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06. 이것은 반칙입니다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바로 기석을 깨워 마당으로 나온 나는 텃밭 앞에 쪼그려 앉아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녀석을 지켜보았다.
“연하늘, 이 시퍼런 놈 같으니라고.”
“…….”
“술독에 오른 친구를 이렇게 부려 먹어. 악독하다, 정말.”
다른 날이었다면 또 모를까, 오늘은 저 말에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커다란 몸을 수그린 채 풀을 뽑으며 구시렁대는 기석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재워 줬으면 일을 해야지.”
지난 금요일, 오후 늦게 던전이 생성되지만 않았다면 헌터부 첫 회식에 참석했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뤄진 회식에 아쉬움이 컸는데, 친구란 녀석은 친구들을 만나며 기분을 냈다니.
제아무리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곤 하지만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밤새 술 마신 사람 아침 댓바람부터 깨워서 일 시키냐?”
원망도 미묘하게 느껴지는 말투다. 나는 코웃음 쳤다.
“일하기 싫었으면 집으로 갔어야지.”
“엄마 손에 내 등짝 남아나질 않는다고.”
“그러게 적당히 먹든가. 너 사흘 후면 복귀잖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마시겠냐. …다음 휴가나 돼야 마시겠지.”
“쯧.”
역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단 옛말이 맞다. 잠시 이쪽을 잠시 보는가 싶던 녀석이 취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우욱.”
“…토하는 척하지 마라. 티 엄청나.”
정말 게워 낼 것이었다면 이미 게워 내고도 남았을 거다. 눈을 뜨기 무섭게 숙취 음료와 더불어 생각도 없던 콩나물국까지 대령했음을 상기하곤 혀를 찼다.
“…사회생활이 그렇게 힘드냐? 없던 눈치도 생기게?”
“네가 연기를 너무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해?”
차라리 정말 쏟아 낼 것처럼 연기를 하든가, 대충 소리만 내며 눈치를 살피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눈치만 늘어서는.”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뻔뻔하다, 연하늘.”
뭐가 뻔뻔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간혹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있긴 했지만, 대신 눈치만큼은 빨랐다. 나는 마대 자루를 녀석에게 건넸다.
“빨리 거기 잡초 다 뽑아서 마대에 넣어. 이거 말고도 할 거 많으니까.”
안 그래도 대청소를 해 볼까 했는데,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손이 하나 더 는 만큼 구석구석 청소하잔 마음을 다지며 재촉했건만, 녀석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쉴 새 없이 구시렁대는 이를 향해 결국 당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점심 사 줄게.”
“나 국물 있는 걸로.”
역시 원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조금 전 행동은 그저 보여 주기식이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짬뽕시키면 되지?”
“탕수육도.”
“알았어.”
“현직 군인의 잡초 뽑는 실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마!”
“그래, 그래.”
굳이 군인이라 밝히지 않아도 저 짱구 머리를 보면 군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 본인이 저리 신나 하는데,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중간중간 기석과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마당 정리를 마친 뒤 기지개를 켜며 입맛을 다시는 이에게 다음 일정을 알렸다.
“이젠 집 안 대청소해야지.”
“…….”
이미 눈치챘을 텐데 왜 저런 표정인지 모르겠다. 불만으로 가득 찬 녀석의 시선을 모른 체하곤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얼른 하고 쉬자. 오늘 내론 할 수 있어.”
이렇게 망설일 시간이 있다면 어서 움직이는 편이 이로웠다. 뒤따라 들어오는 녀석에게 거실 청소를 부탁하곤 살아생전 부모님이 사용하셨던 안방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가 많이 쌓였네.”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긴 했지만, 꼼꼼히 하진 못한 터라 가구 위에는 먼지가 제법 쌓인 상태였다. 창문을 열어 청소 준비를 마치고 가구를 비롯해 방 구석구석을 쓸고 닦은 뒤 마지막으로 환기를 위해 장롱문을 열었다.
“…….”
예전 같았다면 이곳 가득 이불과 함께 부모님 옷이 들어 있었을 거다. 텅텅 빈 내부를 보고 있자니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마음을 다독이며 다른 가구 서랍들을 열어 환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코가 찡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 두 분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집 근처에 던전이 생성되었던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후우.”
알고는 있지만 매번 청소할 때마다 착잡해지고 울적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 이번에는 내 방 청소를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 청소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부터 연 후 책상부터 정리하다가 찌뿌드드해진 몸의 피로를 해소키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음?”
저게, 뭐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밖에 보인 적 없던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 참이다. 창문 너머,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담 너머 자리한 가로등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달려 있다. 이전에도 달려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나는 그것을 빤히 바라봤다.
“뭐지?”
옆집에 사는 어르신이 부착했다고 하기엔 제법 높은 곳에 달린 검은 물체다. 벽에 가려져 모습이 온전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보이는 부분을 봐서는 매끈하면서도 둥그런 것이 어쩌면 동그란 물체일 것 같다는 생각이….
“어?”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집 앞에서 김세현과 만났을 때도 둥그런 물체가 가로등 아래 떨어져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혹 그 물체인가 싶어 유심히 그것을 살피다가 기석의 호출에 시선을 거뒀다.
“야, 연하늘!”
“나가!”
저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따 돌아와 한 번 더 확인해도 될 것이었다. 빨리 나오라 재촉하는 이에 거실로 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야, 이거 좀 같이 들어.”
“…소파까지 움직이려고?”
“대청소라며.”
“그야 그렇지만.”
대청소라곤 해도 소파까지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녀석의 스케일에 잠시 당황했지만, 어쩌면 이건 찬스였다.
언제 또 소파를 들어 청소하겠냔 생각에 함께 소파를 움직이며 거실 청소를 도운 뒤 소파 정리가 끝나자 다시 가 보라 손짓하는 이에 방으로 돌아왔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소리가 컸는지 기석이 말을 건다.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 답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로등에 달려 있던 검은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다. 헛것을 봤나 싶었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어쩌면 내가 가로등에 뭔가가 달려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시커먼 물체가 별안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시야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사람이 만지던 무언가의 끄트머리가 보인 거란 결론을 내리곤 이내 사라진 호기심을 뒤로 한 채 마저 방 정리에 나섰다.
***
- 얼마 전 세계 각지에서 생성된 던전으로 인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지금껏 동시다발적으로 난이도 높은 던전들이 생성된 적 없기에 많은 이들의 걱정을 사고 있는데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만큼은 그 어느 나라보다 안전하다는 인식이 점차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외국에서는 현재 진지하게 우리나라로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평소 기피 지역이었던 서울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실정입니다.
- 이민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일 텐데요, 어째서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에 S급 헌터 김세현 씨가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형,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있어서 우리나라가 안전하다고?”
조회가 끝나기 무섭게 찾아온 김세현은 마치 이곳이 안방이라도 된 것처럼 본인이 나온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바빴다. 지금처럼 나에게 말을 걸며 말이다.
“…뭐, 그렇죠?”
호주 던전이 클리어되는 실황을 보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생방송으로 S급 던전을 단번에 클리어하는 모습을 본 터라 김세현을 향한 믿음만큼은 확실했다.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어진 김세현의 반응에 침묵했다.
“하, 내가 좀 세계 최고 헌터긴 하죠.”
“…….”
“솔직히 더 대단하긴 한데, 날 표현할 만한 말이 없네요.”
머리를 쓱 뒤로 쓸어넘긴 김세현이 씩 웃는다. 마치 이보다 더한 자기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오늘도 잘생겼다는 생각 또한 든다. 말없이 그를 보다가 팀장의 일갈에 목을 움츠렸다.
“거기 TV 볼 거면 협회 가서 보든가, 볼륨을 좀 낮추든가! 아침 댓바람부터 와선 뭐 하는 짓이야!”
“형, 저거. 저거 좀 잘 들어 봐요.”
이번에도 역시나 팀장의 말을 무시한 채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김세현이다. 볼륨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TV를 가리키는 모습을 보다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가져와 볼륨을 낮췄다.
“…소리가 너무 작은데.”
“쉿. 너무 방해하면 안 돼요.”
월요일 아침은 특히 조심해야 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며 볼륨을 낮추고 더는 아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곤 들려오는 TV 소리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 그러고 보니 김세현 헌터 등급에 관한 소문이 돌기도 하는데요, 그 부분은 어떻게 확인이 되었습니까?
- 현재 협회 측에서는 말을 아끼고는 있습니다만 지난번 호주 던전 때의 활약을 본다면 소문처럼 세계 최고 SS급 헌터로 발돋움할 수 있는 유일한 헌터가 아닐까 하는 말이 나오는 중입니다.
- 세계 최초 SS급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SS급, 이라.
굳이 호주 던전 사건이 아니더라도 김세현이 SS급이 아니냔 이야기는 심심찮게 흘러나오긴 했었다. 혹 S급과 SS급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진 않을까 귀를 기울이다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응했다.
“형은 내가 SS급 헌터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뉴스에 집중할 즈음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김세현이다. 설렘을 감추지 않고 답을 기다리는 이를 보곤 말을 흐렸다.
“…글쎄요.”
대단한 사람이 더 대단해진다고 해 봤자 나에게 와닿는 건 한정된 부분일 뿐이었다. 어색하게 웃다가 김세현이 재차 어떨 것 같냔 물음에 자연스럽게 책상 위 협조금 관련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썩, 반갑진 않을 거 같아요.”
“…반갑지, 않아?”
“네. 이미 대단하니까요.”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그 정도 비용은 저렴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비용이었지만, 매번 협조금을 계산하며 0을 셀 때마다 손이 떨렸다. S급인 지금도 엄청난데, SS급이 되어 책정되는 금액을 본다면 정말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그저 생각만이 아닌, 진짜로 뒤로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혀를 차던 와중에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형은 내가 더 대단해지면 거리감 좀 느끼고 그럴 것 같다, 이거죠?”
“그, 렇죠?”
나완 전혀 다른 단위의 돈을 만지는 사람인데, 이보다 더 단위가 커진다면 나로서는 현실감이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뉴스를 보라며 재촉하던 김세현이 이쪽을 보며 웃기 바쁘다. 나는 절로 심장이 뛰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만. 노력해 볼게요.”
“…아.”
“숙이는 것쯤이야 쉽죠.”
“네.”
“물론, 거긴 잘 안 숙지만 말이에요. 이건 다음에, 단둘이 보여 줄게요.”
“…그러세요.”
무슨 노력을 한다는 건지, 뭘 숙이고 숙이지 않는다는 건진 감이 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맞장구를 치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인 듯했다.
게다가, 저렇게 웃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말이다.
그렇게 한참 얼굴을 뜯어보기도 하고 또 김세현이 말을 걸면 답하며 뉴스를 봤다가 일하기를 반복하길 몇 차례. 잠시 조용하다 싶던 김세현의 부름에 시선을 주었다.
“말씀하세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 들이는지 모르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궁금증이 커진다. 김세현이 입을 떼자 자연스레 쫑긋 귀 기울였다.
“하늘 형, 농담 아니고 내가 SS급인데 S급이라고 속이고 있으면 어떨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