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6. 차오르는
이 옷을 입고 맞이하는 게 조사관만이 아닐 줄은 몰랐다. 첫인상이 중요했기에 슈트를 챙겨 입었던 게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어질 지경이다. 슈트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한 듯해.”
“보기 좋은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옷 한 벌 장만할 걸 그랬나?”
만약 오늘 청와대에서 조사관을 파견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부시장의 눈 밖에 났겠지.
그게 아니라면 도착 시각이 가까워진 지금, 모두가 부산스럽게 옷차림에 신경 쓰고 있진 않았을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팀장과 부팀장까지 이렇게 옷차림에 신경 쓰는 걸까.
“옷 주름 간 건 어떻게 펼 수 없겠죠?”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동안 생긴 생활 주름까지 터치하는 걸까. 박 주무관의 말에 시선을 내려 바지를 바라보았다.
“…….”
박 주무관의 바지도 바지였지만, 내 바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한 구김이 가 있었다. 양손으로 바지를 붙잡고 슬며시 펴기 시작할 때였다.
“아서라. 바지 주름 잡힌 거까지 태클 걸면 가만히 못 있지!”
“팀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부시장이 주가 아니라 조사관이 메인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혹여 이쪽으로 보고 한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역시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인 상태였다. 입가를 씰룩이며 웃음을 참아내는 팀원들을 보고 있자니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만 같다. 그에 슬그머니 바지를 붙잡았던 손을 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에 힘썼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 다들 긴장해. 조회 때 했던 말 기억하고! 그리고 부시장이 말을 걸면 뭐든 예의 바르게 행동하자.”
“예!”
“네!”
책상에 기대어 서 있던 팀장이 몸을 바로 하자, 다른 이들 역시 몸을 바로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긴장된 몸이었기에 긴장을 누그러뜨리려 애쓰며 출입문을 응시했다.
“…….”
기왕이면 빨리 왔다가 갔으면 좋겠다. 이영진 의원도, 그리고 부시장도 말이다. 물론, 조사관들도 이른 시일 내로 청와대로 복귀했으면 했지만, 던전을 조사하러 나온 만큼 그 바람은 속히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다.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울 무렵이었다. 조용해진 사무실 덕분일까, 평소에는 잘 들리지도 않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는데, 이보다 더 빠르게 긴장감이 차오를 수가 없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온 모양인데요?”
“아아.”
고개를 끄덕인 팀장이 곧바로 출입문 쪽으로 향한다. 부팀장 역시 팀장 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바깥소리에 귀 기울일 때였다.
“…하시죠.”
“…겠습니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듯 사람들의 목소리가 좀 더 확연해졌다. 그에 자세를 한 번 더 점검하며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에드워드 왕자가 방문했을 때도 긴장하긴 했지만, 지금 느끼는 것과 당시 상황을 놓고 보면 좀 다른 느낌이었다. 에드워드 왕자의 경우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던 방문이었지만, 오늘은 직장 상사의 방문인지라 기분 자체가 달랐다.
“이곳입니다.”
“흠, 흠!”
그때였다.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가 들어도 이 목소리의 주인은 이영진 의원이었다. 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다잡으며 팀장이 출입문 손잡이를 잡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지 않아도 마중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능청맞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보좌관 일행을 맞이하는 팀장의 넓은 등판 너머로 정수리들이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차오른 긴장감에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풀며 마음을 다졌다.
“시간이 맞았다면 염 팀장의 에스코트를 받을 뻔했어.”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부시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 의원님.”
이영진 의원에게 인사를 건네며 팀장이 옆으로 비켜서자 드디어 드러난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백발의 노신사와 다른 이들을 보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래요.”
넉살 좋은 팀장의 인사가 낯설었는지 이영진 의원의 대답이 늦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사무실 안으로 함께 온 이들 모두가 들어왔음을 확인한 이영진 의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자 절로 손이 오므려졌다.
“헌터부가 항상 고생이 많습니다.”
“전부 의원님 덕분이지요. 항상 도움받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이영진 의원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하자 팀장이 웃는 낯으로 악수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웃는 낯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큼직한 스파크가 튀고 있음은 분명했다.
짧은 악수로 이영진 의원과의 인사를 마친 팀장이 이번엔 두 사람과 함께 사무실을 방문한 세 사람에게 시선을 준다. 나 또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그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서울시 헌터부 소속 염기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이번에 신설된 특별부서 던전 감찰부입니다. 저는 이영혁이라고 합니다. 염 팀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던전 감찰부 소속이라 하면 어떤 일을 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청와대에서 조사관이 나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신설부서까지 만들어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최근 생성되는 던전의 이상 현상을 조사하고자 신설되었습니다. 아, 감찰부라고 해서 헌터부를 감찰하러 왔나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서명과는 달리 던전 관련 조사만 할 예정이니까요.”
“후우, 그건 다행이군요.”
“하하.”
“그나저나 직책이 어떻게 되십니까?”
“따로 받은 것은 없습니다. 저희 셋 다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부서가 신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책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팀장은 또 어떻고 말이다.
던전 감찰부 소속 이영혁과 함께 온 두 사람, 그리고 팀장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염 팀장, 한동안 함께할 텐데 팀원들 소개하는 건 어떻겠나.”
“예, 부시장님. 다들 이쪽으로 오도록 해.”
“예.”
부시장의 말에 팀장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부시장이 있는 출입문 쪽으로 이동해 일렬로 섰다.
“이쪽은 헌터부 부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헌터부 부팀장 부유진입니다.”
“아, 부 부팀장님. 부 부팀장님의 명성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부 부팀장님이 안 계셨다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 뻔했는데, 덕분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그 상황을 마주한 헌터였다면 모두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겁니다. 그리고, 부 부팀장이라 불편하게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부팀장으로 불러 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
부팀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말이 오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부팀장이 병원 검진을 받는다며 휴가를 냈던 적이 있었다. 혹 그와 관련된 이야기인 걸까 싶어 귀를 쫑긋거렸다.
“이쪽은 한 주무관입니다. 던전이 생성되면 가장 먼저 출동하는 사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정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은….”
부팀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 전 짤막하게 나온 대화가 끝인 듯했다. 아쉬웠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가 올 거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차근차근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이윽고 내 앞에 섰다. 나는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며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는 우리 팀 막내입니다. 막내야.”
“안녕하십니까, 헌터부 소속 연하늘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뭔가 반응이 돌아올 법도 하련만, 좀처럼 말이 없다. 아니, 침묵하는 건 이영혁이란 사람만이 아니었다. 내 소개를 함과 거의 동시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다들 반응이 왜 이렇지?
“반갑습니다. 연하늘 주무관님.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언제 침묵했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이영혁이다. 조금 전의 침묵 때문일까, 기분이 정말 묘했다. 아니, 그보단 저 환한 미소부터가 마음에 걸린다고 봐야 했다.
악수하며 요목조목 내 얼굴을 뜯어보는 이다. 마치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듯한 모양새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애써 입가를 끌어 올렸다.
악수를 마친 이영혁이 함께 온 이들 쪽으로 향한다. 혹여 다른 말을 꺼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보다 다행일 수가 없다. 안도하며 긴장을 풀 때였다.
“…연하늘이라.”
생각지도 못한 이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그대로 쩡하고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움직여 부시장을 바라보았다.
“흐음.”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던 걸까. 눈길을 주기 무섭게 얽힌 시선이다. 이영진 의원처럼 불편한 시선이 아닌, 호감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입 안이 바싹 말라오는 건 어쩔 방도가 없었다.
“염 팀장.”
“예, 부시장님.”
“청와대에서 오신 분들이니 끝까지 잘 모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헌터부에 있다는 천사도 잘 보듬어 주고.”
“…….”
아….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부시장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던 건 부시장을 제외한 모두였던 듯했다. 뜬금없는 천사 소리에 한 번 더 사무실 안이 조용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과도 같았다. 어떤 이들은 나와 같은 심정으로, 또 어떤 이들은 무슨 말인가 상황을 살피는 모습이 이보다 더 크게 와닿을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