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6. 차오르는
인사를 나눈 부시장과 이영진 의원이 자리를 뜬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좀처럼 헌터 감찰부 소속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
말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헌터부 현황을 잠시 관람해도 되냐며 팀장에게 허락을 구한 뒤 사무실 곳곳을 살피는 척 날 관찰하기 바빴다.
차라리 모른 척하며 일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한 쌍도 아닌 세 쌍의 시선을 모른 체하기란 힘들었다. 나는 결국 자리서 일어나며 팀원들과 감찰부 소속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커피 드실 분?”
“나!”
“한 잔 부탁해.”
“저도 한 잔 부탁합니다.”
“나는 두 잔!”
커피란 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반응하는 팀원들이다. 뭔가 싶어 그들을 보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을 찡긋거리는 이도 있었고, 또 눈을 끔벅인다거나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며 신호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걸 모른 척하긴 그리 쉽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물어보잔 결론을 내리곤 이번엔 감찰부 소속의 세 사람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저희도 한 잔씩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혹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곧바로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
그저 사무실 분위기를 좀 바꿔 볼까 싶어 커피를 권했는데, 잘못 선택한 거 같았다. 등에 꽂히는 시선이 더욱 뜨겁게 느껴지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을 티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애써 몸의 긴장을 풀며 쟁반을 개수대 한쪽에 올려놓곤 종이컵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저들이 저리 날 바라보는 이율 정확히 모르겠다. 아니, 넘겨짚을 만한 이유가 많아서 그중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겠단 표현이 어울릴 듯했다. 믹스커피 봉지를 까 종이컵에 담고, 또 물을 받아 커피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내가 마실 커피까지 제조 후 곧바로 조사관 쪽으로 향했다.
“여기 커피 드시면서 작업하세요.”
“감사합니다, 연 주무관님.”
“잘 마시겠습니다.”
“커피 감사합니다.”
“…네.”
그저 흔한 믹스커피일 뿐인데,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원탁에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커피를 받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엄청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다.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단 채 짤막하게 답하곤 팀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잘 마실게.”
“고마워.”
“잘 마실게요, 하늘 씨.”
“막내야, 땡큐!”
“이따가 커피 또 당기면 한 잔 부탁하마.”
“네, 팀장님.”
먼저 이렇게 커피를 주문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전한 팀장이 꺼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어 보였다.
“아, 그리고. 이거.”
갑자기 책상 서랍을 연 팀장이 키 하나를 꺼내어 내민다. 사이즈를 보니 금고 같은 곳에 사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건물 지하에 보면 책상이랑 간이 의자 있거든. 박 주무관, 김 주무관이랑 같이 가서 챙겨 와.”
“아, 저희는 이곳이면 충분합니다.”
“서류가 좀 많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식사할 공간은 있어야 하고요.”
“그럼 저희도 돕겠습니다.”
“손님에게 일 시키는 건 좀 그런데….”
“손님은요. 같은 나랏일 하는 사이인데요. 게다가 헌터부 분들 덕분에 이렇게 무탈히 생활하고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다들 움직여.”
“예.”
이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피를 마시던 이들이 자리서 일어난다. 나는 그런 이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청와대에서 직접 파견을 나왔다는 말은 세 사람 모두 직위가 높음을 의미했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건만, 어째서 저리 몸을 낮추는 건지 모르겠다.
헌터부에서 접하던 고위직 공무원 중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썩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까, 이들의 이런 반응이 무척 신선했다. 크게 느껴지던 거리감 또한 제법 사라지는 것 같았고 말이다.
“어서 가죠. 막내야, 가자.”
“네.”
대화가 길었는지 김 주무관이 얼른 다녀오자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흠, 흠.”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옆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옆을 바라보았다.
“그, 다른 게 아니라 헌터부가 이렇게 따로 나와 지내고 있단 점이 신기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이렇게 평범한 질문을 꺼낼 줄은 몰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김 주무관과 박 주무관을 바라보았다.
“우리라도 멋들어진 청사 놔두고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수기로 협조문을 내놓으라던 협회 덕분이죠.”
평소와는 달리 퉁명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김 주무관이 말을 꺼냈다. 표정 또한 좋지 않았고 말이다.
하긴, 그도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사람보단 김 주무관이 헌터부에서 현 상황을 가장 질려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청와대에서도 지속적으로 협회로 말을 넣고는 있습니다만, 좀처럼 반응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골머리 깨나 썩고 있고요.”
“저희도 들었습니다. 청와대에서 헌터부를 돕기 위해 이런저런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요. 그 덕분에 이 정도 선에서 그칠 수 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니 다행이군요.”
대화를 이어 가며 점차 김 주무관의 표정이 펴진다. 그 변화를 감지했는지 상대 또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혹여 내가 모르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대치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며 이어지는 대화를 들었다.
“하아. 저들은 말해서 들을 부류가 아닙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다 못해 콧대까지 높다니까요? 아니, 요즘 시대에 누가 수기 문서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까? 그것도 같은 직장도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저희도 그 소식 듣고 긴가민가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콧대로 인해 청와대에서도 골치깨나 썩고 있고요.”
“그럴 만도 합니다. 자기들이 뭐라고.”
띵―
지하에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버튼을 눌러 다른 이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 뒤 맨 마지막으로 내리자 김 주무관 곁에 이영혁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보였다.
“…….”
“그래도 여러분들이 와 계셔서 한동안은 저쪽도 눈치 보는 척이라도 하진 않을까 싶습니다. 막 나가는 이들이라고 해도 높으신 분 눈치는 좀 보겠죠? 하하!”
“하하. 그런 도움이라도 된다면 다행이군요.”
“그런 도움이라뇨. 엄청난 도움입니다, 그건! 직접 협회 놈들 겪어 보면 왜 이런 반응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막내야.”
침묵하던 박 주무관이 입을 연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 주무관님.”
“저기 남색 문 보이지?”
박 주무관이 복도 오른쪽을 가리킨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과연 다른 색으로 통일된 문들과 달리 혼자 남색인 문이 보였다.
“저기가 비품 창고거든. 비품 창고라곤 해도 딱히 물건은 없지만 말이야. 물건 꺼낼 일 있으면 알려 주려고 했는데, 이제야 알려 주네.”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사무실 하나만 대여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비품 창고까지 대여 중일 줄은 몰랐다. …뭐, 사무실 크기를 생각해 보면 꼭 있긴 해야 했지만 말이다.
“막내야.”
“네!”
어느새 남색 문 앞에 당도한 김 주무관이 손짓한다. 팀장에게 전달받은 키를 꺼내어 잠긴 문을 열곤 옆으로 비켜섰다.
“일단 다들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창고라 너무 대놓고 보여 드리기 민망해서 말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김 주무관의 말을 들은 이영진이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서자 함께 온 이들 역시 물러선다. 호의로 가득한 저들을 보고 있자니 윗사람들 모두가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좀 더 저들을 향한 생각이 바뀔 때였다.
“막내야, 박 주무관. 들어가자.”
“예, 알겠습니다.”
“네.”
문고리를 잡은 김 주무관의 말에 곧바로 그 곁으로 갔다. 그리곤 문이 열리고 눈에 들어온 새까만 어둠에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 어디 스위치가 있을 텐데.”
박 주무관이 오른쪽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는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본 지 몇 초나 흘렀을까, 톡,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 불이 켜졌다.
“아.”
“정말 텅텅 비었지?”
“…네.”
있는 거라곤 비닐이 덮인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 쪽의 빈 책장 두어 개뿐인 내부밖에 없었다. 비품 창고라고 한 터라 이런저런 서류 및 사무실 물품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텅 비어 있을 줄이야.
“막내야.”
“네, 박 주무관님.”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가까이 보이는 박 주무관을 보고 있자니 그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더니 이내 귓가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자연스럽게 박 주무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친절해 보여도 너무 마음 놓지 말고. 저래 보여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
“…네.”
“저런 식으로 헌터부 관련된 약점 같은 거 털어갈 수도 있어.”
이제야 알겠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부탁하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사인을 보내던 연유를 말이다. 고개를 주억이며 잠시 허물어졌던 경계심을 다시 끌어올렸다.
“자, 얼른 꺼내자. 밖에 계신 분들은 저희가 물건 꺼내면 복도에서 받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어서 나르자.”
김 주무관이 책상과 의자를 덮고 있던 비닐을 걷으며 말한다. 어서 도우란 눈짓에 곧바로 비닐을 걷는 걸 도운 후 의자부터 밖으로 꺼냈다.
“책상도 바로 꺼내겠습니다.”
“예, 천천히 하세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영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뿐이랴, 곁의 두 사람 역시 호의적인 미소를 짓는데, 이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창고로 들어가 두 사람과 함께 책상을 밖으로 꺼냈다.
“그럼 올라가죠. 아, 연 주무관님은 의자 맡아 주십시오.”
“그래. 막내는 엘리베이터로 그거 옮기고 책상 놓을 공간 만들고 있어.”
한 사람이 의자를 맡긴 해야 했지만, 저 책상 크기를 보건대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로 옮기기엔 무리였다. 나는 곧바로 의자 세 개를 겹쳐 들었다.
“…자리 얼른 만들고 다시 내려올게요.”
“좋지!”
박 주무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따라 끄덕이곤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열리는 문이다. 빠르게 의자를 챙겨 내린 뒤, 사무실로 가 문을 활짝 열곤 의자를 챙겨 안으로 들어섰다.
“일찍 왔네?”
“자리 만드셨네요?”
“예. 이쪽으로 만들었습니다.”
팀장 자리 옆쪽의 빈 공간을 좀 더 널찍하게 만들어 둔 상황이었다. 그에 의자를 한쪽에 내려놓곤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책상을 준비해둘 걸 그랬나 봐요.”
“당연하지. 또 지난번 왕자 꼴 나는 건 못 참지!”
“하하.”
확실히 왕자 때처럼 내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곤란했을 거다. 긴급 전화 쪽으로 자리하고 있던 부팀장의 책상을 비롯해 세 주무관과 내 자리가 창가 쪽으로 바짝 붙어 있는 걸 보니 이보다 더 마음이 놓일 수가 없다. 이번엔 책상을 챙기러 밖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막내야, 넌 여기 있어. 내가 가마.”
“괜찮아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혼자 책상을 드는 것도 아닌데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다들 책상 챙겨서 올라오면 땀 한 바가지 흘릴 텐데, 시원한 커피 제조하고 있어.”
방금 커피를 마신 거 같은데, 또 커피를 준비하라고 할 줄은 몰랐다. 혹 내가 너무 연약해 보여 그런 걸까.
헌터인 팀장 눈에 내 모습이 눈에 찰 리 없었지만, 적어도 책상 정도는 들 수 있었다. 한 번 더 다녀오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정말 지하로 가려는지 소맷단을 걷어붙인 팀장이다. 옷 아래 잠시 감춰져 있던 울끈불끈한 근육을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려 내 팔을 확인했다.
“…네에.”
“풉! 그래, 다녀오마!”
내게 보여 주고 싶기라도 한 듯 팔에 힘을 주며 팀장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힘이 들어가자 더욱 단단해 보이는데, 이보다 더 내 팔과 비교될 순 없었다. 재차 시선을 내려 멍하니 허여멀건 팔을 바라볼 때였다.
“하늘 씨, 얼음은 넉넉합니까?”
“예. 오늘 분은 충분합니다.”
“그럼 어서 준비하죠.”
자리에 앉아 있던 부팀장이 웃으며 자리서 일어난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보니 아무래도 좌절하던 날 본 듯했다.
“…….”
민망함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얼른 준비하는 게 나았다. 근육으로 가득 찬 팀장의 팔뚝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부팀장과 함께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