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76)화 (76/246)

73화

14. 이어지는

편해 보이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가 곁에 앉았다.

“여기요.”

“잘 마실게요, 형.”

“네.”

커피를 건네받은 김세현이 잘 마시겠다는 말과 함께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에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넸다.

“형 거 아니에요?”

“세현 씨 주려고 탄 거예요.”

마셨다간 잠이 잘 안 올 때도 있어서 되도록 밤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말없이 날 보던 김세현이 슬쩍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잔을 건네받는다. 조금 전과는 달리 조금씩 아껴 마시는 모습을 볼 때였다.

“형.”

“네.”

“일단, 좀 높은 사람을 고르다 보니 대통령을 고르게 돼서 미안해요.”

“…….”

“서울시장이 워낙 꼰대여야지, 어지간한 윗사람이 아니면 옹고집을 부리며 멋대로 하거든요. 장관 말도 안 듣는다니까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간 제가 얼마나 많이 도왔는데,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혹여 형한테 관심 보이거나 불필요한 행동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도 했으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고요. 이번엔 덩치 선에서 커버도 안 되었을 테고. 일 생기자마자 바로 연락한 거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요.”

따지고 보면 얼마 전에 만난 터라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매번 거리낌 없이 도와주는 게 너무도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담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항상 고마워요.”

“고마워요?”

“네, 엄청요.”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미안할 만큼 고마울 따름이었다. 대답을 들은 김세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무언가 생각을 고르는 듯한 모습에 잠자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흠, 소원 하나 정도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고마워요?”

“…네.”

손에 든 커피잔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내 다리를 접어 아빠다리를 하곤 이쪽을 향해 앉는다. 그에 나 또한 몸을 틀어 그를 보며 앉았다.

“나 지난번처럼 완전 시시한 그런 소원 빌 거 아닌데.”

“괜찮아요.”

지난번 김세현이 말한 소원은 정말 내가 생각해도 좀 시시하긴 했다. 물론, 그 덕분에 이렇게 제법 거리가 가까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괜찮다는 말을 들은 김세현이 멈칫하더니 이내 뚫어져라 날 바라본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눈을 마주하던 중이었다.

“…….”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몸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김세현의 모습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형.”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날 부른다. 나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소원 하나 쓸게요.”

“네.”

“…음.”

무슨 소원을 말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코앞까지 김세현의 얼굴이 다가온 바람에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형.”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김세현이 말하자 그의 입김이 얼굴에 닿는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 곳곳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숨결이 닿은 곳에 소름이 인다. 목 뒤쪽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얼굴 전체를 뒤덮다 못해 정수리까지 휩쓸었다.

게다가….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게 뻔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민망함이 튀어나오려는 걸 막아 냈다.

“…….”

그와 함께 김세현의 시선이 입술에 가 닿는다. 불빛이 있긴 했지만, 날이 어두워서인지 몰라도 시선을 내리까니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분위기가 매우 묘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좀 더 몸을 물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불렀다.

“세현 씨?”

“나 소원 지금 쓸래요.”

“그러세요.”

조금 전에도 했던 말인 거 같은데, 또다시 소원을 쓰겠다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형 집에 들어가 보고 싶은데.”

“어, 그건 좀.”

소원이니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뇌리를 스쳐 지나간 팀원들의 표정도 표정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집안 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소원인데요?”

“그래도 좀. 다른 소원 말해 보세요.”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무척이나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요.”

“…….”

“그거 말고 다른 거라면 들어줄게요.”

그래, 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뭐든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정말 뭐든 들어줄 거예요?”

“네.”

집에 들어가고 싶단 말을 거절했으니 다른 건 들어줘야 마땅했다. 나는 뭐든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조만간 내 집으로 놀러 와요.”

“세, 현 씨 집으로요?”

어떤 소원을 빌까 싶었는데, 자기집으로 놀러 오라니.

생각지도 못한 초대에 당황하다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음을 발견하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게요.”

“정말이죠?”

“네. 소원이잖아요.”

김세현과 이렇게 단둘이 있지도 말라고 했지만, 커피만 마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지난번에도 한 번 겪어 본 바가 있었다. 물론, 김세현이 말한 것처럼 그의 집에 놀러 가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김세현의 집으로 가기로 했단 말을 팀원들에게 전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썩 좋지 않은 반응이 돌아올 거란 걸 말이다.

“팀원들에겐 말하지 말고요.”

“…네?”

“지금 그 생각 한 거 맞죠?”

“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

“얼굴에 다 티 나요.”

이번에도 역시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답하는 김세현이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며 물었다.

“티, 많이 나요?”

“네.”

“…….”

“다른 사람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김세현은 괜찮다고 해도 나는 아니었다. 민망함에 한 번 더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민망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하여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요. 한동안 바쁠 예정이라서 일정 어느 정도 소화하면 연락할게요. 그때 놀러 와요.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요.”

“음식도 만들 줄 알아요?”

평소 먹는 양을 생각해 보면 도통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협회엔 뷔페도 있었고 말이다. 당연히 요리사를 데리고 있다거나 협회에서 끼니를 때우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였다.

“형이랑 같이 먹을 것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그럴게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세현이 만드는 음식을 먹는다니. 막상 대답할 땐 괜찮았는데, 이제 와 떨리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그나저나 형.”

“네.”

“집에 들어가도 돼요?”

“괜, 안 돼요.”

순간 괜찮다고 할 뻔했다. 김세현의 표정에 불만이 떠오르는 게 보였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시간 많이 늦었는데, 얼른 가서 쉬어요. 앞으로 일정 많다면서요.”

좀 더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 있다간 김세현에게 집에 들어와도 괜찮다고 허락할 듯싶었다.

“…방금 왔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김세현이 앉은 자세 그대로 올려다본다. 내려다보니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불만으로 가득한 모습에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계속 말을 섞으면 집에 들어오라고 할 것 같아서요.”

“그럼 계속 말하면 되겠네요!”

“…….”

“나 진짜 형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

재차 들어가고 싶단 뜻을 피력한다. 그것도 이번엔 조금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했다.

“알았어요. 들어가겠다고 그만할게요.”

“네.”

하지 않겠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피식 웃음을 터뜨린 김세현이 남은 커피를 단번에 비우곤 자리서 일어난다. 머리 하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할 때였다.

“형, 진짜 초대할 거니까 이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팀원들한테도요.”

“노력할게요.”

혹여 누가 김세현의 집에 가냐 묻는다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답이 아니라 그런 걸까, 김세현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 눈을 굴리며 힐끔힐끔 그를 살폈다.

“좋아요. 내가 이것도 양보해 줄게요. 누가 물어보는 거 아니면 말하지 말아요.”

“그럴게요.”

“일 처리 얼른 하고 초대할게요.”

“네.”

“혹시 또 이번처럼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요. 늦게라도 확인할 테니까.”

계속해서 예전에도 했던 말까지 꺼내서 하기 바쁘다. 김세현이 말을 끝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답하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현 씨.”

“네, 형.”

“끼니 거르지 말고요. 눈치 보지 않겠지만, 배고프면 배 찰 때까지 먹어요.”

“…….”

“음, 너무 배고프거나 하면 집으로 오세요. 세현 씨 먹을 수 있게 간단히라도 챙겨 둘게요.”

집 안만 멀쩡했다면 지금쯤 김세현을 안으로 들여 밥이라도 챙겨 줬을 것이었다. 아니지, 굳이 집 안까지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슬쩍 집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김세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세현 씨?”

그간 김세현을 제법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는 표정은 정말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움과 기쁨, 설렘과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모습까지.

온갖 감정이 몰아치는 표정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김세현의 눈가였다. 묘하게 촉촉하게 젖어 있어,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세현 씨?”

“…아.”

좀 전의 부름엔 꿈적도 안 하던 그가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이어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데, 그 모습이 생소해 계속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그게….”

말까지 더듬으며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눈을 굴릴 때마다 눈가가 반짝이는 것이 정말 눈물이 살짝 고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일단 저 갈게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조심히 가세요.”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굳이 저리 당황하는 이유를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황급히 대문 쪽으로 향하던 김세현이 우뚝 제자리에 선다. 이어 다시 몸을 틀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어느새 앞까지 다가온 김세현과 눈을 마주했다.

“형.”

“네, 세현 씨.”

“나 지금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해도 돼요?”

집에 들어가고 싶단 의견을 피력할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세….”

하지만 말은 끝맺을 수 없었다.

허리와 목 뒷부분이 붙잡혔음을 인지했을 즈음이었다.

“…….”

폭하니 몸을 감싼 느낌이 너무도 생소했다. 아니, 익숙했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 맞을 듯했다.

허리를 감싼 손, 얼굴과 몸 전체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 그리고 목 뒤를 감싸고도 여유가 있었는지 귀를 완전히 뒤덮은 손가락까지.

“후우.”

정수리를 누르는 묵직한 무게와 더불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가 심장을 버겁게 한다. 그와 함께 허리를 감싼 손길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몸이 밀착된 상황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인 게 있었다.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나는 입을 급히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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