다. 다른 곳에서는 끽해봐야 USB 정도나 받아 봤을 테니 말이다.
“혹여 외장하드 파일 날아가거나 하면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다시 재다운받아 전달하겠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하하, 조심히 다루겠습니다.”
부팀장의 설명을 들은 이영혁이 웃었지만, 그 웃음이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외장하드들 위에 떡하니 적힌 용량을 보면 재다운이란 말만 꺼내도 숨이 막힐 듯했으니 말이다.
“우선 내용을 살피며 혹 질문드릴 부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저희는 저희대로 할 일 처리하도록 하죠. 자, 다들 일 시작해. 밀린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예!”
“…네.”
일 처리야 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밀린 일이 한두 개가 아니란 건 거짓이었다. 하지만 팀장이 저런 말을 꺼낸 이유는 뻔했다. 한적한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 준다면 그들은 당연히 헌터부의 평소 모습이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테니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보다 더 팀장이 대단해 보일 수가 없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팀장과 같은 수완이 생길까?
엄청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할 듯도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
작업 폴더를 열어 몇 가지 서류를 띄워 살핀 뒤, 이어 한 주무관이 부탁한 작업물을 열어 하나씩 작업해 나가고 있을 때였다.
“막내야.”
“네, 팀장님.”
“손 남아?”
“네, 남습니다.”
한 주무관이 부탁한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저 사람들 앞에서 작업을 마친 서류를 열어 재작업하고 있었을 터였다. 곧바로 자리서 일어나 팀장에게로 가자 그가 서류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수기로 작성된 건데, 스캔해서 파일로 만들어 줘. 그리고 타이핑도 해 두면 좋고.”
“바로 할게요.”
이런 단순 작업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오타만 조심한다면야 이보다 쉬운 작업은 없었다. 복합기가 있는 곳으로 가 스캔을 뜨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스캔 파일을 열 때였다.
“연 주무관님.”
“네.”
“혹 제가 봐도 되는 파일이라면 도와드릴까요?”
“…음.”
난데없는 부름에 답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이영진의 말에 의자를 돌려 팀장을 바라보았다.
“뭐, 도와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봐야 할 서류가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연 주무관이 하는 작업은 지금 당장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서류라서요.”
“괜찮습니다. 미리 정리해 주신 서류 덕분에 대략 파악을 한 상태라 내일부터 천천히 살펴보아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막내야, 함께 하려면 해.”
“알겠습니다.”
굳이 같이할 게 있나 싶었지만, 팀장이 알았다고 한 마당에 뭐라 할 순 없었다.
의자를 끌고 온 이영혁이 웃는 얼굴로 노트북을 챙겨 옆으로 온다. 의자를 김 주무관 쪽으로 옮겨 앉아 그가 책상 한쪽에 자리를 펴는 모습을 보았다.
“잘 부탁합니다, 연 주무관님.”
“그, 네.”
“우선 제가 타이핑 먼저 하고 있겠습니다. 연 주무관님은 파일 작업 마무리하시고 타이핑하시면 됩니다.”
…사람이 너무 좋은 걸까, 아니면 이유가 있어서 친절을 보이는 걸까.
역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이영혁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금 전 전달받은 서류들을 스캔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 적이 있나 싶다.
샤워 후 그대로 침대로 가 몸을 던지곤 오래간만에 느끼는 듯한 이불자락을 품에 꼭 안으며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그저 청와대에서 조사관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전엔 부시장과 이영진 의원이 왔다 가긴 했지만 이미 그 기억은 오래전 일처럼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연거푸 한숨을 뱉으며 이불을 안고 뒹굴 때였다. 뇌리를 스친 이영혁의 미소에 결국 자리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그는 계속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팀원들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래, 거기까지였다면 이렇게까지 벌떡 일어나 앉진 않았을 거다. 내가 뭔가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손을 보태고 또 나중엔 커피까지 타 주던 이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 걸까.
그저 사람이 친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그 행동 전부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만약 친절한 사람이었다면 다른 이들과 날 대하는 태도가 다르진 않았을 것이었다.
“흠.”
유독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또 도와주려던 이였다. 그건 이영혁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사람조차 슬슬 눈치를 보며 뭐라도 하나 더 해 주려던 모습을 상기하자니 이보다 더 마음이 복잡할 수가 없다.
“…….”
혹 그들의 태도가 나만 인지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퇴근길에 부팀장이 한 말을 생각해 보면 팀원들 전체가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걸 잊지 말라던 그의 말을 떠올릴 때였다.
드르륵― 드르륵―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린다. 나는 곧바로 상대를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형!
“세현 씨.”
―이번 주 집에 오는 거 잊지 않았죠?
“네.”
―형 뭐 좋아해요? 소고기는 다음에 형 집 마당에서 구워 먹을 거니 패스하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준비해 둘 테니까.
잔뜩 신이 난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음식 따로 가리지 않아서 괜찮아요.”
―그래도 요즘 당기거나 하는 거 없어요? 기왕이면 형 좋아하는 걸로 준비하고 싶은데.
“음, 그럼 냉면 먹을까요?”
―냉면? 좋죠! 그럼 냉면이랑 양념갈비 어때요. 아니면 삼겹살 구울까요?
“다 좋아요.”
저 조합은 진 적이 없었다.
음식을 거론해서일까, 조금 전 간단히 저녁을 먹었음에도 괜히 배가 허한 느낌이다.
…주전부리라도 좀 찾아볼까?
배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 찬장에서 감자 맛 봉지 과자를 찾아냈다.
―형, 뭐 하고 있어요?
“아, 고기 이야기하니까 괜히 배가 허전해서요. 과자 꺼내고 있었어요.”
―형 오는 날 과자도 잔뜩 사 놓을게요! 같이 먹어요.
“하하, 좋아요.”
―…이럴 때 말고 영상 통화할 때 웃으면 좀 좋아요?
통화할 때마다 영상 통화를 입에 다는 김세현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좀.”
―매번 그건 좀이래!
“하하.”
―그래도 이제 곧 주말이니까 형 보고 싶어도 꾹 참아 볼게요.
“…….”
매번 꾹 참아 보겠다는 김세현의 말을 들을 때면 심장이 철렁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보고 싶어도 꾹 참는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설렘이 마음을 파고든다고 해야 마땅한 듯했다.
―진짜 진상들이 너무 많아서 이번 주말엔 형 보면서 좀 힐링해야겠어요. 형 혹시 금요일에 반차 쓸 수 없어요? 낮부터 계속 보고 싶은데.
“지금 조사관들이 파견 나온 상태여서요. 한동안 휴가나 반차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조사관?
“네. 요즘 난이도 높은 던전이 자꾸 생성되고 있잖아요. 그거 관련해서 청와대에서 조사관을 파견했거든요.”
―언제부터 왔는데요?
“오늘이요.”
―하.
조사관이 나왔다는 말을 들은 김세현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핸드폰을 쥔 손을 바꾸며 반대편 귀로 전화를 가져갔다.
―와서 이상한 짓 하거나 하진 않고요?
“딱히요. 던전 관련해서 열심히 조사 중이에요.”
―형한테 막 찝쩍거린다거나 그러진 않아요?
“…….”
찝쩍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과한 친절을 보이긴 했다.
―형?
“아, 그냥 다들 친절하세요.”
그래, 내게 과한 친절을 보이는 듯싶긴 했지만 이걸 김세현에게 말하기엔 애매하긴 했다. 어쩌면 빠른 일 처리를 위해 헌터부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일지도 몰랐고 말이다. 만에 하나 정말 이 생각이 맞는다면 그들은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요?
“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말을 놓쳤다. 아차 싶어 되묻자, 좀처럼 말이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세현 씨?”
―왜요.
“미안해요. 잠깐 그 사람들이 찝쩍거리는 게 맞는지 아닌지 되짚다가 말을 놓쳤어요.”
―내가 한 말 되짚어 본 거예요?
“네. 혹시나 놓치는 게 있나 싶어서요.”
―…뭐, 그런 거라면 봐줘야죠. 이거 내가 봐주는 거예요!
“그래요.”
봐주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목소리까지 드높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세현이기 때문일까, 저 행동 또한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하아, 형.
“네, 세현 씨.”
―얼른 시간 갔으면 좋겠다. 빨리 형 보면서 힐링하고 싶어요.
날 보며 힐링하고 싶다는 말이 참으로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답했다.
“이제 곧 주말이잖아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으론 안 될 거 같고. 열심히 있는 힘껏 참아 볼게요.
“하하.”
그저 알았다고 해도 되련만, 저기서 저렇게 말을 덧붙인다. 그것도 듣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말을 말이다.
―얼른 자요. 금요일부터 만나려면 컨디션 조절해야잖아요.
“그럴게요.”
―잘 자요.
“세현 씨도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끊긴 전화다. 한참을 그렇게 끊긴 전화를 귀에 대고 있다가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하아.”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울 때만 해도 심란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이 나왔건만, 지금 나오는 한숨은 담긴 감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쉬움만이 잔뜩 느껴지는 한숨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자리에 누워 조금 전 챙겨 온 과자를 보다가 그것을 협탁에 놓았다.
“…….”
지금 저걸 먹으면 다시 양치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방금 전 통화의 여운이 씻겨져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가 허한 느낌 정도야 내일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 여운이 씻겨 나갈 바에야 배가 허한 게 나았다.
이제 내일만 지나면 김세현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 이제 내일만 지나면 그와 오래간만에 만날 수 있었다.
김세현과 곧 만난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이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무척이나 오래간만에 느끼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