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리고 너의 어른스러운 결정
집으로 들어온 나를 바라보는 최수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갔다 들어온 차림 그대로였다. 나는 신발을 벗다 힘이 빠져 현관문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고 녀석이 다가와 대신 신발을 벗겼다.
“미안. 팀 회식이었는데. 전화를 할 상황이 못 되었어.”
“들어왔으니까 됐어. 많이 마신 거 같은데.”
“그렇게까진 아닌데… 그냥 내가 술이 많이 약해졌나 보지.”
“무슨 일 있어?”
내 표정을 읽은 녀석이 계속해서 심문을 했다. 최수혁에게는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충 내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하는 업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녀석이었기에 표정이 더 굳어졌다.
“야,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거야? 그냥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 모으고 또 열심히 연애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고 자유 민주주의 하는 거 아니었나? 군 복무하고 세금 낼 거 내면 의무는 다 한 거 아니냐고 시발.
이 망할 놈의 나라는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왜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들이 많고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냐 대체.
좆같고 열불 터져서 당장이라도 뜨고 싶은데 남자 하나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뜰 수도 없네. 대체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비싸. 대체 얼마를 더 내라는 거냐. 다 내다 팔고 이제 가진 것도 없는데 시발…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 가겠다는 거야 뭐야.
“돌아 버리겠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공허한 말에 녀석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기 탓인 것 같아 위로조차 해 줄 수 없을 거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는 나도 가슴이 아팠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미쳐 버리겠다.
최수혁이 나를 껴안았다. 너무 세게 안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아까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쪽팔리게.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최수혁에게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약해 빠진 인간이었다.
“들어가자.”
녀석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청난 힘에 의해 상체가 일으켜졌다. 녀석에게 안겨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최수혁의 손에는 평소에 내가 입고 자는 티셔츠가 들려 있었다. 이대로 나를 재울 생각인 것 같았다. 한 손으로 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동작이 능숙했다. 내리깐 눈매와 좁혀진 미간, 꾹 다문 입술이 섹시했다. 술기운에서인지, 정신이 돌아 버린 탓이었는지 나는 그 와중에 성욕을 느꼈다.
술에 절은 몸을 일으켜 녀석에게 키스했다. 그 잘생긴 이마에, 코에, 입술에. 모든 것이 내 거라고 영역 표시라도 하는 듯 입술을 부비고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반응이 없다.
“최수혁 왜 가만있어… 빨리 덤벼.”
어설프게 도발하는 나를 녀석이 다시 침대에 눕히며 묵묵히 옷을 갈아입혔다.
“벗겨 놓고 왜 다시 입히는데. 이리 와. 키스해 줘.”
다시 최수혁의 목을 감고 입술을 훔쳤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드는 나를 녀석이 조용히 받아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으며 최수혁의 혀를 찾았다.
수동적인 녀석에 비해 나는 발정 난 고양이처럼 재촉했다. 빨리 나를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자각 못 하나 본데 너 엄청 취했어.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심해.”
그럼 뭐 안 되나. 취한 놈은 안고 싶지 않다는 거야 뭐야. 나는 다시 녀석의 입술을 찾았다.
최수혁은 키스를 잘한다. 나는 녀석과의 키스가 좋았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와서 짜릿하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폭풍처럼 혀를 감고 몰아치는 녀석만의 패턴이 있다. 그게 좋아서 자꾸만 입술을 물었다. 혀끝으로 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키스해 줘 최수혁. 한 번만… 빨리….”
녀석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쓸었다. 침대 위로 올라와서 나를 안아 달라는 신호였다. 다시 상체를 일으켜 녀석의 볼에 목에 입을 맞추며 숨을 뿜었다. 혹시나 해서 손을 내려 녀석의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어.”
그러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녀석의 것을 확인하고 나니 더 애간장이 탔다.
니가 안 올라오면 내가 내려가겠어.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니 다시 최수혁에게 눌려 그대로 쓰러졌다.
술에 취해 지독히도 말을 안 듣는 나를 녀석이 완력으로 누르며 노려보고 있었다. 내 팔은 여전히 최수혁의 목을 감은 채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취했으면 곱게 누워 자라. 녀석의 눈빛이 말하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기 싸움에도 나는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부름 끝에 드디어 녀석이 응답했다. 굳게 닫혔던 입술이 내려와 곧바로 내 혀를 물어 왔다.
역시나 처음엔 부드럽다. 넓고 길게 혀를 감아 준다. 녀석의 숨결도 느껴지고 가끔은 내가 리드를 할 여유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져 주던 녀석이 짜릿하게 빨아 주며 한발 물러난다. 그사이 나는 숨을 쉬고 곧바로 휘몰아치는 두 번째 웨이브에 강하게 반응한다.
나는 미친놈처럼 녀석의 육체를 갈망했다. 마치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처럼 손이 닿을 때마다 흥분에 몸을 떨었고 순간순간을 기억하려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술기운인지 몸은 점점 지쳐 가는데 마음이 급했다.
왜 키스 더 안 해 줘. 오른손으로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끙끙거리는 나를 보며 최수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사람 가슴 찢어 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뭐?
녀석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바람에 다른 쪽에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나 또 울고 있었구나.
미친… 서른한 살 먹은 남자가 계속 울기나 하고. 쪽팔려 미치겠다.
녀석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등에 길게 입을 맞춰 주었다.
“오늘은 그냥 안고 자면 안 될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욕이란 건 슬픈 감정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고 울고 있는 애인을 범할 만큼 최수혁이 도덕 관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녀석이 탈의하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왼팔로 팔베개를 해 주며 오른팔로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뒤에서 전해 오는 따뜻한 온기에 눈이 감겼다. 술기운 때문인지 녀석의 향수 냄새 때문인지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자세로 잠을 잔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그랬기에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깨어 있는 게 확실한 최수혁이 내가 뒤척일 때마다 나를 놓칠세라 더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그런 녀석이 마음 아파 밤에 다시 눈물이 났다.
***
우리는 조용히 휴일을 보냈다. 늦게 일어나 집에서 밥을 먹고 오후 늦게는 드라이브를 했다. 오랜만에 페라리의 옆좌석에 타고 이정표 없이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 무렵 나는 어떤 결심을 어슴푸레 했었지만, 실행에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끔 녀석의 물음에 수 초 정도 침묵이 흐르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며 질책당했다. 나쁘지 않았다. 최수혁 정도 되는 인물일지라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다음 날 출근을 해서까지도 나는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업무를 보고 지시를 하고, 회의를 하고 잡담을 나누는 시간에도 내 머릿속은 텅 빈 느낌이었다.
이동재의 멱살잡이와 조소영 본부장의 엄포로 인해 화장실 토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것 보다 나를 비웃으며 지나가는 신재식의 표정이 더 괴로웠다. A안이 가다듬어지고 있는 듯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 신팀장 쪽에서 비밀로 진행중인 것이 자명했다.
이미 고현성 상무에 의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매일 뒤통수를 맞은 팀원들의 표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럭저럭 버텼다.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모자란 상사였다.
그러다 녀석의 기사를 보게 된 것은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얼마 전 개봉한 최수혁의 새 영화가 처참한 흥행 참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멜로의 황태자 이대로 무너지나’
‘최수혁의 한계, 로맨스 없는 장르 영화 역시 무리인 듯’
‘최수혁 새 영화 손익분기점 반도 넘기 힘들어, 스캔들의 여파인가'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는데 주연 배우의 탓만 있을 수는 없다. 감독의 연출 역량, 시나리오의 영향, 제대로 된 홍보와 타겟층. 심지어 개봉 날짜까지 고려해야 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성적을 최수혁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참패 요인 중 나와의 스캔들은 너무 눈에 띄고 입에 올리기 좋았다. 녀석은 스캔들로 인해 홍보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관련 기사는 모조리 노이즈로 도배돼 버린 탓에 영화 내용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무조건 잘되어야 했다. 작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최수혁 개인에게는 무조건 흥행해야만 하는 작품이었다. 수준 낮은 호사가들의 입방정에 녀석은 다시 한 번 난도질당했다. 개봉 전 영화 평론가들의 높은 별점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던 최수혁의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결단을 해야 했다.
집으로 들어온 녀석의 표정에 힘이 없었다. 저녁은 해결했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먹었다고 대답한다. 거짓말이었다.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녀석이 소파에 기대 누웠다. 아직 채 꺼지지 않은 휴대폰 속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최수혁, 차기작 아직 예정 없어]
어차피 반년 쉬기로 했었던 녀석의 계획을 다른 사람들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오해는 사실로 굳어지겠지.
“할 말 있어.”
“…나 좀 힘든데. 오늘은 안 하면 안 될까?”
그래. 오늘은 너무 잔인하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얘기하자는 내 표정을 본 녀석이 말을 바꿨다.
“아니다. 매도 같이 맞는 게 낫겠어. 얘기해.”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도저히 얘기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실로 어떤 의미인지 몸소 체험했다. 녀석이 눈치를 챈 건지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이리 와.”
다가가니 나를 그대로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소중한 선물처럼 나를 끌어안고서는 뺨에 키스도 해 주었다. 그러고는,
“얘기해.”
그렇게 나는 녀석의 가슴팍에 안긴 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최수혁은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나 미국 들어가.”
녀석은 말없이 계속해서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다.
“집도 내놓을 거야.”
다시는 최수혁 앞에서 울지 말자고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바람에 발음이 조금 먹혀 버렸다.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최수혁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내 정수리에 고개를 묻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녀와.”
녀석은 자신의 방식대로 내 말을 해석하고 대답했다. 나를 안은 양팔에 더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기다릴게.”
울지 않으려고 머릿속에서 갖은 상상을 다 했다. 싸가지 없는 최수혁, 자기 멋대로인 최수혁, 말 더럽게 안 듣는 최수혁. 그 모든 게 더 애달팠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방법은 오늘 보았던 기사들의 제목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컸다.
나는 녀석을 놓을 자신이 없었기에 녀석이 나를 놓게끔 만들어야 했다.
“안 돌아올지도 몰라.”
“상관없어. 데리러 갈 거니까.”
최수혁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 말을 실현이라도 하는 듯 나를 더 깊게 안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안고만 있었다.
나는 차마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 좀 보지 않고 살면 녀석이 현실에 눈을 뜨지 않을까? 옆집에 산다는 조건이 우리를 너무 눈멀게 만들고 있지는 않았을까.
다음 날 나는 오팀장이 우리 팀을 겸임하고 기획안은 기존대로 간다는 조건하에 고현성 상무와 딜을 해 달라고 본부장을 찾아갔다. 마침내 그녀가 오케이 사인을 받고 왔을 때 나는 그대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는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한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단 3일 만에 인수인계를 하고 남은 기간은 모두 연차소진으로 돌려 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스캔들 때문에 그만둔다고 생각했는지 이기적인 퇴사 일정에도 동정표를 던졌다.
집을 정리하고 보스턴행 티켓을 끊을 때까지 최수혁과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가 제일 죽을 만큼 힘들었다.
***
말도 없이 이민 가방을 끌고 보스턴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부모님은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떠들썩했던 스캔들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찾아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르는 토막뉴스에 불과했었나 보다.
나는 설명을 생략하고 회사를 관두게 되었다는 말만 전했고 촉이 좋은 엄마가 곧바로 최수혁의 이름을 검색했다. 부모님은 내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니 부모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같이 있으니 좋았고, 또 미국에서 아예 눌러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뜨셨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그 힘든 길을 포기하는 것 같아 안심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시차 적응을 못한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잠을 잤다. 평일인데 직장을 가지 않아도 된다니 어색했고 확인해야 할 이메일이 없다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집 앞을 산책한다거나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들을 했다. 12월의 보스턴은 밤 기온이 0도까지 떨어졌다. 외투를 많이 챙겨 오지 못한 탓에 쇼핑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2주 차가 되던 날부터 나는 친구들을 만났다. 이제는 몇 명 남아 있지도 않은 미국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사는 이야기를 했다.
“Hey, how’s it going? (잘 지냈어?)”
점심시간에 맞춰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 살던 에릭의 회사 근처로 찾아갔다. 가끔 SNS상에서 소식만 묻고 하다 그가 얼마 전 보스턴 지사로 다시 발령받아 왔다는 말에 급하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갓 태어난 아기 사진을 보여 주며 자기 아들이 얼마나 똥을 잘 싸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신생아들은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You don’t look so well, man. (너 얼굴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
자신의 가족 이야기만 너무 늘어놓았다고 생각했는지 나의 주변사를 물었다. 만나는 사람은 없냐.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애는 늦게 낳으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다 직장 이야기가 나왔다. 에릭은 중소기업 규모의 헤드헌팅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그를 굳이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Sure, just send your CV. I’ll handle it. (물론이야, 이력서만 보내. 내가 알아서 할게.)”
나의 전 직장은 한국에서야 대기업이지만 미국에서는 업계 사람들이 아니면 이름도 모른다. 그나마도 아시아 시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나 알까. 청춘을 갈아 넣었던 스펙의 가치가 태평양을 건너오자 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마 나는 관리직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에릭과 헤어지고는 엄마와 데이트를 했다. 엄마는 아들 팔짱을 끼고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자신이 자주 가는 맛집을 데려가기도 하고 친구분들과 마주치면 나를 소개했다. 그러고 나면 반드시 ‘아들이 참 멋지네’ 내지는 ‘엄마 닮아 미남이네’ 같은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나는 집에 와서 호강을 하고 있었다. 삼시 세끼 집밥을 먹고, 때가 되면 과일과 디저트까지 즐겼다. TV를 보느라 새벽에 잠들어도 되었고 점심때까지 늦잠을 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부모님이 아주 모른 척을 하신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딱 한 번 최수혁의 안부를 물었다. 헤어진 거니? 라는 대답에는 아니라고 했지만 잊어 가는 중이라고 했다. 잊으려고 노력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최수혁을 생각했다. 잊는다거나 노력중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매일매일 최수혁만 생각했다.
녀석은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차 키를 뺏어 갔다.
‘이런 거라도 내가 쥐고 있어야 돌아오기 편하지 않겠어?’
내 차를 자기가 가지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공항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짧은 줄 몰랐다. 녀석이 운전하는 동안 나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 잘생긴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었다. 그런 나를 보며 미소만 지을 뿐 녀석도 말리지 않았다.
나를 배려해 차마 운전석에서 내리지 못하는 최수혁을 두고 차 안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연락할게’ 그것이 녀석의 마지막 말이었다.
마치 잠시 출장 가는 사람처럼 나를 배웅했다. 나는 성격이 모질지 못해서 휴대폰을 정지시키지도 못했다.
그날부터 녀석에게서 가끔씩 연락이 왔다. 어떨 때는 전화로, 어떨 때는 문자 메시지를 남겨 놓는다. 최수혁의 모든 메시지는 항상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은 정세연이 나를 떠난 지 XX일째 되는 날.
가끔 견딜 수 없이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모른 척, 실수인 척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보스턴은 눈이 많이 온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정세연이 나를 떠난 지 10일째 되는 날이네.’
‘서울도 오늘은 굉장히 추웠어.’
‘세연아 보고 싶어.’
녀석이 툭툭 내뱉는 말들에 나는 멍울이 들었다.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을 때는 누가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고작 5개월. 돌아보면 별것도 아닌 기간이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짧은 기간이니까 금방 나를 놓을 거다. 녀석이 어서 정신 차리고 새 작품을 준비하길 바랐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최수혁의 이름을 한국 포털 사이트에 검색했다. 녀석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많던 지라시들과 뉴스들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다른 연예인들에게 옮겨 갔다.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최수혁이 말하는 ‘정세연이 나를 떠난 지 17일째 되는 날’ 포털 사이트에서 작은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영화배우 최수혁, 수십억대 소송 걸렸었다’
소송이라는 단어와, 걸렸었다는 과거형에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기사에 나온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미 한 달도 훨씬 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느꼈다. 최수혁은 잇따른 스캔들과 폭행 사건으로 광고 모델 품위 유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자신의 광고주에게 소송을 당했다. 나는 그날 아버지가 아끼셨던 위스키를 훔쳤다.
***
이틀에 한 번씩은 오던 연락이 끊겼다. 나는 한국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행여나 전화를 놓칠까 두려워 손에 쥐고 다녔다. 한국은 새벽 시간이지만 최수혁의 직업상 밤낮이 따로 없는 탓에 24시간 지니고 다녔다. 내가 하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밖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수플레를 먹을 때 우리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내일 인터뷰 있다고?”
“네. 근데 뉴욕이에요.”
아버지는 뉴욕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차로 서너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부모 자식 간 거리 두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I’m in. (난 좋아.) 니네 아빠랑 싸우면 이제 거기로 가면 되겠다.”
엄마의 농담에 아버지는 정색을 했다. 지난번 가출 소동 이후로 걸핏하면 집 나가겠다는 협박을 하는 통에 그는 모든 면에서 엄마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한국에 살지 않게 될지도 모르니 더 자주 써먹을 협박이었다. 두 분의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한국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미친놈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라 휴대폰을 들고 테이블을 떠났다. 끊어질세라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의외네. 안 받을 줄 알았더니.
서울 시각은 아침 10시다.
“지금 일어난 거야?”
-응. 어디?
“부모님이랑 저녁 식사 중이었어. 그런데 나왔어. 통화해도 돼.”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좋네.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하는 최수혁이 짜증 났다. 물고 빨고 지 맘대로 다 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고작 전화 한 번 받아 줬다고 좋아하는 게 서글펐다.
“…너 소송당했어?”
-아…
“아는 뭐가 아야. 왜 말 안 했어. 한 달도 전이면 나 한국에 있었을 때잖아.”
-그게 궁금했어? 그래서 이렇게 기다린 사람처럼 전화 받은 건가?
“지금 그게 중요해?”
-그 광고주한테 고소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네.
“최수혁.”
-내가 말했잖아. 넌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을 녀석은 얼마나 혼자서 처리해 왔을까. 시시콜콜 너에게 다 털어놓고 기댄 내가 미련했을까 혼자서 다 떠안고 있었던 니가 미련했을까.
-어때, 거기 생활은? 혼자서 나 정리하고 있는 건가?
“…….”
-그래서 정리는 잘 되나? 오늘은 정세연이 나 떠난 지 23일째 되는 날이네.
“그런 걸 왜 자꾸 세고 있어.”
-내가 언제쯤 데리러 갈지 궁금해서.
하아…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감으니 녀석의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구조와 침대의 사이즈. 지금 막 일어나서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하고 잘 연결도 되지 않는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최수혁이 마음 아파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최수혁은 나를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리로 돌아온 나를 보며 부모님은 한국에서 온 전화냐고 물었다. 그 정도의 물음으로도 충분히 걸어 온 사람의 정체는 탄로 났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온 국민이 나와 최수혁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떠들어 대었는데 정작 나의 가족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
“OK, thanks for your time today. We’ll contact you soon. (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곧 연락 드리죠.)”
인상 좋은 채용 매니저가 나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인터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시니어 포지션은 아니었지만 새로 오픈하는 뉴욕 지사로 파견될 멤버들을 동시에 채용중이라 모두가 스타트 라인이 같을 거라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조건이라면 내 노력 여부에 따라 충분히 도약 가능하다. 나는 그런 경쟁을 좋아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빌딩을 나서며 엄마에게서 빌려 온 차에 시동을 걸었다. 연식이 오래된 포드 머스탱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도로를 향해 미끄러졌다.
인터뷰에 대한 내 느낌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듯했다. 당일 오후 빠른 피드백이 도착했고 On-site Interview(현장 면접)를 곧바로 진행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번 주 내로 뉴욕으로 가야 했다.
새로운 직업과 커리어에 대한 기대가 싹트면서 나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만약 이대로 뉴욕 채용이 확정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뉴욕의 집값은 살인적이었지만 나는 이미 월급의 반을 월세로 때려 붓던 삶을 살지 않았던가. 비슷한 수준의 스튜디오를 알아보게 되었다.
엄마는 조금 더 신이 났다. 인터뷰까지 함께 가겠다는 것을 겨우 말리고 차 키만 받아 왔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호텔을 잡았다.
그날 최수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짧게 통화를 했지만 나는 지체 없이 내 소식을 전했다. 나의 조금 달뜬 목소리에 녀석은 ‘잘됐네’ 라는 말을 하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정세연은 점점 멀리 도망가네.’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 그렇게 나를 놓은 건지 그날 이후 연락이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녀석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겉으로는 잘됐다 그렇게 나를 다독였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지만 마치 여기서 정착할 것이 다 정해진 것처럼 과장해서 설명했던 내 자신을 칭찬했다. 나는 그게 녀석을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
연말이라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뉴욕시를 뒤덮었다. 조용한 보스턴의 주택가에서 지내다 이곳에 오니 진짜 미국의 한복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호텔에 차를 두고 나갔다. 택시를 타고 약속된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뉴욕 지사의 규모는 컸다. 나를 비롯해서 함께 그룹 인터뷰에 참여하는 다른 지원자들이 4명 있었다. 다 떨어질 수도 있었고 다 붙을 수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그룹 인터뷰를 빠르게 진행하고 이어서 1:1 인터뷰가 이어졌다. 30분씩 5명의 기존 직원들과 격식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직무와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사적인 질문들도 나오지 않았다.
일정이 모두 끝나고 오피스 투어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각자 개인 사무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작은 부스 공간이었지만 내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HR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당신을 채용하는 데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관련된 조건들을 논의하고 싶다.’ 내일 이후 가능한 빠르게 콜을 원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신속하고 정확했다.
나 역시 그들의 피드백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은 의향이 있다고 정중하게 회신을 했다.
하루 더 호텔을 연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칠 것 같았고 내일 아침 통화를 근사하게 호텔에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연락을 한 뒤 저녁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을 찾았다.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 라이브 캐롤이 울려 퍼졌다.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구운 당근이 함께 나왔다. 나는 먹지도 못하고 접시를 바라보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음식에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당근을 먹어 줄 사람이 없으니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5성급 호텔의 웨이터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접시를 가져가 당근은 버리고 뜨거운 새 접시에 담아 다시 서빙해 주었다. 나는 스테이크의 반 이상을 남긴 채 일찍 테이블을 떠났다.
방으로 올라와 다시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호텔 방을 이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떨어지던 입술과 구겨진 셔츠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던 전희와 섹스. 눈을 감으면 나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최수혁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검은색 정장을 풀어 헤치며 키스를 해 오던 최수혁이 떠올랐다.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정세연이 최수혁을 떠난 지 37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숫자를 세고 있었다.
***
그대로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미친… 정신없이 샤워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HR과의 통화는 30분 뒤. 끝나는 대로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야 했다. 한동안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 길어져 왁스로 고정하기가 쉽지 않은 앞머리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미용실을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HR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원하는 연봉을 먼저 제시했다. 내가 왜 이 정도를 받아야 하는지를 당당하게 설명했고 나를 채용해서 회사가 벌어들일 이익을 환산해 줬다. 채용 담당자는 부분 동의를 했고 이제 자신의 카드를 꺼내 놓았다.
당연히 베이스 연봉을 맞춰 주기는 힘들다고 했다. 다만 주식과 인센티브로 전체 금액에서 2%를 더 올려서 맞춰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훌륭한 건강보험을 내세웠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세금을 많이 뗀다. 이렇게 되면 원래 받던 연봉보다 실수령액이 적어지지만 이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았다. 딜을 승낙하고 계약서를 보내라고 했다. 이런 말들이 오갔다고 해서 반드시 입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서에 최종 사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어쨌든 괜찮은 곳에서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첫 번째 오퍼를 받은 셈이니 시작이 괜찮았다. 에릭은 의외로 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어 주었고 보스턴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또 다른 회사의 첫 번째 인터뷰가 잡혔다.
체크아웃을 하고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더 가벼웠다. 중간에 한 번 고속도로를 순찰중인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강한 동부 영어를 구사한 덕에 면허증만 보여 주고 곧바로 풀려났다.
한국에서도 여기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오후에 도착한 나는 점심을 먹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퍼를 받았다는 말에 부모님이 상당히 좋아하셨다. 정말로 미국에 정착할 생각이 있는 모양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짐을 풀고 내일 있을 인터뷰를 위해 기업 연구를 시작했다.
꽤 큰 규모의 광고 업체였다. 업계가 너무 달라 부담이 되었다. 그들은 아시아 지역 마켓 리서치를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늘상 해 왔던 일이었지만 자사 제품을 위해 리서치하는 것과 고객의 제품을 위해 리서치하는 것은 큰 입장 차이가 있다. 이런 나의 경력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내일 해야 할 말들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그때 한국 휴대폰이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항상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두고 있었던 탓인지 진동이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눈길은 휴대폰으로 향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한국 시간으로 벌써 새벽 3시였다.
1초에 1만 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휴대폰은 계속해서 울렸고 나는 여전히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였다.
여기서 이 전화를 받는다면 우리는 다시 무너질 게 뻔했다. 지금까지 공들인 시간이 모두 원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야 겨우 최수혁이 나를 놓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내가 다시 녀석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열심히 울려 대던 휴대폰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전화가 끊긴 거라 생각했다. 다시 검은 화면으로 돌아간 휴대폰 액정 위로 갑자기 보이스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 위로 또 하나, 하나 더… 하나 더… 총 10개의 보이스 메시지가 들어왔다.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코트를 가지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조용한 주택가를 걸으며 하얀 입김을 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섭씨로 따지면 마이너스에 해당하는 날씨였지만 나는 지금 온통 열기에 휩싸였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용기를 냈다. 메시지를 들었다.
첫 번째 메시지.
“전화 안 받네. 나 정리하는 게 생각보다 잘되나 봐? 정세연은 참 독하네. 아니면 내가 바본가.”
두 번째 메시지.
“광고주 건, 잘 해결될 거 같아. 접대 같은 거 딱 질색인데 오늘 술을 진탕 마시고 그냥 해 버렸어. 사죄도 하고… 애교도 부리고… 이 직업은 원래 그런 거잖아.”
세 번째 메시지.
“니가 신경 쓰는 거 같아서 알려 주려고 연락했어. 잘 해결될 거야. 내가 그랬잖아.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네 번째 메시지.
“가끔은 나도 이런 술자리 가져. 올해만 해도 벌써 두 번째인데… 지난번엔 6월 초쯤… 그때도 진탕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었어.”
다섯 번째 메시지.
“근데 어떤 남자가 우리 집 앞에 있더라고. 옆집 사는 사람이었는데 택배를 달래. 그거 받겠다고 그 시간까지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나 해서 들어오라고 했어.”
여섯 번째 메시지.
“혼자 방 안에서 궁시렁거리면서 택배를 찾는데 귀엽더라고. 꼬셔 볼까 생각했는데 성깔이 있으시더라. 근데 가까이서 보니까 귀여운 게 아니었어. 첫눈에 반했다는 건… 그런 거더라.”
일곱 번째 메시지.
“나도 모르게 말버릇이 나와서 한 대 맞았어. 온갖 쌍욕을 다 먹고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그날부터 계속 생각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친해질까. 어떻게 하면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여덟 번째 메시지.
“미친놈처럼 며칠을 고민하다가 회사로 찾아갔어. 그때는 나도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 평생 가장 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홉 번째 메시지.
“그렇게 억지로 친해지고 억지로 다가가서 상처를 줬어… 잘해 준 게 너무 없어서 나만 이렇게 힘든가 보다.”
열 번째 메시지.
“오늘은 그 남자가 나를 떠난 지… 38일째 되는 날이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일어설 수 없었다.
***
나는 다음 날 잡혀 있던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사죄의 메일을 공들여 썼고 에릭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도 전했다. 오퍼를 받은 회사 담당자에게도 계약이 성사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보냈다.
‘개인적인 사유로 인해’ 라는 말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 그들은 그 이상을 묻지 않았고 아쉽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에 부모님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기 힘들어하셨다. 혹시 집이 불편해서 그런 거냐고 따로 방을 얻어 주겠다는 말에는 웃으며 전혀 그런 게 아니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나는 어제 최수혁의 메시지를 듣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나의 비겁함이었다.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은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도망갈 곳도 없는 최수혁을 한국에 버려 두고 나는 혼자 편한 길을 택했다. 변명의 여지 없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두 번째는 최수혁의 의지였다. 나와 자신의 커리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녀석이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했다.
결심이 서고 나면 나는 항상 행동이 빠르다. 짧은 기간 동안 미국에서 펼쳐 놓았던 신변을 정리하고 곧바로 짐을 쌌다. 한국 집은 이미 다음 달부터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채 정리하지 못한 가재도구들도 치워 줘야 했고 당장 살 집도 다시 구해야 했다.
“짐 싸는 거냐.”
바빠진 나의 손길에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신 줄도 몰랐다. 그의 손에는 엄마가 매일 아침 만들어 주는 건강주스 한 컵이 들려 있었다. 다시 집을 나가겠다고 부산스레 손을 움직이는 아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죄송해요. 멋대로 들어왔다 또 멋대로 간다 하고.”
“집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거다.”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된다는 뜻이었고 갑자기 떠나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내가 아는 가장 근사한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인생을 걸 줄 알았고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옭아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친구는, 너한테 잘해 주냐.”
그게 다였다.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았을 텐데 한 달 넘게 고민해서 한다는 질문이 겨우 그런 거였다.
“네. 좀 바보같이 잘해 줘요.”
“그래, 뭐… 그럼 됐다.”
건강 주스를 들이켜며 그가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알 건 다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어쩌고저쩌고 같은 그런 말을 평생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 부모 밑에서 클 수 있어서 나는 참 행운아였다.
새로 산 겨울옷들을 넣으니 금세 가방이 빵빵해졌다. 급한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항공 우편으로 부쳐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초조하게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한국은 저녁 10시쯤 된 것 같았다.
방문을 닫고 최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간다. 꽤 오랫동안 신호만 간다. 못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었다.
-여보세요.
최수혁의 목소리다.
“…너답지 않게 웬 여보세요야.”
-정세연이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한 게 너무 놀라워서, 사고라도 당한 줄 알았지.
낮게 깔린 저음, 주변이 조용했다.
-지난번에 말한 채용은, 잘됐어?
“응. 오퍼는 받았어. 하지만 계약은 안 했어.”
-얼마나 더 좋은 데로 취직하려고 그래.
“이제 가서 슬슬 알아봐야지.”
-이번엔 또 어디로 가시는데.
“여기서 서울까지 직항은 하루에 한 번, 일주일에 총 세 번 있어. 내일은 마침 없는 날이라 갈아타고 가야 해. 스무 시간도 넘게 걸려.”
-…….
“도착하면 한국 시각으로 이틀 뒤야. 플라이트 넘버 찍어서 보내 줄게. 데리러 와.”
-…정세연.
“최수혁.”
-응.
“보고 싶어서 숨도 못 쉬겠어.”
옆을 지켜 주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다시 녀석의 곁으로 가야 했다.
***
“We'll be landing soon. Please make sure your seat backs and tray tables are in their full upright position.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합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이 원위치에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시오.)”
인천 상공을 날던 비행기가 관제탑 클리어런스를 받고 드디어 착륙 준비에 들어갔다. 총 비행시간만 18시간. 중간 경유 체류 시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엉망이 된 시차는 둘째 치고 씻지 못해서 짜증이 났다. 라운지의 음식들도 형편없었고 기내식은 손도 대지 못했다. 와인과 스낵으로 겨우 연명하던 나는 지나간 영화들을 보며 억지로 시간을 때웠다.
기체가 마침내 대한민국 상공에 들어선 것을 디스플레이로 확인하고 만세를 불렀지만 오늘따라 인천공항에 랜딩하려는 비행기들이 많아 공중에서 20분 넘게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 기장의 지속된 업데이트 안내 방송이 없었다면 나는 항의를 할 뻔했다.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 비행기는 순번을 부여받았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로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한국은 겨울의 한가운데 와 있었다.
게이트 연결 통로를 지나는 와중에도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화장실로 들어가 옷매무새를 만졌다. 씻지 못해 불안한 마음에 향수를 뿌렸다.
얼굴이 초췌하네. 손을 적셔 머리를 다시 만졌다.
비행기조차 상공에서 순번을 기다려야 했던 만큼 인천공항에는 입국자들로 바글바글했다. 연말연시 시즌이었다. 같이 내린 다른 미국인들은 모두 외국인 입국 심사로 향했다. 나는 텅텅 빈 자동 입국 심사대 중 하나를 골라 대한민국 국적 여권을 스캔하고 반가운 기계음을 들었다.
“귀국을 환영합니다.”
***
랜딩 전 휴대폰으로 녀석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주차장 위치를 설명하는 짤막한 메시지에도 가슴이 떨렸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응.”
-내렸어? 입구로 갈까 하고.
“오지 마. 눈에 띌 거 아니야.”
-뭔 상관이야.
그 말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최수혁은 여전했다.
녀석과의 전화를 끊고 가방을 끌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터미널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주정차 가능한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앞에 익숙한 차 번호가 보였다. 나의 아우디 A7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자동으로 트렁크가 열렸다. 짐은 모조리 부쳐 달라고 하고 캐리어 달랑 하나만 가지고 돌아온 탓에 더 실을 것은 없었다. 트렁크를 닫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나를 쳐다보는, 여전히 멋있는 최수혁이 거기 있었다. 심장 박동이 100bpm을 넘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차에 탔다.
“어서 오세요. 손님”
녀석의 입술이 포물선을 그리며 얕게 웃고 있었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내가 자주 치는 택시 기사 상황극을 최수혁이 연기했다. 야 금방 건 좀 발연기인 거 같은데. 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녀석이 연기를 이어 간다.
“손님이 한 가지 알아 두셔야 하는 게 있는데… 이 차는 이제 후진이 안 됩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고 웃었다. 시나리오 좋다.
“그래도 출발할까요?”
녀석의 능청맞은 연기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내 대답을 들어야 출발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나는 안전벨트 버클을 채웠다.
“갑시다, 까짓 거.”
내 말에 녀석이 바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마치 어제까지 본 사람들처럼 보통의 대화를 나누었다. 비행은 괜찮았냐, 배는 안 고프냐, 시차는 괜찮냐. 녀석은 궁금하지도 않는 질문들을 하고 나는 꽤나 디테일한 대답을 했다.
그러다 잠이 들어 버렸다. 최수혁이 잠깐 전화를 받는 동안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보스턴 시간으로 따지면 한밤중이라 내 몸은 여전히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녀석이 깨웠다. 피곤해 보여서 깨우고 싶지 않지만 일단은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눈을 뜨니 익숙한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느 때처럼 12층으로 올라왔다.
어쩐지 우리는 주차장에서부터 말이 없었는데 나도 녀석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달려들었다. 녀석에 의해 신발장 쪽으로 밀쳐진 나는 거침없이 들어오는 녀석의 혀를 받으며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밀었다.
힘겨루기를 하는 수컷들의 싸움처럼 나는 최수혁을, 녀석은 나를, 서로를 점령하기 위해 머리칼을 헤집고 상대방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잠깐만, 잠깐. 나… 읏… 24시간 동안 못 씻었어.”
“그런데.”
곧바로 셔츠가 벗겨졌다.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어느새 바지 버클이 풀린 나는 필사적으로 최수혁의 손길을 저지했다.
“잠깐 좀… 일단 씻고… 읏….”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녀석이 혀를 빨아 당겼다. 침실까지 갈 시간도 없다는 듯 나는 소파에 내동댕이쳐졌다. 곧바로 바지가 벗겨졌고 허벅지로 단단히 나를 고정하고 허리를 세운 최수혁이 스스로 상의를 탈의했다.
잘빠진 근육으로 무장된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40일 넘게 상상만 해 왔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니 이성이고 뭐고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래 일단 하고 보자.
최수혁의 벨트를 풀고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겼다. 순식간에 둘 다 나체가 되어 맨살을 부딪쳤다. 키스를 하고 전희를 즐길 시간도 없었다. 둘 다 너무 급했다. 이미 성이 날 대로 나 버린 두 성기가 맞닿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하아… 너 벌써… 갈 것 같은데?”
“무슨 개소리야… 윽.”
최수혁이 두 성기를 쥐고 한꺼번에 쓸어 올렸다. 미국 집에 있을 때 자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터라 단 한 번의 손길에도 사정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그 상대가 최수혁이다. 다시 내 입술을 삼키며 혀를 집어넣어 미친 듯이 물고 빨던 녀석의 손짓이 빨라졌다.
아무리 녀석의 손가락이 길다 해도 풀로 발기된 성인 남자 둘의 성기를 다 쥐기엔 역부족이다. 나도 손을 내려 같이 쥐고 흔들었다. 그 덕에 최수혁의 신음이 커졌다.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던 나는 녀석의 목을 빨며 좀 더 녀석의 성기를 집중 공략했다.
“하아… 정세연, 읏….”
누가 더 빨리 싸게 할 것인지 자존심 대결이라도 하는 듯 거칠고 빠르게 움직였다. 내 입술을 다시 찾은 최수혁이 길게 혀를 집어넣으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아아… 흣!!”
미친 듯한 사정감이 몰려와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흘러내리는 정액을 묻혀 뒤로 가져갔다.
“야… 나 쉴 틈은 좀 주고… 읏….”
“하아… 나도 급해.”
최수혁의 급한 손가락이 회음부를 곧바로 쑤시기 시작했다. 전혀 배려가 없었고 제 욕망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런 녀석의 행동이 나를 오히려 더 흥분시켰다.
금새 두 개가 들어왔다. 오랜만이라 꽤 아픈데 최수혁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천천히 하라는 나의 말은 녀석의 혀에 감겨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최수혁이 그대로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앗!! 흣….”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땀에 절어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심하게 흥분 상태인 최수혁의 표정. 시발… 다시 혼자 상상했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나니 내 안의 욕정이 타올랐다.
“읏….”
녀석이 곧바로 허리 짓을 시작했다. 한두 번은 입구에서 천천히 해 주는 것 같더니 곧바로 사정없이 끝까지 밀고 들어온다. 잊고 있었던 저릿한 고통에 주먹이 꽉 죄어져 왔다.
그대로 피스톤 운동을 시작한 녀석이 계속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참기 힘든 것 같았다. 한동안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았던 뜨거운 구멍에 제 것을 온전히 밀어 넣고 박고 또 박았다.
“윽!”
마지막까지 사정감을 참던 녀석이 끝내는 항복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미간을 좁히며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녀석의 표정이 너무 섹시해서 나는 다시 반쯤 발기해 버렸다.
성기를 빼낸 녀석이 내 위로 쓰러졌다. 미쳤다. 콘돔도 하지 못하고 정액이 온 사방에 튀어 이제 이 소파는 버려야 할 듯싶다. 나는 또 어떤가. 24시간 동안 씻지도 못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정사를 나눈 탓에 꼴이 한층 더 엉망이 되었다.
녀석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말을 안 듣는다. 야 일어나라고. 나 씻고 싶단 말이야.
“한 번 더 해. 아니 세 번 더 해.”
고개를 든 최수혁이 욕심꾸러기처럼 굴었다. 나도 하기 싫은 건 아니다. 하고 싶다. 하고 싶은데…
“일단 좀 씻자. 제발. 내가 너무 더러워서 그런다.”
“난 더러운 정세연도 좋아.”
“나도 더러운 최수혁 좋긴 한데 이제 우리 시간 많잖아. 나 백수야.”
그제서야 녀석이 몸을 일으켜 주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거실을 보니 난리가 났다. 동물의 왕국 같았다. 이사 나갈 집이라 다행이다. 이제 여기서 더는 못 살지 싶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데 녀석이 따라 들어왔다. 나가라고 하기에는 내 밑의 물건이 이미 너무 솔직했다. 녀석의 소원대로 우리는 그날 세 번 더 했다.
***
이메일로 안내받은 인터뷰 장소는 디자인이 매우 세련된 오피스였다. 총 직원 200명. 창업한 지 딱 3년째 되는 잘나가는 스타트업이었다.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친구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캐주얼 정장도 아닌 후드티를 입었고 왁스가 묻지 않은 곱슬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스타트업 처음이시죠? 어… 저희 JD 보셨겠지만 해외 쪽 관리해 줄 경력직이 필요해서요. 다른 지원자들이랑은 배경이 좀 다르셔서 놀랐어요. 어… 루신에는 5년 있으셨네요?”
“네. 5년 4개월. 그중 3개월은 관리직이었습니다.”
“아, 저희는 직급이 없어요. 그냥 프로젝트마다 리드를 그때그때 뽑아서 하는 편이라.”
그는 프린트된 내 이력서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질문을 했다. 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자신이 생각하는 전략과 구성을 내게 설명했고 나의 피드백을 원했다.
스타트업은 처음이라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늘 1년 2년씩을 잡고 계획하던 기획만 하다 보니 시즌별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그의 전략은 흥미로웠다. 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그 아이디어는 반드시 내가 해야 효과가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 괜찮은데요? 아니면 여기를 이렇게….”
그는 마커펜을 놓을 줄 몰랐고 나도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가 다른 색 마커펜을 들고 동참하고 있었다.
“…아니요. 태국은 방콕과 방콕이 아닌 곳의 차이가 정말 심해요. 인터넷 아예 안 들어오는 지역도 많고. 마켓 성격을 하나로 같이 보고 망한 사례가 많아요. 차라리 여기를….”
화이트보드에 이미 동남아시아 진출에 대한 다음 분기 계획이 차례차례 그려졌다. 입사한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오버했나 싶어서 잠깐 머뭇거렸다. 대표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케이, 저는 좋아요. 세연님이 가능한 빨리 팀에 합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피드백 너무 빠른가? 하하하.”
그는 나를 세연님이라 칭하고 회사를 팀이라 불렀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채용 의사를 밝혔다.
“연봉은 얼마 원하세요? 본사 계셨으면 꽤 받으셨겠는데.”
“인센티브 다 하면 1억 좀 넘습니다.”
“와우. 세다. 하하. 저희는… 음…. 최대한 해서 8천까지는 맞춰 드릴 수 있어요. 대신 스톡옵션 조건을 상향 조정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연봉 협상까지 대표가 하다니. 심플하네. 하긴 권한도 없는 HR과 지리하게 밀고 당기기 하는 것보다는 깔끔할 듯싶었다.
“그러시죠.”
“나이스! 쿨하시네. 근데 루신은 왜 그만두셨어요? 아,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아웃팅당했어요. 애인이 많이 유명한 남자라서.”
“와우 저런. 마음 고생 좀 하셨겠네요.”
그의 반응은 그것이 끝이었다. 놀란다거나 못 들은 척 무시하지도 않았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채용에 하등 문제 되지 않았고, 그 유명한 애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긴 했다. 애당초 연예계 뉴스 같은 건 클릭조차 하지 않는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자기보다 얼마나 더 잘사는지 못사는지, 관심을 두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들.
그는 곧 계약서를 보내 주겠다고 했고 입사 날짜를 가능한 빠르게 조정해 줬으면 한다는 개인적 소망도 내비쳤다. 연봉은 좀 깎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했다.
-대기업 다니다 작은 데로 가면 적응하기 어렵지 않나?
집으로 가는 도중 최수혁이 인터뷰 결과가 궁금했는지 전화를 했다.
“아니야. 나 원래 스타트업 관심 많았어. 좀 일찍 당겨서 실행에 옮긴 것뿐이지. 넌 어땠어, 오디션?”
최수혁은 돈다발을 싸 들고 찾아오던 상업 영화판과 절연을 선언했다. 덕분에 연기로만 승부를 봐야 하는 소위 이름값 있는 감독들을 직접 찾아가 오디션을 봐야 했다. 명색이 탑클래스 배우도 이런 류의 감독들 앞에서는 한낱 연기자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녀석은 조연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모르겠네. 기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생각 좀 해 보겠다고 하는 분위기야. 아, 오전에 니네 집주인이 찾아온 것 같던데.
“응, 전화 받았어. 다음 세입자가 치수 잰다고.”
-세연아.
“응.”
-우리 같이 살까?
녀석도 운전중인지 깜빡이 넣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웃었다.
“이미 같이 사는 거랑 다름없지 않았어?”
-나도 이사 갈까 해서. 너만 괜찮으면 정식으로 집 구해서 같이 살고 싶은데.
새삼스러운 녀석의 제안에 나는 솔직히 설레었다. 마치 상견례 다 하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 둔 마당에 프로포즈를 받는 느낌이 이런 거 아닐까 싶었다. 그럼 나도 Yes라고 명확하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이 예의겠지.
“그래. 그러자. 나도 너랑 같이 살고 싶어.”
그리고 기간은 무기한으로 부탁해.
***
꾹꾸두드르르링-
이 집 벨소리가 왜 이러냐. 한 번도 눌러 본 적이 없어서 1206호 아줌마네 집 벨소리가 특이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기척이 없길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문이 열리고 아줌마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나왔다.
“어머나. 1205호 총각이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학생 집에 있어요?”
“우리 딸? 우리 딸은 이 시간에 집에 없지. 수능 끝난 고3이 미쳤다고 집에 붙어 있겠어요? 호호호.”
아… 진짜 이 집 모녀는 재밌다.
“그럼 이거 좀 전해 주세요.”
“뭐예요? 어머, 헤드폰이네? 고장 난 거 어떻게 알았대?”
나는 어제 백화점에서 산 분홍색 무선 헤드폰이 든 종이봉투를 아줌마에게 건네주었다. 가지고 있던 거랑 비슷한 색으로 샀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신세 진 것도 있고, 수능도 끝났고 해서요. 겸사겸사.”
“어머나 우리 딸이랑은 언제 또 친하게 지냈대? 고마워요. 좋아하겠다.”
“네 그럼.”
“이사는 언제 가요? 집 내놨다면서?”
“아 네. 다음 주에 나가요.”
“이번에 들어오는 세입자는 이혼남이래요. 애는 없는 거 보니까 다행이지 뭐. 서울대 나왔다더니 직장은 그저 그렇데?”
진짜 신기한 아줌마였다. 그녀는 잠깐 집을 보러 왔던 다음 세입자의 신상명세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새로 들어올 그 이혼남이 걱정되었다. 끝없이 말이 이어지는 셜록 아줌마와 겨우 작별을 하고 아파트 밑으로 내려와 택시를 탔다.
오랜만에 이동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백수인 나를 위해 이동재는 하루 연차를 냈다. 다음 날 술독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결연한 마음을 다지고 우리는 실내 포장마차를 찾았다. 꼬물거리는 산낙지와 골뱅이 안주를 보니 여기가 내 고향 서울이 맞는 듯싶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한동안 안주만 집어 먹었다.
“형 때문에 우리 의무 교육 받아 이제.”
“무슨?”
“LGBT 교육이라고 인사팀에서 준비했어. 어… 그런 거 막 전문으로 하시는 강사님이 와서 성 강의 해 주신대.”
개뿔 어이가 없네 진짜. 중학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을 상대로 이제 와서 성교육을 실시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웃팅당한 직원 결국 사표 쓰게 만들었다고 외부에서 말이 좀 돌았나 봐. 그런 교육이라도 좀 해야 체면이 사나 보지 뭐.”
“늦게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네.”
“의외로 인사팀이 개념이 있더라고? 앞으로 회사 이름 걸고 익명 게시판에서 근거 없는 소문 퍼트리고 그러다 걸리면 인사고과에 불이익 주겠다고 공고까지 내려왔어.”
흐흥. 정호민 대리가 아주 맹활약을 하는구만.
“이사 준비는 잘돼 가? 그냥 최수혁 집으로 들어가지 왜 둘 다 이사를 가?”
“스읍… 거기 아줌마들이 좀 뭐랄까… 자식 교육은 잘하는데, 남한테 관심이 참 크다고 해야 할까. 딱히 그래서 막 피해를 주고 그러지는 않는데 좀 무서워. 부담스럽고.”
“그래서 한남동으로 간다고?”
“응.”
“와… 씨 애인이 부자라 걱정이 없네 형은.”
“나도 좀 보탰거든?”
그래 봐야 딱 두 장 보탰다. 자존심이 상해서 반월세로 돌려 반반 내자니까 최수혁이 이제 그런 미친 짓 좀 그만하라며 성질을 냈다. 이제 나도 돈을 좀 모아야겠다. 버는 대로 써 버리는 삶은 졸업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랜만에 막걸리도 시켰다. 뭔가 한국스러운 게 먹고 싶었던 나는 이것저것 주문하고 섞어 마시고 그러다 인사불성으로 취해 버렸다.
이동재가 어디다 전화를 한다. 실실 웃다가 막 소리도 지르고. 그러더니 다 해결되었다며 계산을 했다.
“야 니가 왜 내애….”
혀가 꼬부라지는 것 같았다.
“아이씨, 그럼 내가 백수한테 얻어먹으랴?”
비틀거리며 카드를 꺼내는 이동재를 말리지 못했다. 가게에서 나와 길바닥에 잠시 앉아 택시를 기다렸다. 어디선가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짜증을 냈다.
“야 이동재!”
김시은 니가 여기 왜 왔냐. 택시에서 내린 김시은이 이동재를 째려보며 화를 낸다. 아… 역시… 둘이 그런 거였군.
“팀장님, 섭섭해요. 저한테는 오셨다고 연락도 안 하시고.”
“미안.”
“다음에 저녁 같이해요. 일단 오늘은 저 인간을 좀….”
그래 잘 가라. 흐뭇하다. 낑낑거리며 이동재를 택시 안으로 집어넣는 김시은을 보고 나는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에서 택시 하나가 나를 보고 유턴을 해서 달려왔다. 기사 아저씨가 시력이 좋으시네. 택시를 타고 시계를 보니 벌써 1시다.
“아저씨 저 술 냄새 많이 나나요?”
“네? 아, 허허허. 좀 나네요.”
에이씨… 최수혁은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한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뒤 일단 우리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곳곳에 쌓여 있는 박스들 사이를 뚫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 카펫 위에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했다. 술 취했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머리가 핑 도는 것 같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서 수건으로 닦고 거실로 나왔다. 박스에서 속옷을 하나 찾아 낑낑대며 입고 바지도 입고 셔츠도 다시 주워 입었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곧장 최수혁의 집으로 들어갔다. 벌써 2시가 다 된 시간이다. 불 꺼진 침실로 도둑고양이처럼 들어가 입었던 옷을 다시 탈의하고 녀석의 옆에 누웠다.
늦게 들어오니까 먼저 자라고 했더니 진짜 먼저 자고 있네. 젖은 머리칼이 차가웠는지 녀석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나를 확인하고는 자동으로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음… 좋은 냄새 나는데.”
따뜻한 녀석의 손이 허리를 쓸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 몸을 만지는 최수혁의 손길이 좋아 곧바로 잠이 들었다.
***
“으음….”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신음이 들렸다. 그래, 나는 분명히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깨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최수혁이 나를 잠 못 자게 괴롭히는 것 같아 깼다고 생각했는데 괴롭히고 있는 쪽은 나였다. 나는 어느새 녀석의 위에 올라와 멋대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잠이 깬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하는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키스를 한다고 했는데 자꾸만 이상한 데 부딪히고 몸이 가누어지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으으응….”
녀석의 말에 대답하려 했는데 내 입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막걸리에 누가 최음제라도 탄 거야? 나는 혼자 고양이처럼 최수혁의 얼굴을 핥으며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으응… 하고 싶어.”
나 뭐라니. 미쳤다. 자다가 혼자 꼴려서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애인을 깨워 버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일단 분명한 건, 너무 하고 싶었다.
“한 번 하자 최수혁….”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빨며 칭얼거렸다. 슬라임처럼 흐물거리며 자신을 만지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었는지 녀석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정세연씨 미국 한 번 다녀오더니.”
“으음….”
“아메리칸 스타일로 바뀌어서 오셨네.”
그 말과 함께 녀석이 나를 힘으로 눕히고 곧바로 상위를 점령했다. 그대로 녀석에게 입술과 혀가 빨렸다.
물컹한 혀끝이 뱀처럼 들어와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키스의 리듬에 맞춰 녀석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망설임 없이 밑으로 내려간 오른쪽 손이 헐떡이는 내 성기를 낚아채었다.
“하앗… 좋아….”
이미 발정한 암캐처럼 끈적한 액체를 끊임없이 흘리고 있던 나는 한 번의 손길에도 허리를 틀었다. 술에 취해 정신없이 온몸이 달아올랐다.
녀석이 속옷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빛나는 나신을 쳐다보니 흥분되어 미칠 것 같았다. 왁싱으로 깔끔하게 제모된 상태의 최수혁의 성기는 더욱 크고 도드라져 보인다.
녀석이 나를 팔로 감아 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살갗이 닿는 느낌이 에로틱했다. 자다가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나의 모습에 흥분했는지 녀석의 상태도 이미 선을 넘어 있었다.
“바로 해도 돼?”
최수혁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뭘 물어. 나는 긍정의 의미로 녀석의 손가락을 빨아 그대로 회음부에 가져다 대었다. 최수혁이 다시 한 번 키스를 해 오며 빨린 손가락을 그대로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아 흣! 하아… 좋아. 흣….”
예고 없이 침범당한 손길에 곧바로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손가락이 곧 두 개가 되었다. 마음과는 달리 부드럽게 풀려야 할 입구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술기운에서인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몸에 짜증이 났다.
“그냥… 그냥 넣어 줘… 빨리.”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최수혁이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서랍에서 젤을 꺼냈다. 얼마 남지 않은 내용물을 거의 쏟아 낸 후 그대로 구멍 안을 헤집었다.
그 느낌이 좋아 나는 혀를 살짝 물며 고개를 젖혔다. 그대로 내 목덜미를 물며 상체가 내려온 최수혁의 손길이 갑자기 가팔라졌다.
“아… 아앗… 흣….”
빨라진 손가락의 움직임에 나는 요동치듯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평상시 소리를 잘 내지 않던 내가 작정하고 도발한 탓인지 최수혁은 참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계속 입술을 깨물었다.
“흣… 좋아… 아아… 하아… 넣어 줘… 흣….”
취했다는 핑계로 나는 느끼는 그대로를 내뱉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최수혁이 그대로 자신의 물건을 박아 넣어 버렸다.
“악!!”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정신이 번쩍 드는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잔뜩 힘이 들어간 최수혁의 상체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제 성기를 꽉 물어 버린 내 구멍을 보며 낮게 신음을 내뱉는 녀석의 반응에 다시 한 번 흥분이 몰려왔다.
“아파?”
조금 물러서려는 녀석의 하체를 놓칠세라 빠져나가려는 허리를 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발, 빼지 마. 존나 좋으니까.”
익숙한 욕지거리에 최수혁이 작게 웃었다.
“정세연 술 깼네.”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녀석이 왼쪽 손가락을 넣어 입안을 헤집었다. 내 혀의 움직임에 맞춰 녀석의 허리 짓이 시작되었다. 어마어마한 쾌감이 밀려왔다.
제정신이 돌아온 나를 다시 골로 보내 버리려는 속셈이었는지 최수혁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술 취한 사람을 데리고 몸을 섞는 것이 찝찝했었는지 아까까지는 최소한의 쾌감만 느끼고 있던 녀석이 돌변했다. 건장한 성인 남자인 우리는 서로의 욕정을 풀어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녀석이 점점 더 빠르게 성기를 박았고 나는 심한 전립선 자극을 받아 사정해 버렸다. 곧바로 녀석도 사정해 버렸다. 계속해서 참고 있던 사정감을 해방해서인지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등을 돌려 콘돔을 빼고 정리를 하는 녀석을 나는 다시 도발했다.
나 술 깼다. 제대로 해야지.
최수혁을 밑에 깔고 상위를 점령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스스로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내벽 안에 아직 젤이 남아 있던 탓에 찌걱찌걱 소리가 들렸다. 반쯤 벌어진 입술을 핥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체위였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를 바라보는 최수혁의 표정에 흥분이 감돌았다. 다시 발기된 녀석의 성기를 가져가 구멍에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로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꾹 다문 입술 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하체에 체중을 실어 조금씩 밀어 넣었다.
“읏….”
최수혁의 반응을 듣기 위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쾌감을 참아 냈다. 참기 힘들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던 녀석이 스스로 허리를 올려 반쯤 더 밀어 넣었다.
“아아… 으읏….”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성기가 내벽에 닿을 때마다 조여 주고 풀어 주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하는 허리 짓은 힘이 들었다. 하체 체중을 완전히 실어 버리면 내벽이 뚫려 버릴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기를 반복하며 숨을 헐떡였다. 그런 나를 보며 최수혁이 허리를 잡았다. 왜?
“고문인데 이거.”
“왜… 하아… 별로야?”
“아니, 너무 좋아서… 하… 못 참을 거 같아.”
감질나는 내 행동에 최수혁의 인내심이 끊겨 버린 듯했다.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반 남은 녀석의 성기가 쑤욱 안으로 들어왔다.
“아흣…! 야 시발… 아… 너무 흣…. 깊… 아훗….”
자비롭지 않은 본래의 성격이 나온 최수혁이 그대로 펌프질을 계속했다. 누워서도 허리를 드는 힘이 굉장했다. 가빠진 두 숨소리가 뒤섞였다. 최수혁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섹스를 스포츠처럼 하고 있는 녀석의 팔에 힘줄이 잡혔다. 단단해진 복근에 선명한 블럭 모양이 잡히고 그 사이로 땀이 흘렀다.
“하아… 나… 하아… 갈 거 같은데.”
“읏… 해… 흣… 그냥 해. 읏….”
콘돔 없이 넣어 버린 탓에 녀석이 사정하면 뒷일은 뻔했다. 그러나 이미 침대는 내 정액으로 난장판이고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끝 간 데 없이 녀석과 섹스를 하고 싶었다.
“읏… 하아….”
숨을 길게 참았던 최수혁이 사정을 하고 근육을 풀었다. 손을 뻗어 티슈를 감싼 채 녀석의 성기를 밖으로 빼내었다. 주르륵 흐르는 하얀 액체가 시트에 튀었지만 나는 그냥 녀석의 몸 위에 쓰러져 버렸다. 아직 발기된 채 두 육체 사이에 끼어 있던 내 성기를 최수혁이 다시 잡았다.
“한 번 더 할까?”
미친놈이 다시 도발했다.
“Absofuckinlutely (존나 찬성이야.)”
다른 미친놈도 물러서지 않는다.
***
우리 집이 먼저 나가면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나는 겨울 내내 최수혁의 집에서 지내다 녀석이 집을 정리함과 동시에 함께 그 아파트를 나왔다. 한남동에 있는 고급 빌라로 이사를 오며 우리는 각각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침대가 두 개일 필요가 없었고, 소파가 두 개일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고 취향을 맞추었다. 같이 산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새로 이사 온 빌라는 전용 입구가 있는 탓에 다른 입주민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경비도 살벌했기에 외부인도 출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동재의 말처럼 돈 많은 애인을 둔 덕에 나는 여러모로 호강에 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주차장이었다.
빌라는 각각의 입주민들에게 전용 주차장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총 5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받았는데 이미 최수혁은 차가 3대 있었다. 내 차까지 합해서 총 4대였다가 바로 며칠 전 5대가 된 사건이 있었다.
“미친….”
아침부터 옷 입고 나가자는 말에 나는 귀찮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제발 말 좀 들으라는 최수혁의 짜증 섞인 고함에 투덜거리며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었다. 왜 아침부터 성질을 내냐며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나는 이 미친놈이 뭘 준비해 놓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주차장 입구에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미친… 미친 새끼… 진짜….”
우리 집 주차장 마지막 자리에 신형 포르쉐 카레라가 섹시하게 서 있었다. 컬러도 완벽한 실버, 시트는 빨간 가죽, 전방 후방 등이 들어오며 퍼져 나가는 아찔한 자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녀석이 키를 주었다. 뭐? 게다가 내 거라고? 와 씨…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해서 3년 동안 빨리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최수혁 망한 게 아니었나 봐. 이거 못해도 2억은 넘을 텐데.
“작년에 주문해 둔 건데. 그사이 누가 도망가시는 바람에 인도받을 타이밍을 놓쳤지.”
“하… 너 진짜….”
스웨덴 여행을 다녀온 뒤 곧바로 주문한 것 같았다. 독일 차 성애자인 내가 여행 내내 주야장천 포르쉐가 얼마나 섹시한 차인지를 설파해 놓은 덕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부지런하게 입을 털어야 한다.
“자존심 상해서 못 받겠다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는데.”
“자존심? 그게 뭐죠?”
나는 뚜벅뚜벅 다가가 최수혁을 덥석 끌어안았다. 이사 온 뒤 또 하나의 장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안을 수 있다. 보는 사람도 없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목덜미에서 풍겨 오는 녀석의 향수 냄새를 맡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다행이네. 좋아해서.”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거 같아.”
내 반응에 녀석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한 번씩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좋은 감정을 표현하는 때가 있다. 평상시 까칠한 애인을 둔 최수혁은 그런 순간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한 번씩 어울리지도 않는 서프라이즈를 해 준다. 내가 평생을 두고 천천히 갚아 줄 생각이다.
그렇게 우리는 포르쉐를 타고 서울을 한 바퀴 돌았다. 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 신호 대기를 할 때마다 운전석을 힐끔 보며 주인장을 확인했다. 그래 나야, 내가 바로 이 차 주인이야. 광대뼈가 올라가는 걸 참느라 혼이 났다.
지난달부터 최수혁은 차기작 촬영에 들어갔다. 주연도 아니고 중반부터 나오는 조연이었지만, 출연료도 턱없이 적었고 촬영 스케줄 편의 조정도 거의 해 주지 않았지만, 녀석은 만족해했다.
존경하는 감독이라 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웃통을 벗거나 난데없이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 했다. 그 점은 참 나도 만족스러웠다.
날씨가 점점 따듯해졌다. 6월의 초여름 날씨가 서울 곳곳에 내려와 앉았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도 5개월이 지난 터라 업무는 많이 익숙해졌다.
“점심 아직이세요? 저쪽에 컵라면도 있어요.”
“땡큐 에이미. 근데 라면을 안 좋아해요.”
“와, 라면 안 좋아하는 한국 사람 처음 봐요.”
혼자 공용 라운지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태블릿 PC를 두드리는 나를 발견한 팀원이 신기하다며 웃었다. 나도 아예 안 먹는 건 아니었는데 최수혁이 라면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몸이 그렇게 좋구나 싶었는데 이젠 같이 살다 보니 나도 안 먹게 되었다.
내 자리는 따로 있었지만 공용 라운지에서 혼자 군것질을 하며 일하는 것이 은근 능률이 오른다. 작게 음악도 흐르고 커피도 공짜고. 말 거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한두 시간은 꼭 라운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미팅 시간이 되어 회의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참가 여부를 옵션으로 둔 사람들도 거의 온 것 같았다. 이 회사는 미팅이 항상 15분 단위로 끊겼다. 내가 45분으로 세팅해 둔 이 미팅은 지난달 내내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서 받은 사업 전략 피드백을 설명해 주는 자리였다.
대표는 제일 구석진 곳에 의자를 빼고 앉아 좋은 자리를 팀원들에게 양보한 채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제공 받은 PPT 미리 메일로 드려서 보고 오셨겠지만….”
지난 쿼터에 큰돈을 들여 사업 전반부에 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다음 투자를 수월하게 받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고 좀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보자는 내 의견에 대표가 동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이 건을 처리하느라 나는 좀 바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있는 어펜딕스 보시면 참고할 수 있으십니다. 다른 질문 있으실까요? 시간 5분 남았네요. 맥스, 첨언할 거 있어요?”
구석에서 귀만 열어 놓고 자기 할 일을 하던 대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 주었다. 그렇게 미팅이 40분 만에 끝났다. 깔끔하게 다들 해산한다.
“SY, 지난번에 부탁하신 거요.”
회의실을 나가던 중 개발자 한 명이 지난번 부탁했던 통계 자료를 히트맵으로 만들어서 보여 주었다. 와씨, 복잡했던 데이터들이 시각적으로 보이니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개발자와 더 친하게 지내야겠어.
“아 SY, 근데 우리 다음 투자자 모임 때 끌어오기로 한 거….”
대표가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눈치가 빠른 개발자는 얼른 자리를 피해 준다. 회의실이 문이 닫히고 잠시 비밀스러운 내용이 오갔다. 그렇게 빠듯하게 5분을 더 쓰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휴대폰이 울렸다.
[촬영 일찍 끝났어. 퇴근 언제야?]
오늘 미팅을 좀 준비하느라 일찍 출근했으니 4시쯤에 퇴근해도 괜찮다. 이 회사는 출퇴근이 자유롭다. 일찍 왔으면 일찍 가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 논리였다. 맞는 말인데 실현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직을 잘했다는 생각을 또 몇 번 했었다. 왜냐하면,
[지금 퇴근해도 돼]
내 애인은,
[회사로 갈게]
[데이트하자]
나보다 더 시간이 자유로운 남자니까.
“어 퇴근하세요? 서베이 결과 정리한 거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메일로 보내 줄래요? 아침 일찍 확인할게요.”
“넵! 그럼 내일 뵈어요.”
깔끔하게 내일로 미뤄 준 팀원의 배려에 나는 책상 정리를 마치고 소지품을 챙겼다. 오피스 한쪽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팔에 걸고 마시던 커피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벌써 퇴근하시네. 아쉽….”
“우리 회사 유일하게 수트 빼입고 오시는 SY….”
“세상 잘생긴 남자들은 다 임자 있거나 게이라더니….”
“게이인데 임자까지 있어….”
“그 임자도 캐릭터가 판타지네….”
“파고들 틈이 없다 정말….”
뒤에서 잡담이 들렸지만 언제나처럼 모른 척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깐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머리를 정리했다.
[내려와]
완벽한 최수혁은 타이밍까지 잘 맞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회사 사람들과 수고! 를 외치며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니 저 멀리서 페라리가 1차선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오후 4시. 적당히 더워진 6월의 늦은 오후에 우리는 데이트를 한다.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내 점심을 챙기기 위해, 또 녀석은 이른 저녁으로 치기로 하고 밥을 먹기로 했다. 신사동으로 가자는 내 제안에 녀석이 차선을 변경했다.
도착은 했는데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가로수길 끝에 있는 유료 주차장까지 가서 차를 세우게 되었다.
“좀 걸을까?”
최수혁의 제안에 내가 긍정하고 차에서 내렸다. 재킷은 그냥 팔에 걸친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었다. 녀석은 조금 더 열이 나는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선글라스를 쓴 채 차에서 내렸다.
먼저 걷던 나를 향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보폭을 맞추었다. 여름을 맞아 파릇파릇 잎이 자라난 가로수들이 보기 좋게 정렬되어 있었다. 평일 오후인 탓에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다음 주 출장 가. 3일 정도. 인도네시아.”
“이번 달만 벌써 두 번째네.”
“촬영은 어때? 늦는다더니 오늘 일찍 끝났어 왜?”
“앞 촬영이 길어져서 못 찍었어. 내일 다시 나가야 해.”
“뭐야, 내일 토요일인데.”
최수혁이 나에게 온전히 허락한 주말의 시간을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던 나는 깐깐하게 구는 감독에게 속으로 화를 냈다.
“같이 가 그럼. 촬영하는 거 구경해도 되고.”
그럴까 그럼. 나는 가볍게 그 제안을 수락했다.
지난겨울 치렀던 혹독한 대가는 뜻밖의 자유를 선사했다. 우리는 내키는 대로 서로의 존재를 일상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로 인해 잃은 것이 있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최수혁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나를 한 번 쳐다본다.
“받아.”
내 말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표정을 보니 어디서 걸려 온 전화인지 알 것 같았다. 통화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녀석이 가까운 편의점 옆에 마련되어 있는 흡연 구역으로 걸었다.
“네, 네. 아닙니다. 좋은데요.”
최수혁이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손이 부족해 보였다. 녀석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와 불을 붙이고 입에 물려 주었다. 길게 연기를 뿜는 녀석의 입술에서 작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다시 최수혁의 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내가 빼앗아 입에 물었다. 순간 지나가는 행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대부분은 선글라스를 낀 최수혁을 알아보았고 그중 몇 명은 나까지 알아보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씩 웃으며 물고 있던 담배를 길게 빨고서 다시 녀석에게 물려 주었다. 그들이 스스로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네, 그럼 그때 뵙죠.”
최수혁의 통화가 끝났다. 나까지 긴장된 탓에 니코틴을 빨았더니 살짝 몽환적인 기운이 돌았다. 서쪽으로 지고 있는 오후 햇살이 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확정된 거야?”
“응.”
녀석이 상당히 하고 싶어 했던 배역에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최수혁의 필모그래피에 올라갈 가장 유명한 감독이 될 것이다.
“축하 키스를 해 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네.”
녀석이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집에 가서 더한 거로 해 줘. 야하고 화끈하게.”
최수혁의 향수 냄새와 숨결이 느껴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짜릿함을 느꼈다. 그런 녀석의 귓속말을 들으며 다시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담배를 끄고 발걸음을 옮겼다.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갔지만 나는 어떤 야하고 화끈한 선물을 해 줄지 잠시 생각하느라 앞부분을 듣지 못했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달아오른 열기를 식혔다. 곧바로 이어지는 최수혁의 농담 섞인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우리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 내일 일어날 일. 그리고 같이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다. 정면으로 보다가도 가끔 나를 응시하는 최수혁의 시선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행인을 위해 간격을 좁히느라 부딪히는 어깨에,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들에게 섞여 들어갔다.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는 않지만 이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로맨스는 도저히 숨길 수 없다.
<완결>