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04. 나 이런 사람입니다
“…….”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힐 따름이다. 커피믹스가 가득했던 상자가 단 하루 만에, 그것도 한 사람의 입으로 사라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텅 비어 버린 상자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다 인기척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물건이야 채우면 그만이니까.”
“…….”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바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님, 아니 김세현에게 괜히 커피를 마시러 오라 했던 것 같다. 사비를 털어 커피를 채워 놓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여윳돈이 얼마 남았는지 계산해 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헌터 관련된 모든 건 전부 기록 후 협회로 청구 중이니까.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어요.”
“기록을 한다고요?”
기록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나는 부팀장을 바라보았다.
“협조금 관련해 요령 피우는 헌터가 많은지라 이런 거라도 모아 청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아니면 또 언제 협회서 돈을 받아 내겠습니까.”
“…그렇군요.”
하긴, 받아 가는 금액이 있는데 청구 좀 한다고 해서 뭐라 하진 못할 것이었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탕비실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서 벗어나니 이보다 더 마음이 놓일 수가 없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탕비실을 살폈다.
“하늘 씨.”
“네, 부팀장님.”
“어젠 좀 잠잠했어요?”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너무도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난처함은 잠시였다. 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만들어 귀에 대자 나는 절로 입이 다물렸다.
“핸드폰이요.”
“…….”
잠잠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 댓바람에 찾아와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자리를 뜬 김세현이었다.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기에 막연히 내일 또 사무실을 찾겠거니 했건만, 그건 그거고 메시지는 메시지였다.
“…표정 보니 고생이 많았나 보네요.”
“고생까지는 아니었지만요. 사실, 몇 마디 대화 나누다 깜박 잠이 들었거든요.”
전날 밤을 새워 가며 메시지를 나눈 여파 탓인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 상태였다. 자리에 눕자마자 메시지가 날아왔지만, 쏟아지는 잠에 몇 번 응한 것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몇 개 있을 거라 여겼건만, 막상 아침에 확인한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메시지함에 +999가 떠 있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냐는 말부터 시작해 어떻게 잠을 자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일 기대하라는 말까지 별의별 내용의 메시지를 떠올리니 머리가 다 아프다. 나는 고개를 털었다.
“너무 과한 거 같으면 잘라 내요. 김세현은 계속 받아 주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갈 놈이니까.”
“…그럴까요?”
어젠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손님이 김세현이라는 사실이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손님을 향한 찬사를 이어 가며 은근슬쩍 은인인 김세현을 뒤로했던 사실이 떠올라 민망함에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래도 됩니다. 그리고, 항상 조심해요.”
조심할 게 뭐 있을까 싶다. 김세현이 날 해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의구심이 들었지만, 부팀장이 말을 할 땐 언제나 이유가 있어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네.”
“회사뿐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혹 제가 연락을 받지 못하면 팀원 전체에게 연락하세요.”
“…….”
“그래도 됩니다. 하늘 씨도 우리 헌터부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란 말을 사회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매체를 접하다 보면 가족이 아닌, 가, 족을 운운하는 회사가 있었지만, 적어도 여긴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란 말을 들었을 뿐인데, 왜 이리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모르겠다. 코끝도 찡하고 말이다. 눈앞은 왜 이렇게 뿌예지는 걸까.
어깨를 토닥인 부팀장이 조용히 자리를 뜬다. 없는 땀을 닦는 척 눈가를 훔친 나는 사무실 문이 열리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어?”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듯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팀장님, 그건 뭡니까?”
“어? 아, 이거. 막, 아니지. 이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막내는 가서 쉬어.”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뭐가 든 건지 몰라도 제법 부피가 크다. 건네받은 봉투 안을 살핀 나는 믹스커피 상자와 함께 종이컵, 그리고 다른 차들이 한가득 들어 있음에 고개를 들었다.
“부팀장, 영수증은 책상 위에 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세현 오면 단둘이 있는 일 없게 하고.”
“예.”
“…….”
팀장까지 김세현과 단둘이 있지 못 하게 하란 말을 한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같은 말을 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재차 조심하자 다짐하며 탕비실 정리를 시작했다.
“와, 팀장님 가게 털어 오신 겁니까?”
“그놈 위가 보통 위여야지. 독도 안 통하는 놈인데, 카페인이 통하겠어? 기왕 장을 보는 김에 잉여의 위대한 위장 가득 채워 준다는 핑계로 협회 돈 좀 긁어 봐야지.”
“오, 역시 팀장님이십니다!”
“우리가 먹어봤자 얼마나 마시겠습니까? 좀 마신다고 티도 안 날 겁니다!”
“박 주무관, 바로 그거야! 믹스커피 몇 봉 마신다고 문제 되진 않지!”
어제까지만 해도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 김세현 때문에 불편해할 때는 언제고, 믹스커피 몇 봉으로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바뀔 줄은 몰랐다. 헛웃음을 짓다 커피나 한잔 씩 하잔 말에 끄덕였다.
“부팀장님은 율무차, 다른 분들은 믹스커피죠?”
“옳지!”
“평소처럼 부탁해.”
“네.”
평소라고 해 봤자 언제나 똑같았다. 빠르게 차 준비를 마치고 팀원 모두에게 차를 돌린 뒤 커피 한 잔을 챙겨 자리로 이동했다.
“다들 주목.”
자리에 앉기 무섭게 팀장이 손뼉을 친다. 의자를 돌려 팀장을 바라보았다.
“예, 팀장님.”
자리서 일어난 팀장이 주변을 훑어보더니 팔짱을 끼던 손을 푼다.
“현재 던전 보고서 작성은 어떻게 되고 있지?”
“던전 규모 및 현장서 협조한 협회 측 헌터 명단 정리 완료했습니다.”
팀장의 질문에 박 주무관이 답한다. 고개를 끄덕인 팀장이 이쪽을 바라보자, 얼른 몸을 바로 했다.
“막내는?”
“협조금 쪽은 검토만 남았습니다.”
“검토 후 바로 가지고 와. 김 주무관은?”
“오늘 협회로 가 명단을 받아 오면 됩니다.”
“좋아. 그럼 오늘 안으로 정리해서 시청에 보고하면 되겠어.”
“총무부에서 요즘 살맛 나는 모양입니다.”
“그러겠지. 그놈이 발 벗고 나섰는데, 피해만큼은 적을 거 아냐.”
피해 금액까지 헌터부가 맡았다면 아마 이곳은 사라지고 없었을 거다. 그것을 제외한다 해도 헌터부에서 담당하는 일은 너무 많았으니까.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병아리랑 잉여 단둘이 한 공간에 남지 않도록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화장실도 데리고 다닐 생각입니다!”
외부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화장실까지 함께 간다는 건 너무한 처사인 듯했다. 사무실 안에 자리한 화장실 팻말이 눈에 들어오자 절로 표정이 흐릿해졌다.
“근데 말입니다.”
“뭐 할 말 있어?”
김 주무관이 손을 든다. 나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놈 말입니다. 어제 갈 때 보니 오늘도 올 기세던데요.”
“아서라. 말이 씨가 될라.”
“넵!”
그놈이라 함은 역시 김세현을 말하는 걸 거다. 손을 내리며 김 주무관이 입을 다물자 다시 팀장을 보았다.
“자, 그럼 다들 일과 시작하지.”
“예!”
“네.”
손뼉을 친 팀장이 자리에 앉는다. 나는 의자를 돌린 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형, 좋은 아침.”
“…와.”
“저건 또 뭐야.”
“…….”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옳다고 할까.
컴퓨터 화면이 뜨자마자 출입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김세현이 나타난 상황이다. 어제만큼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나타난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다. 나는 어제완 달리 그의 왼손이 등 뒤에 감춰져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치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모습에 호기심이 차올라 뚫어져라 등 뒤를 바라보았다.
보일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다. 얼핏얼핏 보이는 붉은 색이 뭘까 싶던 것도 잠시, 원탁에서 의자 하나를 챙겨 다가오는 이에 눈을 끔벅였다.
“형, 어젯밤에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죠?”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아침에 메시지 확인한 거 봤는데, 왜 답장 안 해 줬어요?”
“출근 준비하느라 깜박했어요.”
“그런 거라면 내가 이해할게요.”
“…하하.”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말투다. 나는 결국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하늘 형. 체력 좀 키워야겠어요. 맞다, 제가 편하게 누워서 체력 운동할 수 있는 법 아는데. 이게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둘이 해야만 하는 거라서요. 언제 한번 저랑 같이할래요?”
“…편히 누워서요?”
운동이라는 게 과연 편한 게 있을까 싶냐 만은, 솔깃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되물었다.
“편히 운동할 수 있어요?”
내가 아는 운동과 김세현이 아는 운동은 다른 모양이다. 혹 내가 모르던 운동이 존재하는 건가?
“끝내줄 거예요. 어쩌면 좋아서 매일 같이하자고 조를지도 모르고.”
“…….”
편히 누워서 하는 운동이라고 한들 운동을 하면 후유증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운동만 하면 매번 근육통이 올라오는 통에 두 번 다시 운동하고 싶지 않았는데, 끝내줘서 매일 하고 싶어질 거라고? 내가 눈치가 없다고 쳐도 김세현이 지금 약을 팔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반론을 펼쳤다.
“운동하면 근육통이 오고, 근육통이 오면 쉬고 싶은데, 다음을 바랄 리가 없잖아요.”
“풉!”
“큭큭!”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폭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고개를 책상에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기 바빴다.
“…….”
웃긴 건 없는데, 왜들 웃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뭐, 그건 차차 알아 가는 걸로 하고.”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는가 싶던 김세현의 얼굴에 재차 미소가 번진다. 무척이나 화려한 미소에 절로 눈을 빼앗겼던 것도 잠시였다. 나는 붉은 색의 무언가가 다가옴과 동시에 코를 스치는 강렬한 향에 흠칫했다.
“오는 길에 형 닮은 거 같아서. 오다 주웠어요.”
“…아.”
등 뒤로 뭘 감췄나 싶었는데, 꽃다발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무실을 발칵 뒤집었던 꽃바구니와 화환에 장식된 붉은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 말이다. 나는 당혹감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무언가가 시야에 잡히자 숨을 멈췄다.
“…….”
아니다. 아닐 거다.
꽃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무언가를 애써 외면하는 것도 잠시였다. 커다란 손이 꽃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그것을 쥔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건 내 마음을 담은 편지예요.”
“…….”
“어서 받아요, 형.”
눈을 뜨고 싶지 않지만, 떠야만 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떠 김세현을 보았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받아들였다.
“얼른 봐요.”
혼자 있을 때 보거나 적어도 김세현이 없을 때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계속되는 재촉을 무시할 순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분홍빛 카드를 펼쳐 내용을 보았다.
「나의 천사 하늘 형에게♥」
「형, 나에게 와 줘서 정말 행복해요.」
“…….”
첫 줄도 첫 줄이지만, 두 번째 줄이 전해 오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내가 언제 김세현에게 간 걸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행복하단 문구가 사람을 심란하게 만든다. 말없이 카드 내용을 보다가 김세현의 부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형 일감 많을 텐데, 오늘은 일해요. 저는 알아서 시간 보낼 테니까.”
“…그러세요.”
어제처럼 계속 커피를 타 달라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남의 직장에 와서 알아서 시간을 보내겠단 말에 딴지를 걸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만 혼란스럽고, 나만 복잡한 것 같다. 카드와 꽃다발을 책상 한편에 내려놓은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김세현이 선을 넘게 된다면 팀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에 들었던 가족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점차 원상 복구되는 걸 느꼈다.
“참, 하늘 형.”
“네.”
“꽃다발 한 번만 다시 안아 볼래요?”
그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다시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차차차차차차차찰칵!
“음, 됐어요.”
“하, 하.”
핸드폰을 살피던 김세현이 고개를 주억이며 만족해한다. 갑자기 핸드폰을 들이밀 줄은 몰랐다.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책상 한쪽에 꽃다발을 내려놓곤 오늘 처리할 일감을 둘러보았다.
차차차차찰칵
“…….”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찰칵!
왜 의자를 가지고 오나 싶었는데, 이러기 위해 챙겨 온 듯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기 바쁜 김세현 때문일까,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다.
“…….”
숫자와 관련된 작업을 해야 했기에 정신이 흐트러지게 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지며 그 어느 때보다 진중히, 그리고 천천히 작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차차차차찰칵!
“예쁘다.”
“귀엽네, 정말.”
셔터음과 눈빛 공격만으로도 충분하건만, 언어 공격까지 이어지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한다면 또 대화가 이어질 게 뻔했다. 주고받았던 메시지만 봐도 그랬다. 결국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방법을 택한 채 나는 평소보다 느리게 일감을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언가가 볼을 간지럽힌다. 나는 그걸 쳐내려 손을 들었다.
“음?”
“…….”
모기인 줄 알았는데, 기다란 뭔가가 손에 잡힌다. 고개를 돌린 나는 이전보다 더 큰 당혹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내 손에 잡힌 건 다름 아닌 김세현의 손, 그러니까 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