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아침에 잠을 깨면 물리적으로 눈을 뜨기 전 정신이 먼저 돌아온다. 그럴 때 현대인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휴대폰 확인이다.
채 떠지지도 않는 실눈으로 시간을 먼저 확인하고, 간밤에 메시지나 이메일이 온 것이 없나 보고, 그러다 눈이 완전히 뜨이면 포털에서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오늘은 토요일. 9시 반에 일어나 10분 정도 휴대폰으로 뉴스를 읽었다. 여전히 옆에 있어야 할 녀석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또 어디 갔어….”
컨디션이 좋을 때의 최수혁은 얼리버드다. 일찍 일어나 운동 가는 것을 좋아하고 항상 잠이 부족한 나를 쌔끈한 모습으로 깨운다. 얼마 전 찍고 있던 작품이 크랭크업 되면서 자유시간이 늘어난 대배우께서는 거의 매일 7시에 기상하신다. 그 덕에 열에 아홉을 옆자리가 빈 채로 아침을 맞는 것이다.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침실 문을 열고 최수혁이 들어왔다. 벌써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마친 듯 샴푸 냄새가 풍겨 왔다. 한 손에는 태블릿 PC를 들고 제가 자고 일어난 자리로 돌아와 침대에 기대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어깨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바깥 내음이 셔츠에 아직 묻어 있다.
“밖에 다녀왔어?”
“응. 뭐 좀 사 왔어. 너 어제 저녁 안 먹고 그냥 쓰러지길래.”
좋다. 1년 정도를 같이 살게 되면서 우리는 좀 덜 바쁜 사람이 알아서 챙겨 주는 암묵적인 패턴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내가 너무 바쁘고 피곤했다. 말 안 해도 척척 챙겨 주는 최수혁을 보니 내가 인간 만들었다는 생각에 좀 뿌듯하기도 했고.
녀석이 태블릿으로 인터넷 매거진 앱을 열었다. 커버 스토리에 오랜만에 상의를 탈의해 주신 영화배우 최수혁님 얼굴이 크게 떴다. 스모키한 짙은 메이크업 탓인지 의자에 앉아 노려보는 표정에서 퇴폐미까지 흘렀다. 역시 QG는 이런 사진 참 잘 찍는단 말이야.
도승현 에디터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던 녀석이 얼마 전 QG와 인터뷰를 했었다. 내가 매니저도 아닌데 최수혁의 스케줄을 다 꿰고 있을 리는 없고 촬영이 끝나고 저녁을 먹는다기에 거기에 불려갔다. 그게 벌써 인터넷판 7월호에 실린 모양이었다. 녀석의 가슴 쪽으로 몸을 붙인 내가 어느새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Q: 거의 2년 만이다. 그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아꼈는데 어떻게 지냈나.
최: 작품을 하는 거 외에 특별히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광고나 TV 출연도 싹 없어져서 꽤 오래 개인 시간을 가졌다. 원래 영화배우는 생각보다 한가한 직업이다.
Q: 그래서인지 몸이 더 좋아졌다. (웃음)
최: 하하, 고맙다.
Q: 작품 얘기를 먼저 하자. 장이준 감독 작품에서 최수혁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 못 했다. 반응이 센세이셔널했는데 소감은?
최: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연기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노리고 캐스팅한 거였는데, 효과가 좋았나 보다. 아무도 범인이 나라고 생각 못했던 것 같다.
Q: 그거야 범인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었다. 영화관에서 놀라 소리 지른 관객들도 많았다.
최: 그 반응도 감독님이 노리셨다고 들었다.
Q: 영화 외에는 이미지 소비를 꺼려서 그런지 요즘은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된 것 같다. 신비주의 컨셉으로 방향을 아예 틀어 버린 거라고 봐도 무방한가?
최: 컨셉까지 잡고 인생을 계획하는 성격은 아니다. 외부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아 그런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것과 대중들이 바라는 것이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Q: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 사건 이후의 심경에 대해 조금은 듣고 싶다. 여전히 공식적으로 노코멘트인가.
최: 그 질문 왜 안 하나 했다. (웃음) 나는 내 사생활에 관해 알려야 할 의무가 없다. 각자 알아서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다만 나나 그 친구나 그전보다 많이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알아서 배려해 주시는 분들도 많아졌다. 그런 점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Q: 덕분에 무분별한 연예인들의 사생활 보도가 많이 줄었다. 최수혁 정도 되는 거물급이 그렇게 나와 주니 사회적 공론화가 되기도 쉬웠다고 생각한다. 후배 연예인들이 자주 언급해 주던데 알고 있나?
최: 사석에서도 많이 들었다. 연예인들이 무슨 사건만 터지면 일단 아니라고 하고 사과부터 하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내주게 된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존중받고 싶은 선이 있으면 본인이 끝까지 그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Q: 100% 지지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해 달라. 차기작을 준비중인가.
최: 차기작은 장이준 감독님의 새 작품에 다시 참여하게 될 것 같다. 쭉 스크린을 통해서만 뵙고 싶다. 지금처럼 조용히 사는 것이 목표다. 도와 달라.
Q: 그래도 우리랑은 가끔 인터뷰를 해야 한다.
최: 친하게 지낸 걸 후회한다. (웃음)
흠. 인터뷰 잘했네. 최수혁이 말발이 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리뭉실하게 대답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듯 보였다. 뒤 페이지에는 녀석의 사진들만 실려 있었는데 옷을 제대로 입고 찍은 사진이 거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모델 포스가 강렬했다.
“사람들은 자꾸 너를 벗겨 보고 싶은가 보다.”
하긴 나만 보기에 좀 심하게 아까운 몸이긴 하지. 녀석이 내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어깨로 내려온 손길이 팔과 허리에 닿았다.
“살이 더 빠졌네.”
점심시간이 따로 없는 회사라서 그런지 요즘 자꾸만 끼니를 거르게 된다. 알아서 챙겨 먹고 해야 하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항상 오후 늦게나 돼서 대충 때우고 마는 탓에 살이 빠진 건 사실이다.
녀석이 너무 마른 몸은 싫다고 했다. 내가 일부러 살을 빼고 있는 게 아닌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밥 먹는 것보다 수면 욕구에 더 약한 나는 시간이 나면 일단 잠을 잤다. 덕분에 녀석은 잔소리가 많이 늘었다.
“대기업 때려치우면 한가해질 줄 알았더니….”
“회사원은 항상 바빠.”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나 저녁에 전 직장 동료 만날 건데. 너는?”
“후시 녹음 있어. 늦지는 않을 거야.”
“늦어도 돼.”
“너 늦게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었어.”
별 희한한 방법으로 바가지를 긁네 이젠. 나는 몸을 일으켜 샤워하러 갔다.
토요일이라 웬만하면 약속을 잡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랜만에 연락 온 인사과 정호민과의 저녁은 예외였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지만 점심 먹기 전에 세차도 하러 가야 하고, 월요일부터 해외 출장이라 회사에 들러서 노트북을 가져와야 한다.
***
“오랜만이네 정팀장님.”
“어 왔어?”
좀 일찍 도착한 덕에 약속 장소였던 감자탕집에 혼자 먼저 자리를 잡고 주문부터 해 둔 참이었다. 정호민과는 퇴사하고 나서 가지는 세 번째 만남이다. 성격이 유순하고 나와는 반대되는 캐릭터라 많이 친해질 거라 생각 못했는데 은근히 대화가 잘 통했다. 뭐랄까 이야기할 때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친구라서 전화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았다. 연애 상담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그것 때문에 싸웠다고?”
나는 국자로 끓어오르는 감자탕 국물을 채소 위에 끼얹으며 되물었다. 둘이 싸웠단다.
“싸웠다기보다는 형이 말을 안 해.”
여기서 형이란 박건희 팀장을 말한다. 둘 다 혼자 사는데 이제 그만 살림 합치자고 주장하는 쪽이 박건희, 여러모로 부담스럽다고 주저하는 쪽이 정호민. 그 덩치에 삐쳐서 혼자 말을 안 하고 계시는 것이 박건희, 곤란해서 나한테 털어놓은 정호민 되시겠다.
“같이 사니까 어때?”
“우리?”
나는 앞접시에 감자탕을 덜어 정호민에게 건네주었다.
글쎄… 우리는 뭐 원래 거의 같이 살던 거랑 다름없어서 크게 바뀐 건 없었는데 말이다. 최수혁과 나는 동거 이후 뭐가 바뀌었을까? 장점은 오늘은 누구 집에서 자는지 결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이제 싸워도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거 정도일까 싶었다.
“일단 옆집으로 이사하는 건 어때?”
“뭐?”
“옆집에서 한번 살아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합쳐. 내가 해 봤는데 괜찮은 방법이야.”
정호민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 괜찮은 방법이라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정호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건희도 양반은 못 된다.
“어 형. 이제 막 먹으려고. 응.”
저 정도 되면 진짜 과잉보호 아니냐. 나는 혀를 쯧쯧 차며 혼자 밥을 먹었다.
“아니야, 세연이 혼자 왔어. 응. 알았어. 저기… 너 바꾸라는데?”
갑자기 정호민이 나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귀찮네. 나는 먹던 밥을 천천히 씹어 삼키고 물도 마시고 입을 헹구며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다.
“안 잡아먹어요. 뭘 또 확인 전화까지 합니까?”
-그런 건 아니고, 세연 팀장 애인이랑 같이 왔으면 나도 건너가려 했죠. 비싸신 분 얼굴 좀 보게.
“촌스럽게 더블 데이트라도 하게요? 오늘 스케줄 있어서 못 와요.”
-아쉽네. 참, 호민이 술 먹이지 말아요, 걔 술 약해.
“본인이 알아서 하겠죠. 애 키웁니까?”
-하하하. 알았어요. 호민이 다시 바꿔 줘요.
“야, 너 바꾸래. 징하다 진짜.”
깍두기를 가위로 썰고 있던 정호민이 다시 휴대폰을 받아 들고 속삭이듯 통화를 한다. 응응 알았어 몇 번을 하더니 얼굴이 빨개져서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고 ‘나도 사랑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여기 깨 볶는 냄새가 너무 고소해서 감자탕 맛이 싱겁게 느껴지네요.
“박팀장님 완전 사랑꾼이었네.”
“아, 형이 반전 매력이 좀 있어. 나도 거기에 끌려서 사고 친 거였거든.”
마치 그날 일을 상기라도 하듯 정호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가위와 집게를 들었다.
“그래 그 덩치에, 맨날 쌍욕 입에 달고 살던 양반이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서슴없이 할 줄이야.”
“그 말은 내가 먼저 했어.”
“그래? 의외네.”
“그게 뭐 별거라고. 너흰 누가 먼저 했는데?”
“뭐를? 사랑한다는 말?”
“응.”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우리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까놓고 얘기를 하자면 나는 최수혁을 사랑한다. 당연하다. 물을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그런 얘기를 상대에게 대놓고 하는 성격들이 아니다.
최수혁에게서 좋아한다는 말 한 번 듣자고 개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고 녀석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게 사랑이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었다. 녀석에게서 평생 들을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내게 있어 최수혁은 그런 걸로 끝내고 자시고 할 단계를 넘어서는 존재였으니까.
“우린 좀, 성격이 둘 다 지랄 맞아서 말로는 표현을 잘 안 해.”
그래서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래가는 거 보면 신기하네.”
오래라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좀 있었지만 녀석이나 나나 개인 기록은 갱신중이었다. 투닥투닥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몸을 섞고 서로의 삶을 섞은 지 2년이 지났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정착해 보기는 녀석이나 나나 처음이었다.
술을 먹이지 말라는 대형견의 말이 무서워서였는지 우리는 암묵적으로 정말 밥만 먹었다. 이럴 거면 차를 가지고 올걸 그랬다. 휴대폰 앱을 켜고 최수혁이 어디쯤 있는지를 확인했다. 지난번 말도 없이 술 마시고 외박을 했다가 심하게 싸운 결과물이었다.
박건희 팀장처럼 최수혁도 가끔 나를 너무 과잉보호하는 면이 없지 앉아 있었다. 내가 어디 가서 보호받을 군번은 아닌데 녀석이 워낙 한 성깔 하다 보니 피곤해서 그냥 앱을 깔아 주었다. 덕분에 틈만 나면 전화해서 어디냐고 묻는 패턴은 없어지게 되었다. 녀석의 위치를 보니 아직 스튜디오인 듯하다.
[아직 녹음중?]
[거의 끝났어 왜.]
왜는 뭐가 왜야. 갈 때 나 좀 픽업할 수 있는지 물으려고 했지. 데리러 올 수 있냐는 물음에는 말이 없었다. 메시지는 진작에 읽음으로 뜨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조율해야 하는 모양이다.
[알았어. 1시간 줘.]
최수혁은 웬만해선 거절을 잘 하지 않는다. 평소 제멋대로인 면이 심해서 그렇지 내가 뭘 부탁하거나 뭔가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가능하면 맞춰 주려고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방안을 찾았다. 그런 점을 보면 한 살 위인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회사는 어때?”
“바빠. 미친 거 같아.”
“아 그래?”
“그래도 마음은 편해.”
“그렇지? 나도… 이직할까 봐.”
정호민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젓가락으로 국물만 남은 접시를 휘적휘적 저었다. 대부분의 전 직장 동료들은 내가 아웃팅을 당해서 회사를 그만둔 거라고 생각한다. 하긴 그 난리가 났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사표를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최수혁을 놓기 위해 도망가는 길이었다.
내막을 알 리 없는 정호민은 내심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내연애이니 언제 들켜도 이상할 리 없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사표 써, 그럼.”
“그게 맞을까?”
“응. 인생에 일이 다는 아니잖아. 그걸 깨닫고 나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사표 쓰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되더라고.”
처음이라서 몰랐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했었다. 내가 잘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결단이 더 빠르게 서지 못했다. 그렇게 최수혁과 그대로 헤어지게 되는 결말이 왔더라도 나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끝까지 나를 놓지 않고 버틴 건 그냥 내가 운이 좋아서였다.
회사, 일, 커리어. 그런 거 사실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끼는 사람과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그런 걸 좀 더 우선순위에 놓아 주어야 할 시기라고 말해 줬다. 그 말에 정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 진지하게.”
“그래.”
어울리지도 않는 진지한 얘기들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 버렸다. 거의 다 와 가니 횡단보도 앞에 나와 있으라는 최수혁의 문자를 받고 우리는 일어섰다. 애당초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던 정호민은 주차시켜 놓은 자기 차를 가지러 먼저 인사를 하고 떠났고, 나는 최수혁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둘이 소파에 누워 오랜만에 TV를 보게 되었다. 감자탕 냄새가 신경 쓰여 샤워하고 나온 탓인지 최수혁은 내 뒤통수에 코를 대고 계속해서 샴푸 냄새를 맡고 있었다. 녀석이 계속해서 내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그러고는 뒷덜미를 손가락으로 문질문질 한다.
“하지 마, 간지러워.”
이번엔 두 손가락으로 뒷덜미를 문질문질 하며 괴롭힌다.
“아 하지 말라고. 간지럽다니까!”
진짜 말은 죽어도 안 듣지. 나는 최수혁의 손을 앞으로 휙 끌어당겨 내 양손으로 묶어 버렸다. 이제 좀 얌전해졌다.
TV에서는 인간극장 같은 것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50년을 함께 살아온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네 탓 내 탓 하며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담배를 피우며 읍내로 나가 버렸고 할머니는 마당에서 강아지 밥을 주며 혼자 할아버지 욕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최수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게 웃기는 장면이 아닌데 왜 웃냐?
“저 할머니, 꼭 너 같네.”
“뭐?”
나는 다시 한 번 할머니를 비추는 TV를 집중해서 시청했다. 할머니는 망할 놈의 영감쟁이라며 계속 궁시렁대고 있었다. 밥을 먹는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다가 또 성질이 나셨는지 혼잣말을 하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저게 어디가 나야. 미친 거 아니야?”
“할아버지가 달래 주려고 했는데 계속 못 참고 혼자 화만 내시잖아.”
“할아버지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런 거지.”
“그래서 너랑 똑같다고.”
음. 나도 모르게 설득당한 탓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싫어하는 나는 기대했던 타이밍에 기대했던 말이 나오지 않으면 녀석에게 자주 성질을 낸다. 그 덕에 최수혁에게 대차게 한 번 까였었지. 그때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읍내 나갔던 할아버지가 손에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귀가했다. 먹을 건가 싶어서 강아지가 졸졸 따라왔지만 대청마루에 앉은 할아버지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할머니를 불렀다.
못 이기는 척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어디 갔다 오냐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또 싸우나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말없이 비닐봉지를 쓱 내밀었다. 뭐냐며 안을 들여다본 할머니의 손에는 꽃무늬 원피스가 들려 있었다. 슬쩍 얼굴이 풀어져 방 안으로 들어가신다.
“내가 잘못했었네.”
“뭐가.”
“나도 뭘 사 들고 왔어야 했는데, 담배 피우면서 니 성질만 건드렸나 본데.”
웃겼다. 최수혁도 나와 같은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먼저 해 주지 않았다고 들이받아 버린 나에게 니 잘못 내 잘못 따져 가며 아파트 쓰레기장 옆에서 대차게 싸웠던 날이 떠올랐다.
역시 오래 사신 분들은 지혜로워서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아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원피스를 입고 나오며 조금 높은 톤으로 저녁 식사 어떻게 할 건지를 물었다. 있는 거 대충 먹자며 할머니를 배려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50년 세월의 연륜이 느껴졌다.
***
방콕의 여름은 살인적이다. 길을 걸으면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녹아내리는 버터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호텔에서 사무실 빌딩까지 걸어가는 그 10분 정도의 거리에도 나는 이미 땀에 절어 숨이 턱턱 막혔다.
웅장하게 솟은 현대식 빌딩들이 늘어져 있는 길거리에는 작은 가판대를 열어 놓고 음식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다. 도로에는 신호를 받으려고 대기중인 오토바이가 100대는 서 있는 것 같았다. 파란불이 나자 일제히 매연을 뿜으며 도로를 달려 나간다. 머리 위로는 전철이 지나갔다.
두 달 전 방콕 시내 한가운데 태국 지사를 오픈했다. 싱가폴 지사에 이어 두 번째로 내가 맡은 프로젝트였다. 데스크에 앉아 기획서만 만들던 지난 5년간의 삶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사무실 임대부터 회계 관리, 채용, 법률적인 체크까지 내 손으로 다 해야 했다.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배워서 직접 하는 것이 더 빠른 업계였다. 덕분에 지난 1년간 새로 회사를 하나 설립해도 될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다. 빌딩 안으로 들어오니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Hi welcome back~! (안녕, 어서 와요!)”
“Anyon Haseyo SY. (안녕하세요 SY.)”
“Hi, Seyeon nim. (안녕, 세연님.)”
10여 명의 태국 직원들이 오피스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반기며 인사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들르겠다는 대표와의 약속을 거절할 수 없어 한동안은 태국 출장이 계속될 것 같았다.
영어를 쓰는 태국 직원들은 현지에서 말하는 소위 잘나가는 집안의 엘리트 자녀들이다. 지금은 10명이나 되어 안정적이지만 초반에 채용을 할 때는 말도 못 하게 힘이 들었다. 오퍼를 주었는데 갑자기 취소한다거나, 인터뷰 시간을 멋대로 바꾸려 한다거나 하는 이벤트들이 있었다.
땀을 좀 식히고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나흘간 빽빽하게 스케줄을 잡은 탓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나를 따라 3명의 직원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좀 더 자주 오세요. 아예 한 달 정도 있다 가시면 더 좋고.”
유일하게 상주하고 있는 한국인 직원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진짜 그의 말대로 했다가는 집에서 아예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내가 출장이 많아진 것을 두고 최수혁은 매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었다. 나는 그러게요 정도로 대꾸하며 노트북을 세팅했다.
3시간을 내리 연달아 회의를 진행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음식이 입맛에 맞는다는 유일한 장점이 있는 출장이었다. 땀이 식어서 그런지 한기가 느껴졌다.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은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나 혼자 걷었던 소매를 다시 팔목까지 내렸다.
출장을 올 때마다 언제나 가는 식당으로 향했다. 함께 온 한국인 직원이 능숙하게 주문을 해 준다. 많이 늘었네 태국어.
“아무래도 살다 보니. 금방 배워지더라구요. 재밌어요.”
“아예 눌러사시겠는데요?”
“그럴까도 생각중이에요. 의외로 잘 맞아요.”
다행이네. 나는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슬며시 웃었다. 음… 그런 게 아닌가? 이거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태국 여친 생겼구나.”
이제는 이빨을 보이며 웃는다. 이거 봐라. 내 이럴 줄 알았다. 역시 언어를 배우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현지인 애인을 사귀는 거다. 이러니 한국 들어올 생각이 들지 않지. 설마 사내연애는 아니겠지 했는데 그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그, 오늘 빨간 원피스 입고 왔던.”
“아… 네.”
“모른 척해 주세요.”
“뭐, 사내연애 하지 말라는 룰도 없는데 어때요.”
“그래두요. 그 친구가 불편해할까 봐. SY는 연애 안 해요?”
음. 이 직원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태국 지사로 발령 난 덕에 내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뭐 굳이 내 입으로 커밍아웃할 필요는 없겠다.
“있어요. 동거중이에요.”
“아, 그래서 그렇게 안정적인 느낌이 있었구나. 처음엔 결혼하신 줄 알았는데 반지가 없더라구요.”
“아 네. 둘 다 뭘 나눠 끼고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사무실에 실망할 직원들이 많겠는데요. 반지 안 끼셨으니까 나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전 원거리 별론데요.”
“하하하. 사실은 면접관이 너무 잘생겨서 입사 결심했다고 한 직원도 있었어요. 갑자기 그만두면 내가 곤란하니까 계속 솔로인 척해 주세요.”
음… 뭔가 최수혁에게 죄짓는 기분이 들었지만 비행기로 6시간 거리에 있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알까 싶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오후 회의는 일찍 끝내고 남는 자리에 앉아 개인 업무를 처리했다. 직원 한 명이 가져다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차가웠다. 반도 마시지 못하고 얼음이 다 녹아 탕비실에 버려야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밖으로 나오니 따듯한 공기가 느껴져서 오히려 좋았다. 그러다 호텔 로비에서 다시 휘몰아치는 에어컨 바람에 오한이 느껴졌다. 호텔 룸 안으로 들어와 에어컨을 껐다. 끄고 나니 또 공기가 꿉꿉하고 무더위가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에어컨 온도는 최대한으로 올리고 침대에 누웠다. 최수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콜?]
[응 10분만 줘]
바쁜가 보네. 휴대폰을 침대 옆에 두었다. 대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얹고 사무실에서 쓰다 남은 이메일을 완성했다. 키보드를 투닥투닥 두드리고 있는데 침대 위에 둔 휴대폰이 위잉 하며 전화가 왔다.
“최수혁, 여기 너무 추워.”
-뭐야. 태국 간다 하지 않았나?
“어. 근데 여기 사람들 좀 미친 거 같아.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아.”
-온도를 올려 그럼.
“세상이 너처럼 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진 않아. 나 빼고는 다 덥다 그러더라. 뭐야, 너 운전중이야?”
-응. 친구들 만나려고.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까 들어가기 싫네.
“많이 마실 거야?”
-응. 좀 그런 분위기야. 너 없는 거 애들이 아니까 일찍은 못 들여보내 주겠다던데.
나도 몇 번 낀 적이 있었던 그 동갑내기 연예인 모임에 가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놀고 내일 통화해.”
-보고 싶다 정세연.
앗. 갑자기 들어온 어퍼컷에 방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심장을 두들겨 맞았다. 고작 하루 안 봤는데 그런 얘기를 하다니.
“어 나도, 음. 보고 싶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휴대폰 너머로 최수혁이 웃는다. 은근히 내가 더 이런 말을 못한다. 녀석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는지를 아는 남자다. 매력이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정말.
전화를 끊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니 바에 비치된 맥주 한 병을 마셨다. 노트북 키보드에 올라간 손가락은 쉴 새 없이 타자를 치고 있었지만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풀리지 않은 채였다.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
새벽에 깨서 에어컨 온도를 다시 내렸다. 자다 보니 더워지는 것 같아서 별 생각 없이 내려 버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게 아파 왔다.
오전 회의를 마칠 때쯤 되니 몸에서 첫 번째 신호가 왔다. 심하게 재채기를 하던 나를 직원들이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다 1시간쯤 뒤 누군가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SY, you sound all nasally. (SY, 완전 코맹맹이 소리 나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코가 간지러웠다. 회의실에 비치된 티슈를 뽑아 코를 풀었다. 빨개진 내 코를 보며 직원들이 킥킥대었다. 이게 다 니네가 너무 극단적으로 실내 온도를 조절한 탓이잖아. 오한이 느껴지는 통에 벗어 두었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계속 회의를 진행했다.
그렇게 3일을 보냈더니 감기 기운이 제대로 들었다. 목은 다 잠겨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고 콧물이 계속 나오는 통에 계속 티슈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급하다, 귀국이 시급하다.
이 핑계를 대고 다음 달 태국 출장을 한 번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병원부터 가야 했다. 내가 감기에 걸리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야 떨어져, 떨어져. 옮는다.”
“뭔 상관이야.”
출장에서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감고 달려드는 최수혁을 밀쳐 내고 간격 거리 1미터를 유지했다. 후시 녹음이 한참인 사람에게 감기를 옮길 수는 없었다.
“코맹맹이 소리 하며 대사 읊을 거냐고.”
그제서야 최수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공항에서 직행한 병원 의사에게 가장 빨리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쉬라고 했다. 둘 다 불가능이다. 이 더운 날씨에 따듯한 물? 그리고 바빠 죽겠는데 푹 쉬라고? 그 방법 말고 약으로 어떻게 할 수 없냐고 했다. 의사가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감기는 약이 없어요. 모르세요? 몸이 극복하는 걸 도와주는 게 다예요.’
그리하여 우리는 타액이 섞일 수 있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당연히 키스, 섹스도 금지였다. 섹스는 그냥 해도 되지 않냐는 최수혁의 말에 잠깐 나도 혹했지만 평소 우리 스타일로 미루어 보아 타액이 섞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하기 어려웠다.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고 금욕 기간을 선포했다.
한 3일쯤은 나름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최수혁을 보고 꼴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 후 나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아랫도리가 바로 텐트를 쳤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하면 또 그 모습이 멋있어서 피가 몰렸다.
최수혁은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혹시 흥분하면 이성을 잃을까 봐 몸도 만지지 말라는 나의 말을 충실히 이행중이었다. 녀석도 자기 커리어에 있어서는 무서우리만큼 프로페셔널 하니까 조절이 잘되나 싶었다. 그냥 내가 문제지 싶었다.
“바나나 드세요?”
2인용 라운지 테이블 맞은편에 대표가 다가와 앉았다. 나는 노랗게 익은 껍질을 벗기고 바나나를 입에 넣고 있었다. 요즘 그냥 바나나가 먹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지만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노트북을 내 쪽으로 당겨서 그에게 공간을 내어 주었다.
“설마 그게 점심?”
“음, 뭐 그런 셈이죠.”
“와, 그래서 그렇게 핏이 좋은 거에요? SY 때문에 괜히 내가 나이 들어 보여요.”
대표는 나와 동갑이다. 그래도 꽤 동안이긴 한데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긴 했다. 매일 맨투맨 아니면 후드티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출근했다. 어떨 때는 똑같은 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오기도 했다. 옷장에 같은 옷만 스무 벌쯤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더럽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다. 문제는,
“조쉬가 인터뷰 있다고 말해 줬어요?”
그가 자꾸 나를 회사 홍보용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전 직장에서는 대외적으로 내 얼굴이 팔릴까 봐 좌천까지 당했는데 지금 회사는 자랑이라도 하는 듯 나를 외부 홍보사원으로 내세우고 싶어 했다. 그건 마치 우리 회사에 게이도 다니고, 외국인도 다니고, 이렇게나 쿨하고 멋진 직장이니 입사해 주세요 하고 선전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딱히 불만은 없으나 말했다시피 내가 요즘 좀 바빴다.
“맥스.”
“네.”
“이번 것만 하고 다음부터는 다른 분 시키세요. 얼굴이 너무 팔려서 초등학교 동창생한테까지 전화가 와요.”
“인터뷰도 아무나 못 시키는 거 아시잖아요. SY처럼 프레스 교육 제대로 받은 사람도 몇 명 안 되고.”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전 그런 거 쑥스러워서.”
야 나도 쑥스러운데 니가 하라 해서 해 주는 거잖아. 대표라는 직책은 이럴 때 참 편하네.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사실 회사가 요즘 외부 인터뷰를 하고 인터넷 기사를 내는 것에는 노림수가 있다. 평소에 기업 이미지를 좋게 해서 좋은 인재를 영입하려고 하는 것. 그러고 보니 인재 영입에 딱 맞는 사람을 내가 한 명 알고 있는데.
“맥스, 인사팀 티오 있어요?”
“네, 누구 추천하실 분 있어요?”
그렇게 어쩌다 보니 나는 정호민을 우리 회사 인사팀에 추천하고 있었고 맥스는 곧바로 이력서를 받아 달라고 했다. 회사가 점점 게이 월드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
감기를 얼른 낫게 하고 싶어서 일찍 퇴근 후 병원을 또 다녀왔다. 한국도 빌딩 온도와 바깥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해서인지 증상이 금방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몸살은 아니어서 연차를 내고 쉬기도 애매했던 터라 이번 주말을 집에서 푹 쉬기로 했다. 집에 계신 또 다른 분께서는 딴 계획이 있으신 듯했지만.
“왜 그렇게 차려입었어. 또.”
“나 연예인이야, 잊은 거야?”
거실 소파에 누워 쿠션을 끌어안고 뒹굴뒹굴하는 내 눈앞에서 녀석이 드레스룸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내게 약점이 있다면 그건 최수혁이고, 그중 가장 심한 약점이 있다면 쌔끈하게 꾸민 최수혁이다.
아침부터 어디를 가시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했다. 심하게 하체 핏을 살려 주는 데님에 빳빳한 블랙 셔츠, 작년에 내가 선물해 준 매탈 시계와 왁스로 고정시킨 앞머리까지. 그렇게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더니 외출 준비가 끝났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소파에 널브러진 채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최수혁이 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팔을 괴고 말을 꺼낸다.
“선택해.”
“무엇을.”
“혼자 집에서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을 건지, 아니면 오늘 하루 실컷 나 구경하든지.”
고민된다. 물론 하루 종일 잘난 내 남자 구경을 하고 싶다. 무슨 스케줄인지 몰라도 컨셉을 보아하니 놀러 가는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나는 일단 언제나처럼 나가는 걸 준비하는 것이 귀찮았고, 지금도 이렇게 몸에서 신호가 오는데 괜히 밖에서 혼자 꼴리기라도 하면 해결도 안 되니까 위험부담이 좀 컸다.
최수혁은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일단 사전 조사부터 해 보자.
“오늘 촬영 있어?”
“응.”
스읍… 땡긴다. 녀석은 일하고 나는 놀면서 구경하는 건 항상 옳다.
“혹시… 화보 촬영이야?”
“응.”
젠장.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보 촬영이라니. 이미 반쯤 넘어갔다.
“잡지사야? 어디 건데?”
“사이어지.”
“어서 가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건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 사이어지는 사진 전문 매거진인데 나와 사귀기 전 녀석이 찍었던 그 사진의 출처였다. 그러니까, 내가 술 마시고 사고 친 다음 날 인터넷에서 찾아본 최수혁의 흑백 사진. 그 사진을 보고 내가 얘 좋아하는구나 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훌륭한 사진을 찍어 주는 촬영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당연히 따라가야지.
샤워를 했다. 드레스룸에는 이미 최수혁이 골라 놓은 옷이 세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따라갈 걸 알고 있었구나. 정세연 이 단순한 놈. 욕실로 들어가 아이보리색 셔츠 소매를 올리고 머리를 세팅했다. 물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터라 왁스로 결을 잡기가 편했다. 다음 주쯤에는 머리를 자르러 가야겠네. 손을 씻고 거실로 나오는데 최수혁이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녀석도 나를 구경하는 듯했다.
“뭐 해, 늦은 거 아니야?”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오히려 먼저 나갈 참이었다.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녀석이 일어났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거실 복도 테이블에 자동차 키들이 나란히 올려져 있다. 그 앞에서 둘 다 잠시 망설인다.
페라리, 포르쉐, 아우디, 마쓰다, 횬다이.
뭐랄까 오늘 우리의 느낌은… 최수혁이 먼저 포르쉐 키를 집었다. 그래 나도 동감이야. 녀석을 따라 현관문을 나섰다.
***
도착한 곳은 야외였다. 오랜만에 보는 최수혁의 매니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같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폐공장 같은 곳이었는데 천장이 높고 창문 길이가 길어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웬일로 잡지사 촬영을 하게 되었냐고 매니저에게 물으니 사이어지 창간 20주년 기념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기획 인물에 선정되었다고 했다. 근데 최수혁이 아름답지는 않지 않나? 내 말에 매니저가 웃었다.
나는 30분쯤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건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고 아름다운 육체들 특집인 것 같았다. 옷을 벗지는 않았지만 포토그래퍼가 포커싱하는 것은 최수혁의 얼굴보다 그의 육체였다. 주먹을 쥐어 힘줄이 잡힌 팔, 돌아선 뒷모습, 미간이 잡힌 인상 쓴 얼굴. 그는 이런 것들을 녀석에게 주문했다.
“몸을 쓰는 직업들을 찍고 있어요. 운동선수, 모델, 건설 노동자 같은. 수혁씨는 온몸으로 연기하는 영화배우로 선정된 거고.”
에디터가 다가와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 한마디 덧붙인다.
“혼자 보고 싶으시겠지만, 저희가 조금만 찍어 갈게요.”
에디터가 나를 보며 윙크를 했다. 이렇게 꼭 티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의 반응은 그냥 웃어 주는 것 정도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둘이 대한민국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최수혁이 나와 매니저 쪽으로 걸어왔다. 올 때에 비해 셔츠 단추가 두 개 더 풀려 있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마시고 있던 물을 최수혁이 생각 없이 가져간다.
“감기 옮는다.”
얼른 빼앗은 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따지 않은 생수병 하나를 대신 건네주었다.
“아, 세연씨 목소리가 좀 맹맹하다 느꼈는데 감기 걸리셨구나.”
“네. 그리고 조심성 없는 어떤 분께 옮길까 봐 저만 열심히 노력중이고요.”
나는 들으라는 듯 본인을 쳐다보며 핀잔을 주었다. 녀석이 알았다는 뜻으로 내 코를 잡고 흔들었다. 매니저는 둘이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
계속 서 있었더니 잠깐 현기증이 오는 듯했다. 매니저가 작은 간이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거기에 몸을 의지해 앉았다. 그 앞에 최수혁이 쭈그리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이마에 손을 짚어 본다.
“열은 없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 코가 너무 막혀서 뇌가 띵해지는 느낌.”
뭔지 알겠다며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촬영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사 줄게.”
밥을 사 준다는 것이 이제 의미 없는 사이이긴 했지만 나는 생색내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녀석이 웃으며 알겠다고 하고 구겨져 있던 다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촬영 장소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괜히 따라와서 신경 쓰게 만든 건가 싶기도 하네.
나는 최수혁이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내가 하는 일과는 업계가 너무 달라서 일단 구경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성질머리 더러운 놈이 웃으며 스텝들 말을 고분고분 따라 주는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녀석도 그걸 알아서 여건이 허락하는 선에서 내게 자주 같이 가자고 권유해 주곤 한다.
‘나도 정세연 회사에서 일하는 거 보고 싶은데.’
‘미팅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가져다주랴?'
그런 대화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팀원이 찍어 준 내 프레젠테이션 발표 사진을 녀석이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짐승처럼 덤벼드는 최수혁 때문에 둘 다 사정을 몇 번 했었더라? 젠장, 섹스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아랫배에 피가 몰린다.
후반부 촬영이 끝나고 결과물들을 같이 확인하는데 찍힌 사진들이 너무 예술이라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훔쳐 가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뭔가 모델 같지 않고 진짜 배우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이, 진짜 잘 찍는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녀석을 먼저 차 안에서 기다렸다. 둘 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덕에 최근 들어 최수혁의 매니저는 할 일이 더 없어진 편이다. 월급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스캔들 이후 외부 일정이 거의 없는 최수혁 덕에 그는 다른 신인 배우 한 명을 새로 담당하게 되었다. 재작년 그 난리 통에도 끝까지 의리를 지켜 준 소속사와 최수혁은 지난달 재계약을 했다.
“한정식 예약했어. 지난번에 아버님 어머님 만난 거기.”
“응 난 괜찮아.”
조수석으로 들어온 녀석이 좌석을 뒤로 쭉 빼고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촬영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올해 초 최수혁의 부모님을 뵈었다. 내게도 큰 사건이었지만 두 분에게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부터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천천히 뵙겠다고 계속 미루어 두었었는데 나보다 두 분이 더 궁금해하셨던 듯했다. 더 이상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날씨가 따듯해질 무렵 최수혁의 부모님을 뵈었다.
언론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내 존재는 알고 계셨을 것이고, 최수혁이 자신은 부모님에게 다 말하는 사이라고 했는데 어디까지 말한 건지를 몰라 식사 자리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같이 산다고 들었는데….’
‘스타트업 다닌다구요.’
‘양친은 다 미국에? 아….’
이런 말들을 하실 때마다 꽤 알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가능한 내 사생활에 관해 물어 오지 않는 우리 집 분위기에 비해 녀석의 부모님은 상당히 디테일한 질문들을 하셨고 식사 자리 내내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으셨다.
그날 이후 최수혁은 다시는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 커 온 탓에 기대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녀석의 예상과는 달랐다. 막상 아들이 남자 연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3차원으로 지켜보니 심경의 변화가 생기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그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너 길 잘못 들었다. 여기서 좌회전 신호 받아야 돼.”
아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차선 변경하는 걸 잊고 있었다. 빙 돌아가게 생겼네. 오른손으로 콘솔박스에 놓여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뚜껑을 닫는 내 손 위로 최수혁이 제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손을 가져가 손바닥을 쓸다 갑자기 깍지를 낀다. 기다란 녀석의 손가락이 내 손마디를 쓰다듬었다.
“우리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음, 거의 2주.”
“하루 종일 참느라 혼났어.”
“니가?”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녀석에게 붙들린 덕에 정신이 좀 산만해졌다.
“다른 사람이랑 니가 얘기하고 웃고, 그런 거 멀리서 볼 때 굉장히 꼴리거든. 당장 내가 너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더 흥분되나 봐. 변태인가?”
“뭐, 나도 너 일하는 거 보면 흥분하니까. 같은 맥락 아닐까?”
“아… 짜증 나네.”
녀석이 내 손바닥 위에 동그라미를 계속 그렸다. 욕구 불만의 표시다. 다 좋은데 나 운전할 때 그러지 마라. 사고 나겠다 진짜.
최수혁의 계속되는 손바닥 플러팅에 하마터면 또 한 번 좌회전 신호를 놓칠 뻔했다. 여차여차 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근데 너 아직 못 내리겠다. 자기도 웃긴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를 보며 큭큭거린다.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애국가 부르다 오겠지 뭐. 예약을 해 둔 덕에 개인실로 안내받았다. 따라 들어온 종업원에게 대충 알아서 먼저 주문을 해 두었다.
뭘 먹을 건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 이런 변화들에 한 번씩은 나 자신도 놀랄 때가 있다. 5분쯤 지나니 최수혁이 들어왔다.
“참 내가 말했나? 동재 결혼해.”
맞은편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최수혁이 갑자기? 하며 물었다.
“속도위반.”
그제야 납득을 했다. 그랬다. 이동재가 김시은과 결혼을 한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알았지만 결혼을 이렇게 빨리하게 된 까닭은 사고를 쳐서 그렇다. 잘됐지 뭐.
둘의 해피엔딩에는 나의 업적이 매우 크다. 난 몰랐지만 내가 최수혁과 잘되면 둘이서 기쁨의 술 한 잔, 틀어지면 응원의 술 한잔, 뭐 그렇게 자주 만났었던 듯했다.
그러고 보면 동성 커플들의 엔딩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한국에선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지도 못하니까 헤어지면 끝이겠네. 그러면 나는 최수혁과 사실혼 관계인가? 녀석을 쳐다보았다.
“혼자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해 줄게.”
“고마워.”
나도 모르게 그 말에 위안을 받았는지 쓸데없는 상념이 멈춰졌다. 얼마 안 가 주문한 음식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켰냐는 타박을 받았다.
“내일 스케줄은 어떻게 돼?
또 어딜 가야 하나 싶어서 미리 물어봤다.
“없어. 너한테 맞춰 줄게.”
“그럼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겠네.”
“그래야 해?”
그래, 그래야 한다. 직장인 애인을 둔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어쩌겠어.
둘이서 오랜만에 포만감이 가득한 식사를 했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식욕을 채웠으니 이제 수면욕을 채우러 집으로 가야 했다. 어차피 나머지 욕구는 채우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돌아가는 길 운전은 최수혁이 해 줬다.
차를 세운 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우편물들을 확인했다. 웬 보험사 우편물들이 이렇게 많이 온 건지. 나 몰래 생명보험이라도 들었나. 최수혁 이름으로 온 것들과 내 이름으로 온 것들을 분리해서 서재 방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방문이 열리더니 녀석이 얼굴을 내밀었다.
“씻을 거야?”
“응. 야외라서 땀을 많이 흘렸네. 너 저쪽 방에 가서 씻어.”
나는 거실에서부터 옷을 벗으며 큰 욕실로 향했다. 분명 나갈 때 샤워를 하고 나갔는데 금세 땀에 젖었다. 물론 지금은 에어컨 바람에 모두 말랐지만 이대로 자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속옷까지 벗고 샤워기 물을 틀었다. 너무 뜨겁지 않게 온도를 조절하고 있는 와중에 최수혁이 욕실에 들어왔다.
“뭐야. 나 샤워하는 거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 그런 뜻으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 녀석이 욕조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포르노 영화를 찍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에 온몸이 젖었다. 의식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 녀석의 시선이 자꾸만 한곳을 향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돌리게 된다.
“나가라고. 왜 그러고 있어.”
내가 다시 잔소리를 했지만 최수혁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팔짱을 꼈던 손을 풀고 마른 턱을 매만진다. 그러다 입술을 벌려 자신의 손톱을 깨물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녀석의 시선은 계속 내 몸을 훑고 있었다. 녀석의 야릇한 표정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인간의 육체는 상당히 솔직하게 설계가 되어 있는 터라, 뇌에서 느끼는 흥분은 오롯이 아랫도리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머리를 감고 있던 샴푸를 씻어 내기 위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어느 정도 거품이 씻기고 샤워기를 피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최수혁이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너 물 튀잖아.”
샤워기를 끄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물기에 살짝 젖은 머리와 얼굴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욕실의 수증기처럼 내게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키스가 너무 하고 싶은데 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짜증 나네 이거 진짜.
“…삽입만 할까?”
최수혁이 도발을 시작했다. 손으로 내 엉덩이를 스윽 쓸어내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면 너 혼자 할래? 느끼는 거 보고 싶은데.”
거절할 새도 없었다. 쓸어내리던 손길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내 성기를 쥐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로 녀석이 손을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헉하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너무 오랜만에 닿는 손길에 금방이라도 갈 것 같았다. 힘이 빠질 것 같아 최수혁의 어깨에 잔뜩 젖은 얼굴을 기대었다.
“하아….”
녀석의 어깨에 코끝을 짓뭉개며 이빨로 물었다. 최수혁의 검은 셔츠가 물기에 금방 젖어 들었다. 녀석의 다른 한 손이 내 허리를 잡고 자세를 고정시켰다. 성기를 잡고 흔드는 녀석의 손길이 조금 더 빨라졌다.
“하읏….”
신음과 함께 체중이 최수혁에게 실리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나도 모르게 녀석의 엉덩이를 쥐었다. 조금씩 빨라지는 손놀림에 내 호흡이 가빠졌다. 너무 오래 굶은 건지, 별것 아닌 손장난에도 사정 욕구가 금방 치밀어 올랐다.
녀석에게 밀려 조금씩 간격이 좁혀지던 욕실 벽과의 거리가 한계에 다다랐다. 녀석이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어내 턱을 쥐었다.
“얼굴 보여 줘. 가는 거 보고 싶어.”
마주친 시선 사이에 온갖 변태 같은 욕정이 끓어올랐다. 그런 것을 부끄러워할 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녀석의 손에 사정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젖혀 욕실 벽을 찧으며 목울대를 올렸다. 녀석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아… 흐음….”
가늘게 뜬 시야로 제 아랫입술을 핥고 있는 최수혁의 얼굴이 보였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잔뜩 젖혀진 목덜미를 타고 물방울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최수혁의 하체가 닿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진득한 시선이 내려와 꽂힌다. 짜릿했다. 손놀림이 더 빨라졌다. 그대로 사정감이 몰려왔다.
“읏!”
정액을 배출하고 숨을 가파르게 내쉬는 나를 위해 녀석이 천천히 후희를 느끼게 해 주었다. 살짝 혀를 깨물며 나를 쳐다보는 최수혁의 눈빛이 점점 더 야릇하게 변해 간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긴 숨소리와 함께 사정의 여운이 모두 끝났다.
최수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정액 묻은 제 손을 세면대에서 씻었다. 그러고는 젖은 손으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스스로 상체를 탈의하고 이번에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빛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욕실 벽에 그대로 기대어 천천히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내 최수혁이 전라가 되었다. 시작 전 준비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다. 자세는 여전히 세면대를 잡고 기댄 채였다. 우리는 1미터의 간격을 두고 전라가 된 서로의 육체를 눈으로 탐하고 있었다.
녀석이 천천히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하려는 행동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오히려 내 시선을 양분 삼아 점점 더 발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나는 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벌어진 최수혁의 입속에서도 혀가 보인다. 입속을 혼자 탐닉하고 있던 분홍빛 살덩이가 타액을 바르며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으음….”
낮은 신음이 욕실 벽에 질척거리며 울려 퍼졌다. 녀석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단단하게 블럭이 잡힌 최수혁의 복근 밑으로 내 시선이 떨어졌다. 긴 손가락으로 감싸 쥔 성기에서 반들반들한 윤활유가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흥분시키는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향해 있었고 나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최수혁의 성기에 온 신경이 빼앗겼다. 사정한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랫도리에 다시 힘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잠시 녀석의 눈빛이 밑으로 향했다 다시 올라왔다. 자신이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내 모습에 꼴리기 시작했는지 손동작이 빨라졌다.
“하아….”
최수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대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돈 주고도 보지 못할 귀한 컨텐츠를 라이브로 즐기고 있었다. 그 어떤 포르노보다 섹시하다. 나도 모르게 입속에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다.
“으읏….”
최수혁이 목젖을 긁는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혼자 많이 풀지 못했던 모양이다. 정액의 농도를 보아 거의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정액에 젖은 채로 녀석이 다가왔다.
나는 샤워기를 틀었다. 녀석이 물을 맞고 있는 내 허리를 다시 감싸 안았다. 상당히 위험한 거리다.
“키스는 안 해.”
다행히 녀석에게도 이성의 끈이 남아 있는 듯했다.
“나만 또 가게 하려고?”
어느새 다리 사이로 들어온 녀석의 손길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응, 근데 이번엔 뒤로 가 줬으면 좋겠는데.”
“흣….”
예고도 없이 회음부로 들어온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던 최수혁의 정액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뜨겁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정액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다른 한 손을 뻗어 샤워기를 끄고 몸을 더 밀어 넣었다.
“아… 윽….”
“금방 넣을 수 있겠는데.”
손가락으로 구멍을 들쑤시던 녀석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키스를 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내 귓불을 핥았다. 말캉한 혀가 춤을 추며 간지럽히더니 밑으로 이어진 목덜미를 빨아 당긴다. 동시에 손가락은 하나가 더 들어왔다.
“흣….”
미끈해진 내벽이 풀어지며 입을 벌린 입구는 이미 뜨거운 온도에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최수혁의 긴 손가락이 좀 더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자극을 원했다. 내가 느끼는 스팟을 알면서도 일부러 주변만 맴도는 움직임에 갈증이 났다.
키스라도 하며 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 더 미칠 거 같았다. 욕정을 터트릴 곳이 없어 녀석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살갗을 깨물었다. 그대로 혀를 세워 핥고는 물기가 흐르는 쇄골까지 빨았다. 나와 녀석의 키 차이가 딱 거기까지이다. 허리를 숙이고 더한 것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하체를 점령한 최수혁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하아… 넣어 줘. 흣… 빨리.”
원하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최수혁의 이런 섹스 패턴은 보통 한 가지로 결부된다. 내가 끝 간 데 없이 녀석을 원할 때 한 번에 박아 넣고 곧바로 나만 가 버리게 하는 방법이다. 그 타이밍을 항상 나는 맞추지 못했다. 최수혁은 마치 내 몸에 센서라도 달아 놓은 듯 정확한 타이밍에 삽입을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넣어 주지 않고 애달프게 만들었다.
“빨… 리… 아흣….”
“더 매달려 봐.”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내벽을 훑던 손가락이 전립선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흣!!”
“좋아?”
알면서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바닥은 어느새 물기가 다 말라 쓰라렸다.
툭툭 건드리던 손가락이 세 개가 되자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쑤시고 있었다.
“아흣… 미치겠… 하… 빨리, 흣….”
“빨리? 빨리 뭐?”
일부러 이러는 것이 분명했다. 녀석이 귓불을 빨아 당기며 혓바닥으로 목을 핥았다. 온갖 성감대를 다 건드리며 구멍을 쑤셔 댔다.
“최수혁… 시… 발. 흣… 빨리 해 달… 라고. 아!!!”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예고 없이 몸이 돌려지고 곧바로 삽입이 시작되었다. 한 번에 구멍을 맞춘 녀석의 성기가 반쯤 수욱 들어와 버리는 통에 굉장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앗… 아… 흣… 아파… 아….”
“하아… 아프기만 해?”
허리가 절로 숙여졌다. 잔뜩 발기된 성기가 최수혁에게 잡혔다. 아까 사정한 정액이 미끌미끌하게 비벼진다. 아직 뒷구멍의 고통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이 천천히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아아… 흣… 천천히.”
오랜만이라 그런가 풀린 듯했던 구멍은 여전히 속이 꽉 막혀 있었다. 안 되겠다 생각했던지 녀석이 자신의 물건을 빼고 욕실 수납장에 있던 오일 병을 손에 들이부었다. 곧바로 손가락 두 개가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곧바로 전립선부터 자극하며 구멍을 넓혀 나갔다. 한 번 넣었다 빼서 그런지 내벽이 미끈거리며 여유 공간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한 번에 넣을 거야.”
헉!!!
녀석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속도 조절을 하지 않는 최수혁의 이기적인 허리 짓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퍽퍽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고통과 쾌감으로 범벅되었다.
“아흣… 악… 잠… 잠깐… 흣!”
“하아… 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미치는 줄 알았어.”
최수혁의 고백에 입구가 더 벌어졌다. 거칠어진 녀석의 신음이 자극적이다. 2주 넘게 하지 못한 섹스는 결합된 순간부터 황홀했다. 짐승처럼 치고 들어오는 욕망이 주체되지 못하고 신음으로 터져 나갔다.
“아… 아…. 흣… 좋아… 더… 읏… 더.”
“더…? 하아… 더 거칠게 해 줘?
녀석의 허리 짓에 힘이 실렸다. 내장과 벽이 뚫려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최수혁이 빠르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목덜미 뒤에서 최수혁의 달아오른 신음이 들렸다.
이러면 둘 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성기가 안으로 치고 들어올 때마다 함께 허리를 세우며 좀 더 내벽을 긁을 수 있도록 협조했다. 전립선이 심하게 찌릿거렸다. 나는 거의 다 온 듯했다.
“fuck… 나… 나 갈 거 같아. 읏….”
“하아… 나도 좋아. 지금… 하아… 해.”
“아아아… 흣!!!”
“흐읏!”
둘 다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최수혁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꽉 조여진 내벽이 수축한다. 드라이한 쾌감이 몰려왔다. 상상도 못할 만큼 짜릿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한 번 더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내었다. 환상적인 섹스였다.
“너무 좋은데.”
최수혁이 귀를 깨물며 뒤에서 속삭였다.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잡았다. 곧바로 깍지가 끼워진다. 같이 느끼는 건 항상 뒤끝이 좋다. 누구 하나 덜 풀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여운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마음마저 들었다.
녀석이 성기를 빼내고 정액을 훔쳤다. 샤워기를 다시 틀고 함께 물줄기를 맞았다. 콘돔 없이 사정한 탓에 뒤처리가 오래 걸렸다. 비릿한 정액 냄새를 모두 씻어 내자 향긋한 바디 크림 냄새가 욕실 안에 퍼졌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나와서 그런지 거실에 서늘하게 퍼진 에어컨 바람이 너무 시원했다. 곧바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다 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인간의 3대 욕구를 모두 해결한 날이었다.
***
키스 금지령이 풀린 것은 그 후 1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최수혁의 후시 녹음이 끝났고 나도 감기가 나았다. 3주 만에 키스를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하루 종일 입술을 붙이고 살았다. 입 주변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였다.
피부가 약한 나는 아예 마스크를 하고 회사에 가야 했다. 감기가 다 낫지 않았다며 기침을 하는 열연까지 펼쳤는데 눈치챘을까?
“시발 몰라. 눈치챘음 챈 거지 뭐.”
“모를 거야. 형도 이제 연애한 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꽁냥거리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이동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능청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변명했지만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이동재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었다. 괜찮다고 보여 달라고 하도 지랄을 해서 마스크를 벗었는데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부풀어 오른 내 입술을 보고 한참을 비웃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내가 형 연애 패턴을 알잖아.”
“잘 알지. 니가.”
“그래서 최수혁 땜에 사고 치고 구르고 울고 막 그럴 때는 뭐 그냥 이번 연애는 좀 시끄럽게 하네 그 정도로 생각했거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스크를 턱에 걸고 빨대로 스무디를 마셨다.
“근데 스캔들 터지고 둘이서 절절대는 거 보니까. 아이고, 이 양반들 인생 걸었구나. 이거 이거 사랑이구나.”
“칭찬으로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동재의 말에 일리가 있다. 모든 연애가 같을 수는 없다. 모두가 상대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쭉 엑스트라만 있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나타날 수도 있고, 너무 빨리 주인공이 등장해서 중도 퇴장한 뒤 조연하고 남은 평생 살 수도 있는 거니까.
어느 드라마 작가님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고 했는데, 나는 최수혁을 만나기 전까지 쭉 유죄였던 듯싶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냐.”
“하아….”
그 말에 이동재가 곧바로 긴 한숨을 쉬었다.
“배는 불러 오지, 예식장은 다 풀이지. 뭐야 우리나라 왜 이렇게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
“김시은이 원하는 식장이 따로 있나 보지?”
“응. 스몰 웨딩 하고 싶대.”
“해 줘 그럼.”
“그 스몰 웨딩이 요즘 유행이라서 그거 해 주는 곳 예약이 꽉 찼더라고. 아이러니 아니야?”
“직접 플래닝하면 되잖아. 스몰 웨딩의 뜻을 모르냐? 그냥 어디 해외 나가서 가족들하고만 식 올리는 것도 좋아. 김시은 성격에 별로 신경 안 쓸 거 같은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나는 스무디를 먹다 말고 이동재를 쳐다보았다. 어쭈?
“아니, 이제 애 생기면 좋은 시절 다 갈 텐데 그런 거라도 근사하게 다 해 주고 싶더라고. 미안하기도 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철이 든 건지, 아니면 원래 철이 든 사람이었는데 김시은을 만나고 개화한 건지 궁금했다.
이동재와는 벌써 알고 지낸 지 7년이 넘었다. 원래는 그냥 한 다리 건너 아는 동생이었는데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만나고 보니 갑작스럽게 친해졌다. 개그 코드가 잘 맞아서 어울려 다니다 보니 이렇게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이를 먹어 가고 인생에 있어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 준다.
그 와중에 이동재가 김시은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온갖 귀염 발랄 스티커들을 보내면서 자기야, 여보야, 난리가 났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나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거니 받거니 이어 나갔다.
“결혼도 아직 안 했는데 여보야 소리가 막 나오는구나.”
“한 거나 다름없지 뭐, 애가 있는데.”
“하긴.”
“형은 뭐라고 하는데?”
“뭘.”
“뭐라고 부르냐고 서로.”
“이름.”
“그리고?”
“음… 이 새끼? 저 새끼? 싸울 때는 시발놈아, 미친놈아?”
이동재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 이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고 웃어 대는 동재 녀석의 행동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마스크를 다시 올려 썼다. 이 미친놈이 왜 이래.
“아니 이게 남남 커플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형이랑 최수혁 성격인 거야.”
“왜, 그럼 내가 뭐 자기야라 불러야 해? 나 그런 거 정말 성격에 안 맞아.”
“은근 좋아할 거 같은데?”
“흥. 미친놈이라고 욕 안 먹으면 다행이지.”
“아직도 이름을 부른다고? 설마 성도 붙여서 풀네임으로?”
“응.”
뭐 최수혁은 가끔 지 기분 좋을 때 성을 빼고 부르긴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화할 때 대부분 호칭을 생략한 채 말한다. 주어 없이 말해도 잘만 통하던데. 혹시 녀석은 섭섭했었나.
“한번 시도해 봐. 오늘.”
“안 돼. 닭살 돋아.”
“사랑한다는 얘기는 자주 해?”
가뜩이나 요즘 고민중인 토픽이 올라왔다. 한 번도 한 적 없다고 했더니 이동재가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사랑 안 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존나 사랑하지.”
“근데 왜 말을 안 해 주는데?”
“말로 해야 아냐? 그냥도 느껴지지 않나? 내 사랑이?”
“와… 진짜. 나도 남자지만 형 같은 애인 두면 속 터져서 벌써 헤어졌어. 왜 형이 여자 사귈 때 반년을 못 가고 매번 차였는지 알겠어.”
“최수혁도 그런 얘기 안 해.”
“천생연분이다 그래.”
결론이 나쁘지 않아서 대화는 마무리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이 부분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평생 어떤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나 사귀면 다 사랑한다 속삭이는 것은 가벼워 보여서 싫었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다르다. 나는 그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별로라고 느껴 왔다. 말의 무게만큼 책임을 지는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최수혁이 좋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고 난 다음의 최수혁은 그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녀석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떨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관계에 더 큰 변화가 일어날까? 여기서 더 일어날 변화가 있나? 내 표정이 심각하게 바뀐 것을 보고 이동재가 테이블을 콩콩 두드렸다.
“나가자고.”
몸을 일으켰다.
***
사실 이동재와의 대화 후 며칠간 나는 호칭을 좀 바꿔 볼까 고민했었다. 좀 더 몽글몽글하게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최수혁은 한 번씩 닭살 돋는 멘트를 해 주기도 하는 편이었으니 정말 문제는 내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나는 항상 최수혁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려고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았고, 최수혁은 묵묵히 내어 주기만 할 뿐 뭔가를 바라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애교라는 걸 한번 부려 줄까 생각했었는데 그 결심은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토요일 일요일, 우리는 집이 떠나갈 듯 소리 지르며 싸웠다.
이 정도로 싸운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유는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최수혁이 모든 원인 제공자가 나라고 했다.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갈 수도 있지.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그런 거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건 뭐야.”
내 말에 정호민이 웃었다. 대표와의 면접을 끝내고 점심을 같이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일식 돈까스 집에 앉아 깨를 갈다가 진짜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엔 정호민이 싸우고 나한테 상담하더니 오늘은 입장이 바뀌었다.
“그러게. 몇 시에 들어갔는데?”
“8시.”
“일찍 들어갔네.”
“아침 8시.”
“뭐?!”
아니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늦게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한번 달리면 끝을 보는 동창회 모임이었고 원래 그 모임은 아침밥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룰이었던지라 하던 대로 했는데 난리가 났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각자 집이 있었던 덕에 귀가 시간을 체크당하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최수혁이 아침까지 깨어 있을 줄이야.
사실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위치추적 앱까지 깔았는데 거기에 관해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앱까지 깔았으니 이제 맘대로 늦게 들어와도 되는 거라 생각한 건 나였고, 앱까지 깔게 했으니 눈치껏 일찍 들어오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기대한 것이 최수혁이다.
“연락은 계속해 줬고?”
“배터리가 나갔어.”
“클리셰네.”
“아니 그래도 늦게 들어온다고 아침에 미리 말했다니까.”
“그래도 8시는 심했네. 야 그거 너무 많이 갈면 맛없어.”
너무 갈아 버린 탓에 파우더가 된 깨 그릇에 정호민이 소스를 부어 주었다. 곧이어 주문해 둔 음식이 나왔다. 두툼하게 썰린 돈까스를 보니 간만에 식욕이 돌았다.
그렇게 싸운 게 토요일이었고 처음엔 내가 미안해서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일요일인 어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술 먹는 건 좋은데 그렇게 아침까지 달리는 건 이제 자제하라는 최수혁과 니가 뭔데 내 사생활까지 참견하냐는 나의 말에 녀석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정확히 말해 녀석의 특기인 기나긴 침묵이 시작되었고 그걸 절대 못 견뎌 하는 내가 최수혁의 성질을 긁었다.
“뭐라고 긁었는데?”
“이럴 거면 따로 살자고.”
“야… 너도 참.”
정호민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배추 샐러드를 먹는다. 사실 나도 그건 홧김에 나온 말이라 금방 취소하고 싶었는데 최수혁이 ‘그러든가 그럼.’ 하고 담배 피우러 나가 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둘 다 한 성격 하는 탓에 여태 못 풀고 오늘 출근을 했다. 우리는 50년 세월 인내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다큐멘터리를 보고도 배운 게 하나도 없었다.
“박건희 팀장은 어디까지 참견해? 니 사생활.”
“사생활… 음… 형은 그런 거 참견 안 해. 근데 세연아, 이건 사생활에 관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정호민이 음식물을 삼키고 싶었던 듯 말을 끊었다. 나는 돈까스를 입에 넣고 씹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모임은 유부남이 자기 와이프 신경 쓰여서 먼저 집에 간다고 해도 막 아침 먹고 가라고 억지로 붙잡고 그래?”
“에이, 그렇게 개념 없진 않아. 그럼 보내 줘야지.”
“같지 않아? 어차피 우리는 마지막까지 결혼은 못 하잖아.”
나는 정호민을 쳐다보았다. 니 말인 즉, 내가 유부남이라는 거냐.
“제도적 장치가 없으니 우리 스스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업그레이드시켜 줘야 하잖아. 나는 최수혁씨가 너를 이미 업그레이드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봐. 그래서 화내는 거야. 파트너로서 존중해 달라는 거지.”
“너 왜 이렇게, 어른스럽냐.”
“후후후. 그러냐.”
정호민에게 얘기하길 잘했다. 같은 게이 커플이고 박건희 팀장도 한 성깔 하는 인물이니 여러모로 말이 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이 맞다. 우리가 만약 결혼했고, 최수혁이 내 배우자였다면 나는 적어도 해 뜨기 전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우는소리를 했을 것이고 내 친구들도 두말없이 나를 보내 주었을 것이다.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는 관계이니만큼 우리가 서로를 더 확실하게 인정해 줘야 했는데 나는 참, 아직도 녀석에 비하면 멀었구나.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오는 길에 휴대폰 대화창을 열었다. 뭐라고 하지. 미안하다? 아직도 화났어? 그냥 모른 척 오늘 저녁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볼까. 그렇게 해서 푼 적이 몇 번 있긴 했잖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자기야, 미안… 화 많이 났어? 아잉 그런 거 아니라니깐. 미안 미안….”
칫솔을 들고 여자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직원 한 명이 휴대폰으로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귀엽다. 애교가 정말 좋구나. 나라도 있던 화가 그냥 풀어지겠어. 안 되겠다, 나도 빨리 사과를 해야겠다.
휴대폰을 들고 용기 있게 한 자 한 자 써 본다.
인생 최초로,
[자기야]
이런 호칭을 붙여 가며,
[미안해]
사과를 하고,
[다신 안 그럴게]
용서를 빌었다.
송신. 모르겠다 이제. 오늘 촬영 스케줄 있다고 했으니 나중에라도 보겠지. 돌아오는 부끄러움은 모두 나의 몫이다.
화장실에 들러 가글을 한 뒤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챙겼다. 시계를 보니 벌써 2시다.
“아, SY. 내가 오전에 메일 하나 보냈는데요.”
“봤어요. 회신 드릴게요, 저 지금 면접 가야 해서.”
“오케이.”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는데 여전히 최수혁이 메시지를 읽고 있지 않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라운지에 비치된 생수를 두 병 손에 쥐고 외부 미팅룸으로 향했다. 말끔하게 정장을 빼입은 여성 지원자가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미팅룸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여기 물 드세요.”
생수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고 하나는 뚜껑을 바로 따서 내가 먼저 들이켰다. 노트북에 띄워진 지원자의 이력서를 오전에 잠깐 훑어보긴 했지만 시간이 모자라 외우고 있지는 못했다.
“해외사업부 프로젝트 리드 맡고 있는 정세연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먼저 해 주시면 바로 질문 드릴게요.”
“네. 우희정이라고 합니다. 영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제영기획에서 2년간 광고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으며….”
전 직장이 나쁘지 않은 곳인데 2년 만에 이직을 하네. 예전의 나 같으면 근성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쪽 업계로 오고 나니 1~2년 안에 이직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직장에서 5년 넘게 있었던 내 경력이 오히려 눈에 띄는 편이었다.
지원자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그녀가 쌓아 온 경력들을 빼곡히 메모했다. 토플 점수가 좀 낮은 편이다. 사실 점수는 중요한 게 아니고 나 대신 해외 출장을 많이 가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네, 설명 감사합니다. 해 오신 일이 해외 쪽 일은 아니신데 왜 이쪽으로 지원하셨어요?”
“아, 제가 제영기획 있을 때 가끔 해외 업무를 보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일했던 팀워크나 워킹 스타일이 저랑 잘 맞아서 부서 이동 신청을 했는데 묵살되었거든요. 기왕 일하는 거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싶어서 퇴사 결심하고 해외 사업 쪽으로 지원을 넣고 있습니다.”
“그때 보조하신 일은 어떤 업무였나요?”
“아 네! 해외 클라이언트와 미팅 어레인지하고 방문 코디네이팅 해 드리는 일이었구요. 잘한다고 칭찬해 주셔서 직접 프로젝트 보조에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TV 광고 쪽이었습니다.”
“영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에요?”
“회화는 막힘없이 가능한데 문법이 좀 약해서. 지금도 토플 점수 더 올리려고 공부중이고요. 아 그리고 일본어는 N1급 있습니다!”
“なら日本語で少し りましょうか?(그럼 일본어로 잠깐 얘기할까요?)”
“あ、はい!(아, 네!)”
경력도 나쁘지 않고 자기 어필도 괜찮았다. 마지막 면접은 항상 대표가 보는데 워낙 사람을 잘 떨어트려서 내가 올려 준다고 해도 떨어질 확률이 반 이상이다. 밑에서는 사람 뽑아 달라고 난리인데 아무나 뽑을 수 없다고 버티는 모양새는 대기업이나 여기나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30분 정도를 질문하고 나머지 10분은 역으로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궁금한 건 없습니다 하고 일어서는 후보자는 대부분 입사를 못 한다.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확률적으로 그랬다. 아마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쓸데없는 질문을 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피곤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을 궁금한 척 물어보는 것도 사절이다. 면접은 양측 모두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다.
“저… 그리고 또 궁금한 거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회사 동호회 활동 같은 것도 지원해 주시나요?”
“아… 네. 복지제도 차원에서 지원금도 나오고 꽤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임도 있다고 들었어요.”
“면접관님은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 계시는데요?”
“저요? 저는 안 하고 있어요.”
“아 네….”
대부분의 젊은 지원자들은 회사 복지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했다. 밥은 주냐, 출근 시간은 언제냐, 연차는 얼마나 되냐 등등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오늘은 동아리 지원 제도에 관한 질문까지 받았네.
면접을 끝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그녀를 데려다주고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입구에서 대표에게 붙잡혔다. 요즘 맨날 나만 붙잡고 진짜…
“SY, 나 파이널 면접 하나만 대신 들어가 줄 수 있어요?”
“나 지금도 면접 하나 보고 온 건데요, 맥스.”
“한 번만요. 조쉬가 스케줄 이중으로 잡아서 지금 외부 미팅 나가야 하거든요. 근데 후보자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네. 쏘리, 한 번만 해 줘요! 땡큐!”
간만에 재킷까지 입고 나온 대표를 보니 꽤나 중요한 미팅인 듯했다. 시계를 보니 2시 50분이다. 다음 미팅이 3시 반에 있으니 얼른 해치우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나한테 떠넘길 생각이었는지 조쉬가 후보자의 이력서를 메신저로 이미 쏴 주었다. 다시 생수 한 병을 들고 다른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후보자가 벌떡 일어나 ‘안녕하십니까!’ 하며 우렁차게 인사를 한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인사…
“기현아.”
“어! 팀장님!”
김기현 인턴이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다. 세상 참 좁다.
“와, 팀장님이 최종 면접에 나오실 줄 몰랐어요.”
“어 원래 대표가 해야 하는 건데 오늘 좀 일이 꼬여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근데 아는 사람이라 면접 보기가 좀 그렇지 않으실까요?”
“그러게. 곤란하네.”
나는 얼른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예전 팀에 데리고 있던 인턴이라고 하니 더 잘됐다고 한다. 같이 일을 해 봤으니 더 잘 알 거 아니냐며 최종 합격 권한을 그냥 넘길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사실 팀장님 여기 다니시는 건 알고 있었어요. 기업 인터뷰하신 거 봤거든요.”
“연락하지 그랬어. 번호 알려 줬잖아.”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제 힘으로 해 보고 싶어서요.”
자세가 좋네. 역시 우리 팀 출신다워.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해졌다. 경력이 없는 신입사원이니 사실 질문할 것이 별로 없다. 얼마나 성실한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느낌으로 사람을 보고 뽑아야 하니 경력직보다 신입 면접은 두 배로 힘들다.
김기현은 그때 말한 대로 토플 점수를 더 올렸고 스펙을 열심히 쌓았다. 루신 그룹은 이미 떨어졌다고 했고 나는 오히려 잘된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인턴 때 김기현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얼마나 우리 팀에 도움이 되었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막판에 엑셀 테이블에 실수하는 바람에 내가 야근으로 메꿔 준 기억이 났다. 고민이 된다.
“저 이제 엑셀 잘해요. MOS도 땄구요.”
본인도 그 기억이 났는지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한다. 귀여웠다. 처음인데 실수야 누구나 하는 거지 뭐. 문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거지.
나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김기현은 열심히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해 설명을 했다. 대학 때 어떤 일을 했고 봉사활동을 뭘 했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이 난 상태였다.
다른 후보자들과 똑같이 1주일 안으로 인사팀이 연락을 할 거라는 말을 해 주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곧바로 조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합격이요]
오랜만에 최종 합격자가 나온 터라 조쉬가 좋아하며 기쁨의 이모티콘을 날렸다. 빈 생수병을 라운지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저렇게 하루를 보내고 퇴근할 때까지도 최수혁에게서는 답 문자가 없었다. 매일 이 시간에 생존 신고를 해 주시던 분이 시동을 걸고 회사 빌딩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연락이 없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라고 이미 각오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른 척을 할 수 있나. 나쁜 새끼. 인정머리 없는 놈. 역시 너는 성질 더러운 싸가…
전화가 왔다. 수신음이 울리며 자동차 계기판에 최수혁의 이름이 뜬 걸 보니 내가 지 욕하는걸 알았나 보다.
“응.”
-퇴근해?
“어.”
-왜 또 이렇게 뻣뻣해졌어. 낮에는 그렇게 애교가 넘치더니.
“그거 애들이 장난으로 보낸 거야. 나 아니야.”
-니가 보낸 거 다 알아.
에이씨… 왜 이렇게 나를 잘 알지? 뭘 좀 속이려고 해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바람에 최수혁에게는 항상 장난으로라도 사기를 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화 풀었어?”
-풀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저녁 어떻게 할 거야.
“나 이제 막 출발했으니까 뭐 좀 사 갈까? 땡기는 거 있어?”
-글쎄… 햄버거?
“알았어. 기다려. 집이지?”
-응.
웬일로 햄버거를 먹겠다고 하네.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는 분이신지라 수제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감자튀김과 밀크쉐이크도 주문하고 포장을 받아 다시 차에 올랐다. 고소한 햄버거 냄새가 차 안에 퍼져 나갔다.
집에 들어오니 최수혁은 이미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식탁 위에 포장해 온 음식들을 늘어놓고 티슈 곽을 집어 와 옆에다 놓았다. 흘리지 말고 먹으라는 의미기도 하지.
“오늘 면접 봤는데 나 루신 있을 때 인턴으로 데리고 있던 애가 온 거야. 세상 진짜 좁지?”
햄버거 종이를 접고 있던 최수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본다. 허지환이 아니고 다른 인턴이라고 곧바로 설명해 줬다.
“정세연 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피곤해.”
“그래서 그렇게 화낸 거야? 내가 다른 놈이랑 어디서 밤새 놀고 있었을까 봐?”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닌데 니가 좀 뭐랄까. 착한 건 아닌데 물러 터졌잖아. 그래서 어디 나쁜 데 끌려갔나 생각했었어.”
나쁜 데? 어디지 그런 곳이? 아니 나도 나름 180이 넘는 키에 건장한 성인 남성인데 끌려가다니.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최수혁은.
“뭐 덕분에 정세연 애교 넘치는 문자도 받고. 나쁘지 않네.”
“지워라.”
“캡쳐해서 배경화면으로 쓸까 해.”
“야!”
“덕분에 나 진지한 장면 촬영중이었는데 하루 종일 NG냈어.”
“왜. 너무 웃겨서?”
“아니 너무 좋아서. 표정 관리가 안 되더라.”
좋았다고? 하루 종일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이동재가 한 말이 맞았나 보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최수혁이 혼자 재밌다는 듯 웃으며 계속 햄버거를 먹는다.
녀석은 감자튀김을 먹지 않는다. 먹고 싶은데 몸 관리 때문에 안 먹는 건지 진짜 안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아까부터 나만 먹고 있었다. 이런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혼자 생각하고 물어보지 않는 거. 그래서 내가 매일 녀석에게 지고 있었나 보다.
“최수혁. 니가 감자튀김을 안 먹는 건 몸 관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안 좋아해서 안 먹는 거야?”
“자기라고 불러 주면 대답해 주지.”
“헛소리하지 마. 문자로는 해도 말로는 불가능이야.”
“그래 그럼. 나도 대답 안 해.”
“야!”
나를 놀리는 게 재밌는지 혼자 큭큭대며 휴지로 입을 닦았다. 재밌냐. 이럴 때 보면 애 같다 진짜.
“진짜 좋아서 그래? 너 그런 소리 듣는 거 좋아했어?”
“아니 난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뭐든 정세연의 최초가 되는 건 기분이 좋거든.”
어느새 햄버거를 다 먹은 최수혁이 물을 들이켜며 입가심을 하고는 나를 쳐다본다. 그새 머리가 다 말랐는지 앞머리가 한쪽 눈썹을 덮었다. 잘생겼어 진짜. 이렇게 잘생겼는데 까짓 거 한 번 해 주지 뭐.
“…자기야.”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응’ 한다.
“자기는 왜 감자튀김 이런 거 안 먹는 거야? 몸 관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원래 싫어하는 거야?”
“관리하느라. 크게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기도 하고.”
“자기는 라면도 그래서 안 먹는 거야? 몸 관리한다고?”
“응.”
“그래, 솔직한 답변 고마워 자기야.”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일어나 어지럽혀진 식탁 위를 치우고 남은 음식을 모아 죄다 쓰레기통에 넣었다. 분리수거 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남자 둘이 사는 집이 그렇지 뭐. 민망한 상황을 돌파하고자 부지런히 식탁 위를 청소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시는 대배우님께서는 그런 나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웃고만 계신다.
“세연아, 이리 와.”
저렇게 또 다정하게 불러 주면 나도 모르게 몸이 막 끌려간다. 대충 쓰레기통에 넣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벌려 앉은 식탁 의자 남은 공간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자 최수혁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냐고 했더니 너무 귀여워서 잠시만 안고 있겠다고 한다. 최수혁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웃는다. 뭐, 심하게 좋아하는 거 같으니 계절에 한 번씩은 자기라고 불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국 출장이 잡혔다.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어서 샌프란시스코를 가야 하는데 급하게 잡힌 일정이라 비즈니스석 티켓이 모두 매진이었다. 이코노미를 타고 가자니 자신이 없어서 일단 대기 명단에 올려 달라고 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집에 들르는 것은 무리였고 오랜만에 바다사자 구경이나 해야겠다 생각했다.
함께 가기로 된 2명의 팀원들은 매우 좋아했다. 한 명은 미국을 처음 가는 거라 신나했고 다른 한 명은 일주일 동안 육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물론 내가 집에 모시고 계시는 분께서는 이 출장을 매우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종의 트라우마 생긴 거 같아. 정세연이 미국 간다는 게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일 때문이라니까.”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잠깐 시간이 맞아서 통화하는 와중에 출장 이야기를 꺼냈더니 반응이 이 모양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사실 할 말 있어서 전화했는데.
“해.”
-어제 성수형 아버님 돌아가셨다는데. 장례식 너랑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최수혁의 기획사 대표가 부친상을 당하셨나 보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었다. 싸가지 없는 놈 맡아 주셔서 고맙다고 했더니 나 만나고 나서는 많이 얌전해졌다며 오히려 자기가 고맙다고 했었다. 멋지고 쿨한 대표님이었다.
“당연히 가 봐야지. 장례식장 어디래?”
-서울대 병원. 나 늦어질 거 같은데 니가 퇴근하고 집에 들러서 검은색 정장 한 벌만 가져다줘. 수수한 거로.
“알았어. 이따 퇴근할 때 문자할게.”
현금을 미리 찾아 두어야겠다 싶어서 가까운 은행 ATM기를 찾았다. 빳빳한 오만 원권 지폐를 봉투에 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 지인의 경조사에 참석한 적은 많지만 최수혁과 함께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변화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의식해서 퇴근을 일찍 하고 집으로 곧장 직행했다. 긴 드레스룸 오른쪽에 세탁이 끝난 옷들만 걸려 있다. 많고 많은 녀석의 정장 중 가장 수수하고 장례식에 어울릴 만한 옷을 한 벌 꺼내고, 나도 비슷하게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촬영장에서 녀석을 태워 서울대 병원으로 향했다. 최수혁이 가는 길 내내 기획사 식구들과 통화를 하는 통에 대표의 아버님이 오랜 기간 암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고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는 것도 알았다. 형제도 없이 혼자가 된 그를 위해 첫날부터 많은 지인이 몰려왔다.
연예인들도 좀 온 탓에 입구에는 기자들이 몇 명 보였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조문을 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어린 아들을 잡고 있는 대표의 부인이 최수혁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
“어 왔어? 세연씨도 왔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와 줘서 고맙다는 대표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여러 기획사에서 보낸 근조 화환들이 눈에 띄었다. 절을 하고 향을 피운 뒤 밖으로 나왔다. 최수혁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나도 줘.”
녀석이 담배를 끊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도 한 번씩 얻어 피우는 중이었다. 다행히 골초는 아닌 덕에 한 갑을 사면 일주일 넘게 가기도 했다. 뭐 그 정도면 폐암으로 죽지는 않겠지 싶어서 잔소리하지는 않았다. 담배 피우는 최수혁은 섹시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눈요기를 위해서라도 나도 억지로 끊게 할 생각은 없다.
둘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장례식장 뒤편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우리도 모르게 그곳을 쳐다보게 되었다.
“니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감히… 니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말을 잇지 못하는 노신사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옆에서 남자를 달래 주는 친구들로 보이는 일행이 있었다. 삿대질을 하며 분노를 퍼붓고 있는 노신사는 뒤에서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고 있는 남자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내 아들 인생 망친 주제에… 어디서 니가 여기를… 어디라고 니가 여기를….”
그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고개를 숙인 남자를 달래 주던 일행이 어깨를 잡으며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듯했다. 남자는 노신사에게 무릎을 꿇고 마지막 가는 길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 작은 소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각자 나름의 상상을 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져 더는 그쪽을 바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꽁초를 버리던 최수혁이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뒤쪽에서 흐느끼는 남자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가슴을 저며 왔다. 어쩌면 죽은 남자가 가장 보고 싶어 했을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너무하시네. 여기 더는 있기가 싫어졌다.
“그만 펴.”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물고 있는 최수혁에게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 말에 녀석이 미련 없이 바로 담뱃불을 껐다.
기자들을 피해 다른 병동을 빙 둘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남자가 죽은 자의 연인이 아닐 수도 있다. 또 다른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들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겠지.
운전을 하는 최수혁이 내내 말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노력을 했다. 회사 얘기, 친구 얘기, 어제 통화했던 엄마와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는데 반응이 그저 그렇다. 말을 말자 싶어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정세연.”
낮게 깔린 목소리에 녀석을 한 번 쳐다보니 표정이 좀 진지해 보였다. 라디오를 껐다.
“아주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니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무슨 얘기인데.”
“혹시 내가 잘못되면 내 재산은 법적으로 다 너한테 갈 거야. 보험 수혜자도 다 너로 바꿔 놨고.”
“뭐?”
순간 나에 대해 불편한 표정을 지었던 녀석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최수혁은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주시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오는 내내 준비한 말이었던 듯 녀석은 하고 싶은 말들을 밀물처럼 뱉어 냈다.
“물론 니가 돈 없어서 곤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그냥 일종의 상징 같은 거라고 치자.”
“…….”
“내 산소 호흡기를 뗄지 말지 결정할 사람은 정세연이라는 일종의 상징.”
“…….”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래야 할 일이 생기면 당당하게 요구해. 나에 대해 너는 그럴 권리가 있어.”
“미친….”
지난번 집으로 날아온, 각종 보험사에서 온 우편물들이 생각났다. 그런 거였나. 최수혁은 뭐든 한발 앞서 나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녀석은 어떻게 그렇게 나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 받기만 하는 삶이 너무 익숙해지는 게 두려워진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최수혁이 세상에 없는 삶.
“나보다 먼저 죽으면 저승까지 쫓아가서 다시 죽여 버릴 거야.”
녀석이 웃었다. 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하며 핸들을 돌렸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아우디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최수혁의 운전이 많이 얌전해졌다. 세상에 미련이 많아진 사람들은 적어도 허무하게는 떠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런 하나하나가 고마웠다. 나도 녀석의 곁에서 가능하면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
***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린 직후부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뱉어 냈다. 통신사 로밍 안내 문자, 외교부 긴급 연락처 문자, 모임 안내, 잡담하는 친구 놈들 메시지, 도착하면 바로 메시지 남기라는 최수혁의 문자. 그 외에도 팀원들이 메신저에서 주고받는 대화들 덕에 끊임없이 잠금 화면이 갱신되고 있었다.
[랜딩했어. 호텔 가서 전화할게]
단 한 사람에게만 답신을 보냈다. 이코노미로 온 탓인지 온몸이 다 뻐근하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짐을 찾고 있는 다른 두 명의 멤버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어 벌써 찾으셨어요? 아 역시 골드 멤버라 짐이 빨리 나오는구나.”
항공사 연계 프로그램 등급이 높으면 화물 택의 색깔이 달라진다. 그 덕에 내 짐이 먼저 나왔지만 다른 멤버들을 기다려야 하니 총 소요 시간은 다를 게 없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오랜만이다. 같은 미국이라고는 해도 동부 지역과는 극과 극 수준으로 떨어져 있으니 방문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번 출장은 3일간 열리는 업계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비는 시간 사이사이 파트너사들과 미팅이 잡혀 있다.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30분이나 더 기다려 일행의 짐을 모두 찾았다. 공유 택시를 불러 컨퍼런스가 열리는 호텔로 직행했다. 좀 많이 비싼 호텔이었지만 우리의 스케줄 표를 본 대표가 같은 호텔에 묵을 수 있도록 출장 예산을 올려 주었다.
공유 택시 기사가 중국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그 호텔에서 무슨 행사 같은 게 열리는 거냐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오늘만 벌써 다섯 팀째 같은 장소에 실어 나르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규모가 커서 그런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들었나 보다.
체크인을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잠도 못 잤고 자리도 불편해서 너무 피곤한데 또 버릇처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 메신저에 접속해 몇몇 급한 요청에만 대답해 주고 최수혁에게 전화를 했다. 스피커 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니 밖인 듯했다.
“일하는 중이면 나중에 통화할까?”
-잠깐은 괜찮아. 어차피 너 곧 잠들 거 같은데.
“아직 아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한 두 시간 더 깨어 있을 거야.”
-그럼 두 시간 후에 다시 할까? 좀 중요한 자리라서.
“그래. 끊어.”
현대 사회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바쁠 때 오는 전화는 무시하고 일부러 안 받는 사람과, 일단은 받고 나중에 통화하자고 하는 사람. 최수혁은 모든 인간에게 전자처럼 행동하고 나에게만은 후자처럼 행동했다. 녀석의 직업상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가능한 문자로 녀석의 상황을 먼저 살피는데 가끔 별생각 없이 전화했다가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방금이 그런 경우다.
하품이 계속 나왔다. 여기 시각으로 저녁 8시쯤이 되었다. 내일 아침 9시 로비에서 모이기로 했으니 샤워는 아침에 해도 될 것 같았다. 잠깐만 침대에 누워 있다 다시 일어나려 했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메신저에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찾는 팀원들의 메시지가 두 개 보였고,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한 통과 잘 자라는 인사가 담긴 최수혁의 메시지가 보였다.
컨디션이 난조였으나 일단 하루를 시작했다.
리셉션에서 방문객 스트랩을 받아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부스를 낸 기업들은 홍보에 정신없었고 업계 동향을 살피러 온 기자들과 우리처럼 파트너를 알아보기 위해 방문한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세 명이 흩어져서 방문하고 점심 먹을 때 한꺼번에 서로 리포팅을 해 주기로 했다.
A열에서 C열까지 맡은 나는 사진을 찍고 팸플릿을 모았다. 방문할 만한 부스에는 직접 들어가 안내를 받았다. 이메일로만 주고받던 파트너사들을 직접 만나니 반갑기도 했고 역시 얼굴 보며 이야기를 하니 훨씬 속도감 있게 일이 진행되는 듯했다.
“Let’s keep in touch. Thank you. (계속 연락합시다.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고 나왔다. 참석해야 할 키노트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으므로 조금 더 돌아보기로 했다. 아시아 지역 부스들이 따로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역시 앞쪽 첫 번째 간판에 루신 그룹 이름이 보인다. 크게도 했네.
슬쩍 둘러봤는데 미국 지사 직원들만 있는 듯했다. 부스 중앙 전시 코너에서 낯익은 디자인의 샘플이 보였다. 내가 기획했던 제품이었다. 출시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것 참 뭐랄까, 어릴 때 입양 보낸 자식을 해외에서 만난 듯 반갑고 기쁘다. 디자인은 첫 시안 그대로 빠졌네. 향은 좀 변한 거 같은데 본부장 취향이 좀 섞인 듯하기도 하고. 무사히 세상에 나와서 다행이다 진짜. 에이씨 눈물 나네.
“야 정대리!”
뭐냐 이건. 누가 이런 오래된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거냐.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신재식이 서 있었다. 해외 업무랑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여긴 왜 왔을까. 회사 다닐 땐 그렇게 재수 없던 놈인데 또 1년 반 만에 보는 사수라고 은근 반갑기는 했다.
“정대리 컨퍼런스 출장 왔구나. 야, 또 여기서 이렇게 보니 디게 반갑다!”
“팀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그리고 언제 적 정대리인데 아직도 그렇게 부르십니까?”
“아 미안 미안. 정팀장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기도 전에 니가 관뒀잖냐.”
“출장 오셨어요?”
“어. 조소영이 못 오게 돼서 내가 대신 뒤집어썼어. 야 난 또 여기서 정세연 만날 줄 몰랐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다 조소영 본부장. 업계는 비슷하게 엮이다 보니 또 이렇게도 만나고 그러는구나.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재식을 여기서 만나다니 참 나…
“아이고 씨 하루 종일 영어만 쓰니 죽겠다 야. 아는 얼굴 보니 반갑네. 담배 한 대 피러 가자.”
“저 담배 안 피우는 거 모르십니까?”
“아 그랬나. 그럼 나 피는데 옆에 좀 있어 주라. 커피 한 잔 사 줄게.”
겨우 커피 한 잔 사면서 생색을 내는 걸 보니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늙은 거 같기도 하고 배가 좀 더 나온 거 같기도 하고.
그를 따라 호텔 밖에 마련된 흡연 구역으로 갔다. 신재식이 간이식으로 설치된 키오스크로 뛰어가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왔다. 자신은 벌써 빨대를 꽂아 마시며 한 잔은 내게 내밀었다. 아직 오전인데도 태양이 뜨거웠다. 나는 와이셔츠를 걷어 올렸다.
“잘 지내냐? 아무리 니가 나 싫어한다고 그래도 내가 너 입사할 때부터 사수였는데 말도 없이 관두니까 좀 섭섭하더라. 이직한 데는 어디야?”
그가 내 목에 걸린 스트랩을 돌려 회사 이름을 확인했다. ‘아이고 그래도 잘나가는 데 들어갔네’ 하며 웃었다. 흡연 장소에서는 그와 내가 하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각국의 언어들이 섞여 들려왔다. 다들 한차례 미팅 웨이브를 끝내고 쉬어 가는 타이밍이라 그런지 같은 나라 사람끼리 뭉쳐서 잡담을 즐겼다.
“우리 조직 개편 또 한 거 아냐? 고현성 상무 이번에 이사 달았다.”
“회사 얘기는 가끔 동재한테 듣습니다.”
“아 이동재? 그래 니네 진짜 친했지. 맨날 부부 동반 출근 하고.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들었어?”
당연하죠. 그 결혼 제가 시킨 거나 다름없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신재식은 항상 사내 가십거리를 제일 늦게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항상 인사이더가 되고 싶어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를 아웃사이더 취급했다. 아무도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려 하지 않았기에 그가 선택한 것은 일을 열심히 해서 그저 진급을 빨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나 참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건지. 나는 정말 까맣게 몰랐다. 허허허.”
커피를 마시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동재와 김시은이 결혼한다는 것이 여전히 어이가 없는지 땅을 쳐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키 차이가 나는 탓에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머리가 좀 빠진 것 같은데.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닌데 말이다.
“너… 그… 뭐냐 ‘그분’이랑은 그 뭐냐, 잘 지내냐?”
신재식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내 눈치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겠지 싶었다. 나는 쿨하게 받아 주기로 했다.
“네, 잘 지냅니다.”
그는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재를 털었다. 그게 그 나름의 안부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신재식은 좀 뭐랄까, 애처로웠다.
그는 애새끼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며 집안 이야기를 했다. 애들이 커 갈수록 들어가는 돈은 무한정이고 나름 교육에 욕심이 있었던 부부는 남들 하는 것의 플러스 알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에 잦아지는 것은 부부싸움이고 진짜 자식 교육은 못 하고 있는 듯했다.
“죽자고 벌어 와도, 나는 쓰지도 못하고 다 나간다. 아이고… 부럽다 정세연. 싱글일 때가 좋은 거야.”
“싱글은 아닙니다 저도.”
“아, 그래. 야 미안하다. 나도 얼마 전에 그 교육 받았어. 그 LGBT 교육인가 하는 그거.”
신재식과 LGBT라… 웃겼다.
내가 쿡쿡대며 웃자 좀 더 편하게 물어볼 용기가 났는지 생활비는 누가 대는 거냐고 물었다. 신박한 질문이로군. 처음 받아 본다. 이런 질문은.
“뭐,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쪽이 내요. 집에 오시는 도우미 분들 월급은 ‘그분’이 내 주시고 저는 주로 생필품 채워 넣을 때 돈 쓰고.”
“그래도 자식한테 들어가는 돈은 없어서 좋겠다.”
“저희도 뭐 하나 좋은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네. 하하하. 진짜 그렇다 야.”
그가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와의 꼬인 인연을 이렇게 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 꺼진 꽁초를 재떨이에 던지고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그는 부스 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키노트가 열리는 이벤트 홀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홀 입구에서 팀 멤버들을 만났다. 둘 다 벌써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들어 보고 큰 내용이 없을 것 같으면 점심을 일찍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다들 동의하고 홀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꽤 인기 있는 세션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메모를 위해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놓았다. 발표자가 스테이지 위로 올라왔다.
***
출장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연이은 미팅과 컨퍼런스 참석으로 최수혁과 통화를 전혀 하지 못했다. 서로 생존 신고만 오갔던 대화창에 사진을 한 장 보내 주었다. 로비로 내려가기 전 나름 상큼하게 찍은 사진인데 한국은 많이 늦은 시간이라 확인하려면 오래 걸릴 듯했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기분 좋지 않겠나 싶어서. 내가 이제 이런 짓도 한다 진짜.
연애 초반에 사진이 없다며 사원증을 훔쳐 가던 최수혁이 떠올랐다. 그냥 한 장 보내 달라고 하지 그 말을 못 해서 그런 짓까지 하던 녀석이었다. 귀여운 놈. 나도 모르게 실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미팅은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컨퍼런스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던지라 사람들도 쉬엄쉬엄 일하는 듯했다. 회장 곳곳에 마련된 케터링 음식들이 빨리 동이 나기 시작했고 부스 전시장도 조금 한산해진 느낌이었다.
“SY 오늘 네트워킹 파티 있다는데 참석하실 거죠?”
“아, 네. 가아죠.”
컨퍼런스의 꽃은 역시 네트워킹 파티가 아니겠는가. 영업사원은 아니지만 명함을 뿌리고 인맥을 넓히는 것은 보직을 불문하고 중요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하고 돌아가야 마무리가 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저쪽에 계시는 거 같은데요?”
작게 마련된 미팅 공간에 파트너사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역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미팅은 까탈스럽지 않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검토를 할 테니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 흠,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한 트릭이거나 진짜 검토를 하기 위해 요청하는 걸 수도 있다. 을이 된 입장에서는 후자에 모든 것을 걸고 열심히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 주어야 한다. 내일 공항 라운지에서 보내면 되겠지.
“OK. I’ll send it over to you soon. Thank you for your time. (좋아요,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시간 감사합니다.)”
“Thank you too, will you join the party tonight? (저도 감사합니다. 오늘 밤 파티 참석하시나요?)”
“Yep, do you? (네, 그쪽은?)”
“I do, catch you up there. (저도요, 거기서 보죠.)”
다들 오늘 네트워킹 파티에 참석하려는 모양이었다. 시작은 7시부터라고 했으니 오늘은 5시쯤 마감을 하고 룸으로 올라가 다들 좀 쉬기로 했다.
노트북을 들고 룸으로 올라가 침대에 퍼졌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언제 보냈는지 답장이 와 있었다.
[하…]
[정세연 진짜]
뭐냐 이게.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멋있다, 보고 싶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는데 한숨을 쉬네? 5분 후에 다시 와 있던 메시지는 더 가관이다.
[낯선 남자 따라가지 마]
그러면서 밑에는 사진이 한 장 도착해 있었다. 차 안에서 찍은 셀카였다.
잘생겼네. 내 사진에 대한 답례인 듯한데 10만 원 주고 100만 원 거슬러 받은 느낌이었다. 진짜 너무 잘생겼다. 사귀게 돼서 다행이다. 혼자 짝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놈이 내 애인이라 다행이다.
저장.
아직 파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TV를 틀어 보았다. 뉴스를 보다 잠들 것 같아서 휴대폰으로 심심풀이용 게임을 했다. 1시간쯤 했는데 배터리가 다 될 것 같아서 충전해 두고 세수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준비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너무 멋 내고 가는 건 좀 민망한 것 같아서 편안한 진과 셔츠만 걸치고 룸을 나섰다.
복도로 나서니 여기저기서 도어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 호텔 숙박객의 반 이상이 컨퍼런스 참석자들이라 그런지 다들 룸에서 나와 지하로 내려가는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지하 클럽에 들어서니 우퍼 사운드가 쿵쿵거리며 귀를 때렸다.
예전 같으면 신난다고 뛰어다녔을 텐데 철이 들어서 그런 건지 그닥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파티라고 진짜 파티 복장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팀 멤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세요?
“룸에 있으니 졸려서 먼저 들어왔어요. 입구 근처에 있어요.”
-어디요?
“입구 근처요.”
-안 들려요. 어디라구요?
“기다려요.”
애도 아니고 대충 알아서 좀 들어오지 내가 데리러 가 줘야 하냐. 다시 클럽 밖으로 나와 헤매고 있는 팀원을 끌고 들어왔다. 애 아빠인 다른 멤버는 룸에서 그냥 쉬겠다고 했다. 비교적 사회 초년생이었던 여자 팀원은 신이 났는지 메이크업을 잔뜩 하고 내려왔다. 직장 동료의 클럽 복장을 보니 조금 민망했지만 뭐, 모르는 척해 주기로 하고 칵테일을 한 잔씩 주문했다.
“SY, 우리 마지막에 미팅했던 담당자요.”
“네.”
“엄청 잘생기지 않았어요? 깜놀!”
“네?”
“잘생겼다구요! 그 고어 그룹 담당자요!”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았다. 대충 마지막에 만났던 파트너사 담당자가 핸섬했다는 소리 같으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사람도 파티에 온다고 했으니 어딘가 있겠지 싶어 찾아보라고 했다. 당돌한 그녀는 찾으러 가겠다며 나를 두고 DJ 부스가 있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에 고개를 까딱거리며 걷던 그녀가 어느 순간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뒤편 라운지 쪽으로 빠졌다. 좀 덜 시끄러웠다. 스탠딩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혼자 칵테일을 마셨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내가 서 있던 테이블을 스쳐 지나갔다. 명함을 주고받고, 업계 얘기를 좀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또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이 지나니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그만 올라갈까 싶었다. 사라진 멤버는 어디서 잘 놀고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8시 반쯤 되었다.
“Hey, now I found you! (헤이, 여기 있었네요!)”
어, 사라진 멤버가 말한 그 잘생긴 고어 그룹 담당자가 다가와 테이블 위에 자신의 잔을 내려놓았다. 어디 갔냐, 그렇게나 찾던 분 여기 오셨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누구 찾는 사람 있냐며 그가 물었다.
“Never mind. How’s the party?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티는 어때요?)”
“Boring. But now I can enjoy. (지겨워요. 근데 이젠 즐거울 거 같아요.)”
그가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눈빛이 뭐랄까, 좀 끈적거린다. 음…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해. 파트너사 담당자인데 괜히 혼자 오해하고 철벽 쳤다가는 우스운 꼴이 날 것 같아서 일단 대화를 이어 가 보기로 했다. 순수하게 나랑 친구 하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Did you join the Keynote of P&G? Was amazing. (P&G사의 키노트 들었어요? 굉장했어요.)”
“I don’t wanna talk about the work. When are you going back to Seoul? (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요. 서울로 언제 돌아가요?)
“Tomorrow. (내일이요.)”
“Shit. Can we meet before you go back? (젠장. 돌아가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요?)”
음, 더 이상은 모르는 척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직설적으로 물었으므로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했다. 비즈니스적인 거냐 아니면 개인적인 거냐. 둘 중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전자라고 하고 비웃는다면 내가 좀 쪽팔리고 말 일이지만 후자라고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Of course, personally. (당연히, 개인적으로요.)”
그는 상당한 미남이 맞긴 했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슬쩍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하는데 한두 번 남자를 꼬셔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어떻게 알았지? 내가 남자도 가능하다고 얼굴에 써 붙여져 있나. 낯선 남자 따라가지 말라던 최수혁의 말이 진짜 씨가 되어 돌아왔다. 좀 웃기기도 해서 대답을 미루고 있었더니 그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I know it’s a bit rude but you're so my type. If you are not belonging to here, so sorry. (무례할 수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당신 너무 내 타입이에요. 이쪽 사람이 아니라면 미안해요.)”
“No, you don’t need to. Just wanna let you know that I have a partner. (그럴 필요 없어요. 다만 제가 파트너가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는 god damn it을 외치며 아쉬워했다. 웃으며 받아들이는 걸 보니 크게 심각한 건 아니었나 보다.
그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은 날 때부터 게이라서 이쪽 사람 알아보는 건 타고난 능력이라고 했다. 설마 이런 사람이 파트너 없겠나 싶었는데 손에 반지도 없는 걸 보고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물어봤다고 했다.
혹시 우리 회사 계약 조건을 검토해 보겠다는 것도 나 때문이었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며 걱정 말고 일은 진행하자고 했다. 나도 쿨하게 오케이 했지만 내일 메일을 보낼 담당자는 위에서 쉬고 계시는 애기 아빠로 바꿔야 할 듯싶었다.
아쉽다며 더 있다 가라는 그를 뿌리치고 룸으로 올라왔다. 아직 아쉬움 정도로 끝낼 수 있을 때 빨리 빠져야 한다. 스토킹 아닌 스토킹을 한 번 당했던 전력이 있는 나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런 나의 노력을 아시려나 모르겠는 그분께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을 가더니 끊기기 직전 전화를 받았다.
“바빠? 문자로 할까?”
-아니야. 엘리베이터 안이라 집에 들어와서 받느라 그랬어. 일정 끝난 건가?
“응, 파이널리. 디 엔드.”
-수고했어.
“어디 갔다 왔어? 나 없다고 계속 돌아다니는 거야?”
-살 게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어. 내일 온다고 했나?
“응, 데리러 올 필요 없어. 같이 온 멤버가 가는 길이라고 내려 주고 가겠대.”
-그래 그럼. 일찍 잘 거야?
“아니, 통화 좀 더 해. 계속 엇갈렸잖아.”
나는 스피커 폰으로 돌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녀석도 열쇠를 내려놓는 소리와 쇼핑백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몇 시에 일어났냐, 뭐 먹었냐, 누구 만났냐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사이 나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맥주를 마시며 호텔 방 창문 커튼을 걷었다.
위치가 방값의 대부분을 차지한 듯 이 호텔은 야경이 환상적이었다. 80층 90층씩 되어 보이는 빌딩 안에서 불빛들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 떨어져도 황홀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을 찍어 녀석에게 보내 주었다. 다음에는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려하 알지? 너도 몇 번 봤잖아.”
녀석의 동갑내기 클럽에 속해 있던 가수 겸 배우였다.
“알래스카를 다녀왔는데, 진짜 좋았나 봐. 사진 보니까 너랑 같이 가고 싶더라.”
함께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리스트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녀석이 웃었다. 그리고 보고 싶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보고 싶어. 진짜 진짜 보고 싶다 최수혁.”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터져 나왔다. 떨어져 있던 기간 동안 꽤나 그리웠나 보다.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 달아올랐다.
-웬일이야. 이렇게 절절하게 고백을 다 해 주고.
녀석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는지 잡음 소리가 없어지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감동해 주시니까 내가 아직 이 모양인 듯싶었다. 맥주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었다. 스피커 폰을 끄고 귀에 가져다 대었다. 때가 되었다.
“오늘 문득 느낀 건데.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니가 다른 사람 볼까 봐 불안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더라. 그건 내가 믿음이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니가 그만큼 믿음을 줬기 때문인 거라는 생각이 들어.”
-왜, 오늘 누구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
“아니.”
-낯선 남자 쫓아가지 말랬잖아.
“너는 내가 불안해? 어디 가서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그런 얘기 자꾸 하는 거야?”
-아니야. 사실 이건 내 문제인 것 같은데. 너무 소중해서 뺏길까 봐 겁나나 봐. 나도 내가 이런 성격인지 몰랐네.
“최수혁.”
-응.
“수혁아.”
-왜.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건데.
“사랑해.”
-…….
“내가 아는 최수혁은 이런 거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만. 뭐든 최초가 되는 게 좋다고 했잖아. 그래서 오늘 인생 최초로 말해 보는 거야.”
-…….
“항상 니가 앞서 나가서 기다려 주는 바람에 꽤 많은 것들의 선수를 빼앗겼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먼저 할 수 있게 돼서 기쁘네. 혹시, 기다렸어?”
수화기 너머로 낮게 웃는 최수혁의 목소리가 너무 평화로웠다.
-응. 꽤 오래 기다렸어.
“그런 인내심까지 겸비한 너는 진짜 완벽하네.”
-사랑해 세연아. 나도 이런 말,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어.
제길… 너무 듣기 좋네. 녀석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내 심장 구석구석에 피가 돌았다. 행복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돼서 뇌 속이 엉망이 된 채 할 말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더 일찍 해 줄걸. 너무 좋았다.
“미안한데 나 기절한 거 같아. 깨어날 수 있게 다시 말해 줘.”
녀석이 웃었다.
-사랑해.
아, 달콤하다 못해 마약을 한 것 같았다.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욕심꾸러기처럼 굴 거였으면서 혼자 잘난 척 다 했구나 정세연. 아껴서 똥 된다는 말은 진짜였어.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웅얼 졸라 대는 내게 최수혁은 지치지도 않고 들려주었다.
사랑해.
그 말이 가지는 마술 같은 힘을 깨달은 날이었다.
***
돌아가는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으로 타고 올 수 있었다. 일정이 끝나서 그런지 비행이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인천공항에 내려 팀원 한 명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선물도 하나 사 오지 못했네. 바다사자 인형이라도 사 올걸 그랬다. 문을 열고 짐은 거실 복도 위에 방치한 채 녀석을 찾았다.
“나 왔어어-”
대답이 없다. 나 왔다니까 어디 갔어 또. 침실 문을 열고 침대에서 자고 있는 최수혁을 발견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바깥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옷을 입은 채 누운 걸 보니 나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나 보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머리를 쓸어 올려 이마를 쓰다듬었다. 신기하다. 이 멋진 얼굴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전화 통화로 사랑한다는 말을 오십 번쯤 들은 뒤라서 그런가. 최수혁의 자는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이상하네. 잠귀가 밝아서 내가 이러고 쳐다보고 있으면 항상 깨는데. 녀석은 미동도 없이 고른 숨만 내쉬고 있었다. 녀석의 콧날에 이마를 쿵 박았다. 나 왔다니까.
“…올라와.”
이것 봐라. 역시나 깨어 있었다. 최수혁이 눈도 뜨지 않고 목소리만 내었다. 침대 위로 올라가니 커다란 팔이 덮쳐 와서 나를 안았다. 팔꿈치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내려다본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겠다. 나는 작게 입꼬리가 올라간 최수혁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자고 있어서 그런지 체온이 따듯했다. 잔향만 남은 녀석의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살짝 입을 벌려 혀끝으로 최수혁의 입술을 핥았다. 감고 있던 눈이 슬며시 떠진다.
“고양이야?”
나는 쿡쿡 웃으며 다시 입술을 벌렸다. 혀로 툭툭 건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하니 녀석이 입을 벌려 주었다. 이윽고 말캉한 두 혀가 감겼다. 사탕이라도 물고 잔 건지 온통 달콤한 맛뿐이었다. 맛있어서 쪽쪽 빨아 먹는 나를 녀석의 양팔이 감쌌다.
최수혁의 다리 한쪽이 세우고 있던 내 다리를 넘어트리며 감겨 왔다. 덕분에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나 무거울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녀석의 혀끝이 입속으로 수욱 들어오며 잇몸과 천장을 핥아 댔다. 나는 사탕 안 먹었는데 녀석도 뭔가 입맛을 다시듯 여기저기를 빨고 헤집어 놓는다.
나는 키스를 하면서 최수혁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반쯤 성이 난 녀석의 물건을 손으로 쓸었다. 그에 대한 반응이 내 혀를 강하게 빨며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나른한 오후의 섹스를 즐기고 싶었다.
녀석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두툼한 살덩이가 손에 잡혔다. 내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가만히 누워 내 모습을 지켜보던 최수혁의 입에서 신음이 낮게 새어 나왔다. 혀를 돌리며 뿌리부터 귀두까지 성기를 핥았다. 천천히 발기되는 모양새를 지켜보며 입술을 이용해 아래위로 쓸어 올렸다. 단단해졌다. 입에 넣었다.
“하아….”
최수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쾌감을 표현했다. 그 모습에 흥분된 나는 입안을 좁은 구멍처럼 만들어 녀석의 성기를 조였다 풀었다. 금세 턱뼈가 뻐근해져 왔다. 목구멍까지 넣어 주고 싶었지만 자의로 하는 건 힘들었다. 쭙쭙 소리를 내며 녀석의 것을 빨던 나는 사정감이 다가온 최수혁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그만….”
입으로 가게 해 주고 싶었는데 녀석이 중단을 선언했다. 참을성이 대단한 최수혁이 내 바지 버클에 손을 대었다. 나는 스스로 바지를 벗고 이미 팔딱이고 있던 내 물건을 녀석의 것에 곧바로 비볐다. 상위를 점령하는 게 이렇게 좋았다니, 이대로 최수혁의 흥분한 모습을 보며 싸고 싶었다.
허리를 세우고 스스로 성기를 쥐었다.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위를 시작했다. 녀석은 천천히 자기 것을 위로만 하고 있었을 뿐 내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침실을 맴돌며 열기를 식힌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하아… 윽….”
하얀 정액이 최수혁의 복근 위에 뿌려졌다. 옷에도 튀었다. 손을 뻗어 티슈를 몇 장 집어 닦아 주었다. 몸이 더 좋아진 거 같네. 비릿한 정액 냄새와 끈적한 손으로 녀석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값비싼 상체가 드러났다. 나는 손등으로 쇄골부터 사타구니까지 쓸어내렸다.
“맘에 들어?”
“끝내줘.”
녀석이 웃었다.
“나도 좋아. 네 몸.”
개구리처럼 앉아 있던 종아리와 허벅지에 녀석의 손길이 닿았다. 흰 셔츠만 입은 채 벌거벗은 하체의 뒷구멍이 벌렁거렸다. 따듯한 녀석의 손길이 차가워진 방 안 공기와 극을 이루어 소름을 만들어 냈다. 허벅지를 더듬던 손길이 엉덩이를 돌아 그 구멍에 닿았다.
“넣고 싶은데… 소리 안 낼 수 있어?”
창문을 닫으면 될 텐데 괜한 오기가 생긴다.
“천천히 넣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리 와.”
최수혁이 상체를 일으켜 옆으로 나를 눕혔다. 등 뒤로 따듯한 체온이 느껴진다. 손을 뻗어 콘돔과 젤을 건넸다. 천천히 전희가 시작되었다.
“씻고 데이트하러 나갈까?”
“하앗… 뭔가 순서가 바뀐 거… 흣…. 아니야?”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누가 오자마자 덮치는 바람에.”
“내가, 흣… 안 덮쳤어. 니가, 아아… 올라오라고 했잖아.”
“올라오라고 했지, 키스하란 말은 안 했는데.”
“그럼… 읏… 일주일 만에 봤는데 키스도… 흣. 안 하려고 했어?”
“하려고 했지. 데이트하고 와서.”
“어디… 갈 데 정해 놓은 거야? 아흣… 거기 좋아.”
“응. 예약해 뒀어. 빨리 끝내고 가야 돼. 넣는다.”
“아아아웁웁!!”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자 녀석의 큰 손이 입을 막았다. 이미 발기될 만큼 되어 있었던 최수혁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버둥거리는 내 몸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허리를 박았다. 그대로 사정하고 잠깐 여운을 즐기며 나를 끌어안았다.
***
샤워를 마친 뒤 페라리를 끌고 간 곳은 영화 세트 촬영장이었다. 예약해 두었다고 해서 난 어디 레스토랑인 줄 알았는데 세트 컨테이너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했다. 아무도 없었다.
“우리 여기서 뭐 하는데? 영화 찍을 거야?”
“이미 찍고 왔잖아, 포르노.”
“야!”
1시간 전의 정사 흔적이 싹 지워진 쌔끈한 최수혁이 웃으며 세트로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옆자리를 탁탁 치며 지 옆으로 오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파 옆 테이블에 있는 리모컨을 누르자 세트장이 움직이며 암막 커튼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캄캄한 암흑이 찾아왔다.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커튼 사이사이로 작은 LED 조명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을 표현해 놓은 장치 같았다. 서울은 이제 별을 보기 힘드니까. 이런 광경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 날도 아닌데 이벤트 준비했었네. 아무튼 좋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거 보여 주려고 했던 거야?”
“응. 장이준 감독님 촬영하는데 구경 갔었어. 그때 본 건데 되게 좋더라. 난 좋은 건 다 정세연이랑 공유하고 싶거든.”
“완전 좋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미소 짓는 최수혁의 얼굴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이 어깨에 떨어진 내 이마에 짧은 키스를 했다. 조명들이 천천히 깜박였다. 어떤 패턴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나 보다.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었다.
“무슨 영화에 나오는 장면인데?”
“촬영용은 아니야. 그날 감독님 와이프 되시는 분 생일이었거든. 스텝들이 축하한다고 서프라이즈를 열어 줬어. 무대 감독님이랑 조명 스텝들이 만들었대. 난 얼떨결에 거기 낀 거고.”
“좋았겠다, 와이프 되시는 분.”
“응. 우셨어. 나중에 히스토리를 들었는데 감독님이 유명해지기 전 10년 정도 뒷바라지하셨다고. 그때 고생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많이 우시더라. 지금이야 이름만 대면 다 알지만 하루 한 끼 먹을 돈도 없었대. 난 그런 거 대단하다고 생각해.”
“누가 그러더라. 그쯤 되면 사랑을 뛰어넘은 의리 같은 게 생긴다고. 두 분은 그런 사이 아니겠어?”
“그래. 진짜 좋아 보였어.”
최수혁이 나를 끌어당겼다.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외설이나 욕망을 담지 않은 키스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건지 심장이 단단하게 끓어올랐다. 입술을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 적응된 시야가 밝아지며 최수혁이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인정받을 날이 오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대신 우린 돈이 많잖아.”
녀석이 웃었다. 정세연 너는 유쾌하고 밝아서 좋아. 그걸 이제 알았냐며 녀석의 어깨에 다시 고개를 기대었다. 밖에서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반짝거리던 LED 불빛이 다시 한 번 패턴을 바꾸며 깜빡인다.
“너랑 같이 있으면 항상 즐거워. 우리는 아마 연인이 되지 않았어도 좋은 친구로 남았을 거라 생각해. 너라면 사랑이 좀 식더라도 끝까지 의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거든.”
“응. 나도 그런 생각은 했어. 내가 만약 정말 동성애에 거부감이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관계는 못 되었을 거야. 좋은 친구로 남았겠지.”
“내가 운이 좋아.”
“내 운이기도 하고.”
녀석이 웃으며 내 어깨를 더 끌어당겼다. 기분 좋게 안겼다. 사방이 암흑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처음부터 이렇게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 한국 들어오기 전 통화했던 날 쇼핑을 하러 갔었어.”
“응 쇼핑백 봤어. 명품관을 아주 쓸어 오셨던데?”
“돈 쓰는 거 오랜만이라 신났거든. 그러다 정신 차려 보니 내가 3층에 있는 쇼윈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더라.”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최수혁이 가는 명품관 3층에 뭐가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가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나도 모르게 샵 안으로 들어가서 진열대를 가리켰어. 페어 세트를 꺼내 주는 샵 매니저에게 그거 아니라고 했어. 남자 거로만 두 개 부탁한다고.”
나는 그 샵 매니저의 표정을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게이 스캔들이 터졌던 거물급 연예인. 갑자기 나타나서는 남자 거만 두 개 부탁한다라. 아무렇지 않은 척 응대해야 했던 그, 혹은 그녀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리고 싶었다.
“니 성격 아니까 강요는 안 해.”
최수혁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쥬얼리 케이스를 꺼냈다. 심장이 저절로 뛰었다. 직접 열어 보라는 듯 가만히 쥐고만 있다. 고개는 여전히 녀석의 어깨에 묻은 채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심플하고 쿨한 플래티넘 링 두 개였다. 여자 링 대신 자리를 잡은 한 치수 작은 쪽이 내 것인 듯했다. 그거 사러 갔었구나.
“타이밍 봐서 나중에 주려고 했는데. 니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참을 수가 있어야지.”
예상치도 못했던 전개에 녀석이 오늘로 날을 잡은 듯했다. 나는 살며시 뺨에 키스하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타이밍이 너무 완벽해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받을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작은 쪽 링을 빼서 손가락에 끼웠다. 조금 큰 거 같은데 사이즈 조정 다시 하면 되겠지 뭐. 나머지 한쪽도 얼른 빼서 최수혁의 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지 거는 딱 맞네. 링이 있는 두 손이 겹쳐졌다.
“잘 골랐네. 과하지도 않고.”
크고 긴 손가락이 손 마디마디에 들어와 깍지를 꼈다. 손이 따듯하다. 마냥 좋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 쓰는구나. 지구에서 제일 잘난 남자 최수혁이 나와 같은 링을 꼈다. 뇌에서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었다. 몸속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고, 내 것임이 분명한 사람인데 내 것이라는 표시를 굳이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소속감과 신뢰, 소유욕의 표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10초 전의 최수혁과 현재의 최수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꽉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받아 줘서 고마워. 웃기는 얘기지만, 사실은 나 떨렸거든.”
최수혁의 고백에 웃음이 났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긴장하냐. 손이 으스러지도록 서로 힘을 준다. 나도 그래. 너를 보면 아직도 설레어. 내 것이 확실한데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고, 여전히 볼 때마다 가슴이 뛰어.
“사랑해 최수혁.”
그래서 이렇게 말로 또 해 보고, 네 반응을 확인해 보게 돼.
내 손을 잡고 있던 최수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 손은 내 목덜미를 지나 뒷머리를 헤집었다. 그대로 얼굴이 당겨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말랑한 혀끝이 입천장에 닿았다 사라진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포개어졌다가 다시 혀가 감기고 숨결을 나누었다. 이마를 맞댄 채 최수혁이 소곤거린다.
“내가 더 사랑해.”
“내가 얼마큼 사랑하는 줄 알고?”
“뭐든.”
“웃기지 마.”
고개를 들고 상체를 일으켰다.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녀석이 맞잡은 손을 바지 밑으로 가져다 댄다. 뭐, 섰다고? 나도 섰거든? 쓸데없는 경쟁심이 일어났다. 보란 듯이 녀석의 손을 가져가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거로 싸우지 말자.”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사실을 말한 거야.”
“최수혁, 유치하네 진짜.”
나는 녀석의 얼굴을 확 끌어당겨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어두워서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은 둘 다 웃고 있었음이 분명해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로의 입술로 막았다. 이러다가 또 입술 부어오르겠다. 그만 집에 갈까 제안을 했다.
“집에 가서 뭐 하게.”
링을 낀 녀석의 손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뭘 뭐 해, 여기 있으니까 자꾸 이런 짓만 하게 되잖아. 가자.”
“이런 짓이 뭔데.”
다시 턱이 붙들리고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무한 반복이다. 한 놈이 밀어내면 다른 놈이 들이대고. 진지해졌다가 또 장난을 치고. 최수혁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다. 절절 끓는 사랑이기도 했고 유치하게 투덕거리는 친구이기도 했다.
꽤 오래 함께하게 될 사람을 만났다고 예전에 내가 말했던 것 같다. 그 오래라는 말이 적어도 50년쯤은 되길 바란다. 로맨스가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만, 그런 건조한 최수혁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내가 녀석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캄캄했던 암막이 걷히고 뿌연 조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실로 돌아온 다음에도 맞잡은 두 손은 놓지 않았다.
최수혁과 나는 옆집 사람이라는 흔하디흔한 도입부로 시작했다.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무엇이 되었든 재미있을 것이다. 두 집안 부모님이 만나는 장면.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회사 가족의 날 행사에 최수혁이 등장하는 장면. 커밍아웃과 자유, 함께 미국으로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장면까지.
“왜 혼자 웃고 있어?”
그런 날을 상상하는 내 표정을 보고 녀석이 물었다.
“곧 같이 웃게 될 거야.”
그 모든 장면의 끝은 해피엔딩일 테니까.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