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4. 이어지는
서강민과 날 촬영한다는 시청의 의견이 사그라들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처럼 느껴지는 건 전부 생각지도 못한 청와대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아.”
김세현의 개입으로 인해 벌어진 일임이 분명했지만, 대통령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결국 내 존재를 대통령 또한 알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알게 되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지난번 김세현의 생각지도 못한 행보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자이크 처리된 그 말도 안 되는 피켓을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난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 밖으로 나가 조용하기만 한 거실을 둘러보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인 리모컨을 집어 TV를 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이었다.
“어?”
뭔가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떠 있던 것 같다. 지나갈까 싶어 빠르게 채널을 다시 돌렸을 때였다.
―…해서 현재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A급 헌터에 아이템까지 소지한 계약직 헌터라는 캐릭터성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더하여 준수한 외모를 지녔기에 더더욱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사고 있기도 한데요, 현재 인터넷상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팬클럽을 창단한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기도 합니다.
―서강민 헌터가 저지한 덤프트럭 운전사 살인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요?
―현재 진척이 지지부진한 듯합니다. 경찰서에 문의해 보았으나 용의자를 찾는 중이라는 말만 전달받았습니다.
“…….”
인터넷도 그렇고, 매체도 그렇고 어딜 가나 서강민 헌터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바쁘다. 혹여 모르던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계속해서 뉴스를 시청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과거 했던 말을 반복할 따름인 모습에 실망하곤 결국 TV를 끄고 자리서 일어났다.
“가서 누워야지.”
그래, 이미 파악한 정보를 재차 들을 바에야 차라리 방으로 가 출근을 위해 미리 잠드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빠르게 방으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중, 머리를 스친 생각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지금 시각은 김세현도 좀 한가하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을 들곤 곧바로 김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바로 받으셨네요?”
―방금 집에 들어왔어요.
과연 전화를 받을까 싶었는데, 전화하길 잘한 듯하다. 반가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슬며시 입가를 늘어뜨리곤 말을 이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갑자기요?
“네.”
―왜 갑자기예요! 난 매일 생각하는데!
“…….”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소리를 들으니 괜히 입가가 간질거린다는 것이었다. 주체 없이 씰룩이는 입가를 느끼며 멋쩍은 미소를 짓던 중이었다.
―난 형이 그날 바로 연락할 줄 알았어요.
“그날이요?”
―그 촬영 어쩌고 한 날이요. 일부러 말해둔 건데.
“아….”
잠시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청와대 이야기였을 줄이야.
―혹시 연락 늦었어요?
어떻게 답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답답했는지 빠르게 상황을 묻자, 바로 답했다.
“아니에요. 제때 잘 왔어요. 덕분에 촬영 같은 거 하지 않게 되었고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내가 언질해 뒀으니까 바로바로 대응할 거예요. 아니지, 잘 말해 뒀으니까 앞으로 시청에서 불필요한 압력은 넣지 않을 거예요.
그건 반가운 말이었지만, 압력을 넣은 사람이 사람인지라 진심을 다해 웃는 건 무리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뱉었다.
“하, 하.”
―형.
“네, 세현 씨.”
―나 지금 시간 괜찮은데, 형 보러 가도 돼요?
“지금요?”
방금 집에 들어왔다면서 또 나서려는 이율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김세현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얼굴만 잠깐 보고 오면 안 돼요? 좀 중요한 일정을 잡은 바람에, 한동안 헌터부에 가기 힘들 거 같아서요.
“음.”
일정이 끝나면 온다고 했기에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일정을 또 잡았을 줄은 몰랐다. 조금의 서운함과 더불어 역시 S급 헌터답다고 생각하다 슬쩍 말을 꺼냈다.
“여기 왔다 갔다 하면 너무 멀지 않아요? 쉬어야 할 텐데.”
―형도 참. 내가 누군데요!
“김, 세현이요?”
―S급도 그냥 S급이 아니라 세계 최강 S급 헌터라니까요! 금방 갈 테니까 춥지 않게 카디건 걸치고 나와요.
“언제쯤 도….”
뚜― 뚜―
말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이미 끊긴 전화다. 황망하게 핸드폰을 바라볼 때였다.
드르륵― 드르륵―
재차 울리는 전화다. 전화 건 상대를 확인하곤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세현 씨.”
―형 준비해야 하니까 3분 후에 나와요!
전화가 끊기기 전 용케 말이 전달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다 뒤늦게 그가 말한 시간을 깨닫곤 그것을 입에 담았다.
“3분이요?”
김세현이 사는 지역과 내가 사는 지역은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래, 제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한 구역 차이도 아닌데, 마치 3분 안에 도착할 것임을 알리는 듯한 말투에 되물었다.
“정말 3분 후에 나가요?”
―…형, 날 뭐로 보고 그래요! 나 S급 헌터라니까요? 세계 최강 헌터라고 형이 말했으면서!
김세현 말고 다른 헌터를 세계 최강이라 부르기엔 다들 실력이 부족하긴 했다. 무척이나 빠르게 말을 뱉는 목소리 끝이 묘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차 최강 헌터임을 자부하는 이에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야, 그렇지만요.”
―하여튼 얼른 나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도착할 때까지 통화하고 싶지만, 이동하려면 바람 소리가 많이 들어갈 거 같아서 이만 끊을게요!
“…네.”
얼마나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기에 바람 소리에 목소리가 묻힐 거 같다는 건지 모르겠다. 알았다 답하며 전화를 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움직였다.
과연 3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김세현이 직접 본인의 입으로 그러겠다고 했으니 그 안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옷장으로 가 카디건을 걸치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마당의 불을 켜는 스위치를 누르며 슬리퍼를 신고 현관을 빠져나와 대문 가까이 이동했을 무렵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문틈 사이로 상황을 살폈다.
“…….”
커다란 인영이 집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아직 도착할 거라던 3분이 지나지 않았기에 김세현은 아닐 텐데, 도대체 누가 저렇게 남의 집 앞을 서성이는 거지?
문을 열고 외부를 확인할까도 싶었지만, 평소 늦은 시각에는 인적이 드문 편인지라 괜히 의심스럽고 또 긴장되었다. 이제 곧 김세현이 도착할 것이기에 잠시 동안은 그대로 기다리자 다짐할 때였다.
“형!”
“흡!”
깜짝이야.
별안간 대문 앞에 선 인영이 익숙한 목소리를 낸다. 그에 흠칫 몸을 떨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놀랐어요?”
“세, 현 씨?”
“네, 저예요.”
“하아.”
3분이라 말했으면 3분 후에 도착할 것이지, 어떻게 이리 일찍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이가 아닌 김세현이었단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샘솟는 민망함에 괜히 속으로 투덜대며 잠긴 대문을 열어 문을 열었다.
“형.”
문이 열리자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가 이윽고 완전한 모습을 한 채 날 내려다본다. 날이 어둑했지만, 가로등 불빛과 더불어 마당에 켠 불 덕분에 김세현의 모습은 제법 잘 보였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평소와 묘하게 다르게 보이는 김세현을 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끼니 잘 챙기지 못했어요?”
그래,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김세현의 얼굴이 날카로워 보이진 않을 것이었다. 평소보다 더욱 날이 선 듯한 턱선을 보다 시선을 들어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밥은 뭐, 챙겨 먹긴 했어요.”
챙겨 먹긴 했다는 말은 다르게도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양껏 못 먹었어요?”
“…티 나요?”
“무척요!”
사람이 딱 보기 좋았는데, 제법 야위니 날카로워 보였다. 뭐, 지금 이 모습도 무척 매력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으음.”
“일이 많았, 아니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진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반응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뒤늦게 멈칫했다.
“…….”
그러고 보니 김세현을 집에 들이지 말라던 팀원들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던진 말을 주워 삼킬 수도 없기에 늦었지만, 뒷말을 덧붙였다.
“마당까지만요.”
“하하, 좋아요. 그럼 돗자리 꺼내다가 깔아요. 나 커피 마시고 싶은데, 커피 한 잔 타다 줘요.”
“네, 그럴게요.”
그거야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창고로 가 돗자리를 가지고 나왔다. 그에게 그걸 바닥에 펴 달라 부탁하곤 안으로 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커피를 준비하곤 밖으로 나왔다.
“아.”
“형, 여기 돗자리 펴니까 좋네요.”
김세현은 돗자리 밖으로 삐져나간 발은 신경 쓰지 않는지 다리를 쭉 편 채 뒤로 기운 상체를 두 팔로 받치곤 이쪽을 바라보았다. 얼굴 가득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심장은 이미 세차게 뛰고 있었고 말이다.
내 집에 김세현이 이렇게 와서 편히 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